202202 독서세미나 저자 초창 강연 요약]
지난 2월 7일(월) 저녁에 월요만나-독서세미나 & 저자 초청 강연을 성황리에 잘 마쳤습니다.
김회권 교수님이 열정적으로 강연해 주셨고, 교수님과 참여자들이 활발하게 질의응답을 진행했습니다.
강연 내용을 송윤강 작가님이 요약해 주셨습니다.
송윤강 작가님께 감사합니다.
------------
김회권 교수, <인문고전으로서의 구약성서 읽기> 강연 요약
- 송윤강 작가
구약성서가 인문고전이 될 수 있는가?
인문고전 필독서 1위는 플라톤의 [국가론]이다.
파스칼의 [팡세]도 필독 교양 도서에 들어가 있다. 이 책은 성경을 기본으로 하여 쓴 책이다.
그런데 성경은 필독 도서로 선정되지 못했다.
왜 그런가?
세상사람들이 성경을 종교 경전으로 삼는 사람들의 모습에 실망하였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은 성경 읽는 사람을 광신도처럼 생각한다.
역사적으로 볼 때, 강요된 기독교의 유신론적 세계관에 대한 반발로 르네상스와 과학혁명이 일어났다.
사람들은 앞으로 세상이 다시 기독교 유신론의 세상으로 돌아갈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성경은 고전으로서의 시효를 다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도올 김용옥이 쓴 [여자란 무엇인가]는 그의 구약성서관을 담고 있는 책이다.
도올의 이 성서관이 세상에서 성경을 보는 관점을 어느 정도 대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도올은 구약성서는 그리스 문명의 이성사회에 비해 사상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훨씬 열등한 히브리 민족의 자기보상 멘탈리티가 반영된, 열등한 신에 관한 기록이라 했다.
일본사람의 국수주의 사관이 반영된 [일본 서기]만큼이나 국수적인 책이라고 한다.
도올이 성경을 비판하고 배척하며 지적 조롱의 태도를 보이는 것은, 그가 2년간 신학 공부를 했는데, 성경의 권위를 낮게 평가하는 비평학문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반면에 마르틴 부버(Martin Buber, 1878~1965)가 쓴 [너와 나]와 아브라함 조슈아 헤셸(Abraham Joshua Heschel, 1907~1972)가 쓴 [예언자들]) 같은 책도 있다.
이 두 사람은 20세기에 활동한 유대교 랍비이자 신학자다.
유대교 사상을 가장 보편적인 현대 윤리로 재해석하여 세계를 놀라게 한 학자들이다.
헤셸이 쓴 [예언자들]이란 책은 마르틴 루터킹 주니어의 흑인민권운동을 구약성서로 옹호한다
마르틴 부버는 [너와 나]라는 책에서 인격적인 상호주의 철학을 전개했다.
이들은 구약 성서야 말로 오늘날 서구 민주주의를 설명하는 키워드가 다 들어 있는 고전 중 고전이라 했다.
이들은 구약 성서에 대한 사람들의 잘못된 오해를 깨닫게 해주었다.
[예언자들]은 유대인을 박해하던 히틀러 치하 독일에서도 구약 연구 붐이 일게 만든 책이다.
이 책에서는 하나님이라는 이름은 아무나 입에 담을 수 있는 이름이 아니라고 한다.
사람들은 기독교가 기득권을 가진 사람, 권력자나 국가가 힘 없는 서민을 억누르는 종교라 생각한다. 그러나 구약 성서는 권력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을 부를 자격이 없고, 권력을 빼앗긴 자들에게만 의미가 있는 이름이라 말하고 있다.
하나님이라는 이름은 파라오 입에서는 담을 수 없고, 모세와 히브리 노예만 담을 수 있는 말이다.
하나님의 이름은 이런 피억압자들이 지상의 모든 권력자와 싸울 수 있는 무기였다. 그 원동력을 예언자(선지자)들이 제공했다.
헤셸은 “잘 보라! 역사는 예언자가 설정한 아젠다에 따라서 전개되었다”고 했다.
영국에서 활동하던 유대인 랍비 신학자 조나단 잭스 Jonathan Sacks(1948-2020)가 이들의 뒤를 잇는 신학자다.
그는 [How to Lead a Good Life in Divided Times, 분열의 시대에 어떻게 선한 삶을 살 수 있는가]라는 주제로 강의를 했다.
잭스는 이 강의에서 구약 성서와 유대교를 보편적 인간존엄의 학문으로 재정의했다.
또 1961년생 이스라엘 태생 젊은 학자 요람 하조니가 미국 러커스 대학의 정치학 박사 논문으로 쓴 [The Philosophy of Hebrew Scripture 히브리 성서의 철학]이라는 책은 예레미야의 정치 철학에 대한 논문이다.
예레미야의 정치 철학에서 보여준 인식론과 존재론은 플라톤과 스크라테스 보다 200년은 앞선 것이다.
입헌군주제도는 영국에서 1215년 존 왕이 마그나 카르타에 서명함으로써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사무엘상 8장과 12장을 보면 이보다 훨씬 앞서 기원전 1000년경에 이스라엘에서 입헌군주제가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다윗 계열의 왕권은 토라 율법 아래 왕권을 제한받은 입헌군주제였다.
인문고전이란 각 시대와 독특한 문명의 모태에서 생성되었지만, 시간과 지리와 인종의 경계를 뛰어넘어 보편적으로 읽히며 인간에게 바른 삶을 가르치는 책이다.
인문고전은 인간의 존엄성을 가르치고, 인간의 어리석음을 책망하여 깨우치며 인간 운명의 한계성를 가르친다
구약성서는 인간의 존엄성에 대하여는 하나님의 형상 창조론을 가르치고, 인간의 어리석음과 한계에 대하여는 죄론을 가르친다.
세계적으로 검증된 인문고전들이 다루는 모든 주제가 다 구역 성서 안에 있다
또 고전은 바람직한 인간의 삶, 이상적인 공동체에 대하여 탐구한다.
풀라톤의 [국가론], 홉스의 [리바이어던], 칸트의 [영구평화론] 같은 책들이 다 그런 주제를 다룬다.
그런데 구약 성서의 예언서들을 읽어보면 이미 오래전부터 이상적인 정치질서에 대한 주제들을 다루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훨씬 더 격조 높고 영향력 있게 다룬다.
이처럼 구약성서는 기독교의 경전이지만, 오늘날에도 인문고전으로 읽히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책이다.
구약성서는 예수 그리스도다
구약의 39권 책들은 다양한 장르의 책이고 대부분 각각 독립적인 책이지만 전체적으로 하나의 장강 같은 대하 드라마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구약 전체를 통하여 일관되게 목적지향적인 하나님(예수님)의 발자국을 발견할 수 있다
창세기부터 바벨론 유배와 귀환까지 서사적으로 연결된다. 그 발자국이 예언자들이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집단으로 나타나지도 않았고, 각각 다른 시대와 지역에 살면서 한 번도 서로만난 적도 없다. 그런데도 한결 같은 맥락에서 하나님의 뜻을 말하고 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명기 6:4-5)
“이스라엘아 들으라” 하고 부르시는 하나님의 간절한 음성에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에 순종하여 행하는 이상화된 아들 이스라엘의 모습이 담겨 있다.
그러나 실제 이스라엘의 모습은 그렇지 못했다. 늘 듣고 싶은 마음과 듣고 싶지 않은 마음이 갈등하고 자주 불순종하는 이스라엘이었다.
이상화된 아들 이스라엘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실 때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마태복음3:17) 했다.
예수님은 구약 성서의 모든 말이 자신을 가리켜 한 말이라 하셨다.
요한복음5:46 ”모세를 믿었더라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
요한복음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히브리서10:7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느니라”
이처럼 인문고전으로 구약 읽기의 핵심은 예수님의 마음을 이해하며 읽는 것이다.
성서를 종교적으로 축소하여 읽는 것은 자기 구원에만 초점을 맞춘 구원실용론적 읽기다.
이는 성서의 인문고전적 가치를 전혀 모르는 것이다.
신학교에서 다루는 구약 개론은 대부분 목사 양성과 교회를 위해 최적화된 내용만 다루고 있다.
인문고전으로서의 구약성서 읽기의 한 예.
출애굽기에 보면 모세가 호렙산에서 사명 받는 장면이 나온다.
“6또 이르시되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모세가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리매 7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8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데려가려 하노라 9이제 가라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히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10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출애굽기 3:6-10)
하나님은 모세에게 자신을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소개하신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은 창세기 12-25장에, 이삭의 하나님은 26-28장에, 야곱의 하나님은 25-60장에 있다. 따라서 이 말은 ‘창세기 전체의 하나님’이라는 말과 같은 말이다.
모세가 창세기의 드라마를 이해하지 못했다면 하나님이 모세에게 자신을 이렇게 소개할 수 없다.
하나님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삼 세대에 걸쳐서 연속적으로 그들의 후손을 별과 같이 많게 하고,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기로 약속하셨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고 모세에게 소개하는 이 장면은 “나는 떠돌이로 박해받고 살고 있는 이스라엘에게, 그들의 일 세대 이 세대 삼 세대 조상에게 약속한 대로,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겠다는 언약을 이행하기 위하여 애가 타는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모세, 네가 나의 이 애타는 마음을 이해하고 이스라엘 백성을 잘 이끌기 바란다” 하고 간곡하게 부탁하는 장면이다.
모세가 하나님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의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출애굽기3:13) 하고 묻자, 하나님께서는 최초로 자신의 이름을 밝히신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출애굽기3:14)
한글성경에서는 원문 “에흐예 아쉐르 에흐예”를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I am who I am, NIV)”라고 번역했지만, 이러한 번역으로는 원 뜻을 정확히 파악하기 어렵다.
보다 정확한 뜻은 “내 이름은 지금까지 내가 설명한 바 대로다. 지금 내가 실행하려는 행동이 바로 내 이름이다.”라는 의미다. 즉 ‘애굽의 바로의 압제 밑에 죽어가는 히브리 노예들을 끝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해 내려고 하는 내 열정, 의지, 비전이 담긴 행동 자체가 바로 내 본질이고 이름이다’라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오셔서 행동으로 구현해 보이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의 뜻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구약의 하나님, 모세, 그리고 신약의 예수는 같은 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구약의 하나님은 질투하고 분노하고 심판하시는 무서운 하나님으로, 신약의 하나님(예수님)은 사랑이 많고 화해적인 하나님으로 이분법적으로 이해하는 사람이 많다.
이는 영지주의자 마르시온의 신학이다.
마르시오니즘은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을 구분한다.
이는 매우 잘못된 것이다.
구약 성서를 인문학적으로 잘 이해하면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은 같은 분이라는 것을 알수 있다ⓢ
(기독인문학연구원 주최 2022.2.7 저자초청 세미나 ‘인문고전으로서의 구약성서 읽기’ 강의 내용을 발췌 요약했습니다.)
202202 독서세미나 저자 초창 강연 요약]
지난 2월 7일(월) 저녁에 월요만나-독서세미나 & 저자 초청 강연을 성황리에 잘 마쳤습니다.
김회권 교수님이 열정적으로 강연해 주셨고, 교수님과 참여자들이 활발하게 질의응답을 진행했습니다.
강연 내용을 송윤강 작가님이 요약해 주셨습니다.
송윤강 작가님께 감사합니다.
------------
김회권 교수, <인문고전으로서의 구약성서 읽기> 강연 요약
- 송윤강 작가
구약성서가 인문고전이 될 수 있는가?
인문고전 필독서 1위는 플라톤의 [국가론]이다.
파스칼의 [팡세]도 필독 교양 도서에 들어가 있다. 이 책은 성경을 기본으로 하여 쓴 책이다.
그런데 성경은 필독 도서로 선정되지 못했다.
왜 그런가?
세상사람들이 성경을 종교 경전으로 삼는 사람들의 모습에 실망하였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은 성경 읽는 사람을 광신도처럼 생각한다.
역사적으로 볼 때, 강요된 기독교의 유신론적 세계관에 대한 반발로 르네상스와 과학혁명이 일어났다.
사람들은 앞으로 세상이 다시 기독교 유신론의 세상으로 돌아갈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성경은 고전으로서의 시효를 다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도올 김용옥이 쓴 [여자란 무엇인가]는 그의 구약성서관을 담고 있는 책이다.
도올의 이 성서관이 세상에서 성경을 보는 관점을 어느 정도 대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도올은 구약성서는 그리스 문명의 이성사회에 비해 사상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훨씬 열등한 히브리 민족의 자기보상 멘탈리티가 반영된, 열등한 신에 관한 기록이라 했다.
일본사람의 국수주의 사관이 반영된 [일본 서기]만큼이나 국수적인 책이라고 한다.
도올이 성경을 비판하고 배척하며 지적 조롱의 태도를 보이는 것은, 그가 2년간 신학 공부를 했는데, 성경의 권위를 낮게 평가하는 비평학문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반면에 마르틴 부버(Martin Buber, 1878~1965)가 쓴 [너와 나]와 아브라함 조슈아 헤셸(Abraham Joshua Heschel, 1907~1972)가 쓴 [예언자들]) 같은 책도 있다.
이 두 사람은 20세기에 활동한 유대교 랍비이자 신학자다.
유대교 사상을 가장 보편적인 현대 윤리로 재해석하여 세계를 놀라게 한 학자들이다.
헤셸이 쓴 [예언자들]이란 책은 마르틴 루터킹 주니어의 흑인민권운동을 구약성서로 옹호한다
마르틴 부버는 [너와 나]라는 책에서 인격적인 상호주의 철학을 전개했다.
이들은 구약 성서야 말로 오늘날 서구 민주주의를 설명하는 키워드가 다 들어 있는 고전 중 고전이라 했다.
이들은 구약 성서에 대한 사람들의 잘못된 오해를 깨닫게 해주었다.
[예언자들]은 유대인을 박해하던 히틀러 치하 독일에서도 구약 연구 붐이 일게 만든 책이다.
이 책에서는 하나님이라는 이름은 아무나 입에 담을 수 있는 이름이 아니라고 한다.
사람들은 기독교가 기득권을 가진 사람, 권력자나 국가가 힘 없는 서민을 억누르는 종교라 생각한다. 그러나 구약 성서는 권력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을 부를 자격이 없고, 권력을 빼앗긴 자들에게만 의미가 있는 이름이라 말하고 있다.
하나님이라는 이름은 파라오 입에서는 담을 수 없고, 모세와 히브리 노예만 담을 수 있는 말이다.
하나님의 이름은 이런 피억압자들이 지상의 모든 권력자와 싸울 수 있는 무기였다. 그 원동력을 예언자(선지자)들이 제공했다.
헤셸은 “잘 보라! 역사는 예언자가 설정한 아젠다에 따라서 전개되었다”고 했다.
영국에서 활동하던 유대인 랍비 신학자 조나단 잭스 Jonathan Sacks(1948-2020)가 이들의 뒤를 잇는 신학자다.
그는 [How to Lead a Good Life in Divided Times, 분열의 시대에 어떻게 선한 삶을 살 수 있는가]라는 주제로 강의를 했다.
잭스는 이 강의에서 구약 성서와 유대교를 보편적 인간존엄의 학문으로 재정의했다.
또 1961년생 이스라엘 태생 젊은 학자 요람 하조니가 미국 러커스 대학의 정치학 박사 논문으로 쓴 [The Philosophy of Hebrew Scripture 히브리 성서의 철학]이라는 책은 예레미야의 정치 철학에 대한 논문이다.
예레미야의 정치 철학에서 보여준 인식론과 존재론은 플라톤과 스크라테스 보다 200년은 앞선 것이다.
입헌군주제도는 영국에서 1215년 존 왕이 마그나 카르타에 서명함으로써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사무엘상 8장과 12장을 보면 이보다 훨씬 앞서 기원전 1000년경에 이스라엘에서 입헌군주제가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다윗 계열의 왕권은 토라 율법 아래 왕권을 제한받은 입헌군주제였다.
인문고전이란 각 시대와 독특한 문명의 모태에서 생성되었지만, 시간과 지리와 인종의 경계를 뛰어넘어 보편적으로 읽히며 인간에게 바른 삶을 가르치는 책이다.
인문고전은 인간의 존엄성을 가르치고, 인간의 어리석음을 책망하여 깨우치며 인간 운명의 한계성를 가르친다
구약성서는 인간의 존엄성에 대하여는 하나님의 형상 창조론을 가르치고, 인간의 어리석음과 한계에 대하여는 죄론을 가르친다.
세계적으로 검증된 인문고전들이 다루는 모든 주제가 다 구역 성서 안에 있다
또 고전은 바람직한 인간의 삶, 이상적인 공동체에 대하여 탐구한다.
풀라톤의 [국가론], 홉스의 [리바이어던], 칸트의 [영구평화론] 같은 책들이 다 그런 주제를 다룬다.
그런데 구약 성서의 예언서들을 읽어보면 이미 오래전부터 이상적인 정치질서에 대한 주제들을 다루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훨씬 더 격조 높고 영향력 있게 다룬다.
이처럼 구약성서는 기독교의 경전이지만, 오늘날에도 인문고전으로 읽히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책이다.
구약성서는 예수 그리스도다
구약의 39권 책들은 다양한 장르의 책이고 대부분 각각 독립적인 책이지만 전체적으로 하나의 장강 같은 대하 드라마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구약 전체를 통하여 일관되게 목적지향적인 하나님(예수님)의 발자국을 발견할 수 있다
창세기부터 바벨론 유배와 귀환까지 서사적으로 연결된다. 그 발자국이 예언자들이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집단으로 나타나지도 않았고, 각각 다른 시대와 지역에 살면서 한 번도 서로만난 적도 없다. 그런데도 한결 같은 맥락에서 하나님의 뜻을 말하고 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명기 6:4-5)
“이스라엘아 들으라” 하고 부르시는 하나님의 간절한 음성에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에 순종하여 행하는 이상화된 아들 이스라엘의 모습이 담겨 있다.
그러나 실제 이스라엘의 모습은 그렇지 못했다. 늘 듣고 싶은 마음과 듣고 싶지 않은 마음이 갈등하고 자주 불순종하는 이스라엘이었다.
이상화된 아들 이스라엘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실 때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마태복음3:17) 했다.
예수님은 구약 성서의 모든 말이 자신을 가리켜 한 말이라 하셨다.
요한복음5:46 ”모세를 믿었더라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
요한복음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히브리서10:7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느니라”
이처럼 인문고전으로 구약 읽기의 핵심은 예수님의 마음을 이해하며 읽는 것이다.
성서를 종교적으로 축소하여 읽는 것은 자기 구원에만 초점을 맞춘 구원실용론적 읽기다.
이는 성서의 인문고전적 가치를 전혀 모르는 것이다.
신학교에서 다루는 구약 개론은 대부분 목사 양성과 교회를 위해 최적화된 내용만 다루고 있다.
인문고전으로서의 구약성서 읽기의 한 예.
출애굽기에 보면 모세가 호렙산에서 사명 받는 장면이 나온다.
“6또 이르시되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모세가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리매 7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8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데려가려 하노라 9이제 가라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히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10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출애굽기 3:6-10)
하나님은 모세에게 자신을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소개하신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은 창세기 12-25장에, 이삭의 하나님은 26-28장에, 야곱의 하나님은 25-60장에 있다. 따라서 이 말은 ‘창세기 전체의 하나님’이라는 말과 같은 말이다.
모세가 창세기의 드라마를 이해하지 못했다면 하나님이 모세에게 자신을 이렇게 소개할 수 없다.
하나님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삼 세대에 걸쳐서 연속적으로 그들의 후손을 별과 같이 많게 하고,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기로 약속하셨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고 모세에게 소개하는 이 장면은 “나는 떠돌이로 박해받고 살고 있는 이스라엘에게, 그들의 일 세대 이 세대 삼 세대 조상에게 약속한 대로,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겠다는 언약을 이행하기 위하여 애가 타는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모세, 네가 나의 이 애타는 마음을 이해하고 이스라엘 백성을 잘 이끌기 바란다” 하고 간곡하게 부탁하는 장면이다.
모세가 하나님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의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출애굽기3:13) 하고 묻자, 하나님께서는 최초로 자신의 이름을 밝히신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출애굽기3:14)
한글성경에서는 원문 “에흐예 아쉐르 에흐예”를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I am who I am, NIV)”라고 번역했지만, 이러한 번역으로는 원 뜻을 정확히 파악하기 어렵다.
보다 정확한 뜻은 “내 이름은 지금까지 내가 설명한 바 대로다. 지금 내가 실행하려는 행동이 바로 내 이름이다.”라는 의미다. 즉 ‘애굽의 바로의 압제 밑에 죽어가는 히브리 노예들을 끝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해 내려고 하는 내 열정, 의지, 비전이 담긴 행동 자체가 바로 내 본질이고 이름이다’라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오셔서 행동으로 구현해 보이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의 뜻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구약의 하나님, 모세, 그리고 신약의 예수는 같은 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구약의 하나님은 질투하고 분노하고 심판하시는 무서운 하나님으로, 신약의 하나님(예수님)은 사랑이 많고 화해적인 하나님으로 이분법적으로 이해하는 사람이 많다.
이는 영지주의자 마르시온의 신학이다.
마르시오니즘은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을 구분한다.
이는 매우 잘못된 것이다.
구약 성서를 인문학적으로 잘 이해하면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은 같은 분이라는 것을 알수 있다ⓢ
(기독인문학연구원 주최 2022.2.7 저자초청 세미나 ‘인문고전으로서의 구약성서 읽기’ 강의 내용을 발췌 요약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