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7일(월) 저녁에 월요만나-독서세미나 & 저자 초청 강연을 성황리에 잘 마쳤습니다.
김회권 교수님의 열정적인 강의와 여러 참여자들의 활발한 질의 응답이 진행되었습니다.
질의응답 내용 중 일부를 소개합니다.
아래의 내용을 질문하고 김회권 교수님이 답하신 내용을 잘 요약해 주신 송윤강 작가님께 감사합니다.
202202 독서세미나 저자 초창 강연 중 질의응답 일부 요약]
김회권 교수, <인문고전으로서의 구약성서 읽기>
질문 및 요약정리: 송윤강 작가
(질문)구약의 하나님 나라와 신약의 천국의 차이에 대하여
교수님 책을 읽으면서 구약 전체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나라, 하늘나라, 천국은 같은 개념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나라의 개념이 다양하게 적용되고 있다고 배웠습니다.
그런데 구약의 하나님의 나라와 신약의 천국은 다소 다른 느낌을 갖게 하는 것 같습니다.
구약의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에서, 현실 세계 속에서의 실현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구약에서는 우리가 죽어서 가는 천국에 대한 이야기가 없는 것 같습니다. 물론 지옥에 대한 이야기도 없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신약에 들어서는 예수님이 오심으로써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했고, 종말에 완성된다고는 하지만, 주로 사후 세계로서 천국에 주로 초점을 맞추고 있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장차 천국에서 받을 면류관을 위하여 이 땅에서 살면서 겪는 고난을 견디라는 식이지요.
구약의 하나님 나라와 신약의 천국의 차이를 어떻게 봐야 하고, 우리의 신앙생활에 미치는 영향은 무엇일까요?
-----------
(답변)
구약의 하나님 나라와 신약의 천국이 다르게 여겨지는 것은 한국에 복음을 전한 선교사들과 그 영향을 받은 목사님들이 영지주의적으로 해석했기 때문입니다.
신약 성경은 구약의 영생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습니다
천국이란 땅에서 이루어진 하나님 나라의 언약적 공동체적 삶이 영생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영생은 시편 133편에 나와 있습니다.
“1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2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고
3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이 땅에서 형제와 자매가 연합하여 동거하는 삶이 바로 천국의 삶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를 선하고 아름답다 하시면서 영생의 복을 명하셨습니다.
마태복음 8장에 “11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 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12그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앉는 천국은 죽어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천국이 이 땅에서 시작되어 죽음 저편까지 연장되기 때문에 영생입니다.
신약성경은 이 땅에서 시작되는 천국이 죽음이후에도 온전히 계승되어 완전케 되는 천국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구약의 하나님 나라가 온전케 되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뭉쳐진 사람들의 사회생활은 지상에서 맛볼 수 있는 천국의 모습입니다.
신약이 말하는 천국과 구약의 하나님 나라는 같은 것입니다.
이 땅의 하나님 나라는 이루어져 가는 천국이고 사후에 경험한 천국은 완성된 하나님 나라입니다.
내가 쓴 요한복음 주석서[하나님 나라 신학으로 읽는 요한복음] 3장과 6장을 보면 ‘영생’에 대하여보다 자세한 설명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왜 우리가 하나님 나라인 이 땅에서 고난을 받아야 하는가요?
천국의 공동상속자로서 고난을 받는 것입니다.
로마서 8:17에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라 했습니다.
우리가 받는 고난은 하나님 상속받기 위해 우리가 택한 자발적 고난이자 사랑의 고난입니다.
왜 사랑이 고난인가?
우리 죄성이 사랑을 불편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난이라는 쓴 경험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만일 타락하지 않았다면 고난이 고난으로 여겨지지 않습니다.
타락한 본성 때문에 고난처럼 다가오는 것입니다.
(추가질문) 예수 믿어 구원을 받는 것에 대하여
천국과 관련된 추가 질문입니다.
예수를 믿음으로써 구원을 얻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복음에 접할 기회가 없는 사람들, 예를 들면 어린아이라든지, 장애로 인하여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사람이라든지, 미전도 종족 등은 구원받아 천국에 갈 수 없는 것인가요?
-------------
우리가 볼 때는 그 사람들이 예수님을 몰랐다고 생각할 수 있어도, 하나님은 그 사람들이 예수님을 몰랐다고 단정하지 않으실 수도 있습니다.
나 자신을 생각해보십시오.
내가 무슨 자격이 있어 구원받았습니까?
하나님께서 아무 공로 없는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하셨다면, 내가 보기에는 예수를 믿지도 않고 아무 공로를 세우지도 않은 것 같은 그 사람을 구원해준다고 하나님께 항의할 수 없습니다.
‘예수 믿으면 천국 가고, 안 믿는 사람은 지옥간다’고 주장하는 것은 ‘믿음공로주의’입니다.
특히 많은 한국 기독교인들이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잘못된 생각입니다.
믿음공로주의는 성경에 근거가 없습니다.
예수 믿는 것은 순전히 예수님 보혈의 은혜에 의한 것입니다.
구원이 먼저이고, 믿음은 그 다음입니다.
로마서 10:10에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했습니다.
이 구절을 잘못 해석하면 믿음과 입으로 시인하는 것이 구원에 앞선 행위처럼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다음의 내용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14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15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믿음보다 보내심과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보내심과 전파하는 일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그 사람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에 사람을 보내 복음을 전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믿음으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여 사람을 보내는 때부터 이미 시작된 것입니다.
칼빈도 그의 [기독교 강요] 3권에서 구원의 순서를 ‘구원 – 회개 – 회개의 열매에 의한 믿음’이라 했습니다.
믿음조차도 나로 말미암음이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떠한 경우에도 믿음을 공로로 삼을 수 없습니다.
그래도 복음제시를 받았는데 거부하면 구원받을 수 없지 않는가요?
꼭 그렇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복음제시를 한 사람이 잘못 전했기 때문에 거부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복음 제시를 거부한 사람에게만 책임을 물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공평하신 분입니다.
누가 예수 믿어 구원받고 안 받고는 내가 걱정할 일이 아닙니다.
구원은 우발적으로 그냥 봄볕처럼 찾아옵니다.
구원의 높이와 깊이와 길이는 끝이 없습니다.
지난 2월 7일(월) 저녁에 월요만나-독서세미나 & 저자 초청 강연을 성황리에 잘 마쳤습니다.
김회권 교수님의 열정적인 강의와 여러 참여자들의 활발한 질의 응답이 진행되었습니다.
질의응답 내용 중 일부를 소개합니다.
아래의 내용을 질문하고 김회권 교수님이 답하신 내용을 잘 요약해 주신 송윤강 작가님께 감사합니다.
202202 독서세미나 저자 초창 강연 중 질의응답 일부 요약]
김회권 교수, <인문고전으로서의 구약성서 읽기>
질문 및 요약정리: 송윤강 작가
(질문)구약의 하나님 나라와 신약의 천국의 차이에 대하여
교수님 책을 읽으면서 구약 전체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나라, 하늘나라, 천국은 같은 개념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나라의 개념이 다양하게 적용되고 있다고 배웠습니다.
그런데 구약의 하나님의 나라와 신약의 천국은 다소 다른 느낌을 갖게 하는 것 같습니다.
구약의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에서, 현실 세계 속에서의 실현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구약에서는 우리가 죽어서 가는 천국에 대한 이야기가 없는 것 같습니다. 물론 지옥에 대한 이야기도 없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신약에 들어서는 예수님이 오심으로써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했고, 종말에 완성된다고는 하지만, 주로 사후 세계로서 천국에 주로 초점을 맞추고 있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장차 천국에서 받을 면류관을 위하여 이 땅에서 살면서 겪는 고난을 견디라는 식이지요.
구약의 하나님 나라와 신약의 천국의 차이를 어떻게 봐야 하고, 우리의 신앙생활에 미치는 영향은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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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구약의 하나님 나라와 신약의 천국이 다르게 여겨지는 것은 한국에 복음을 전한 선교사들과 그 영향을 받은 목사님들이 영지주의적으로 해석했기 때문입니다.
신약 성경은 구약의 영생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습니다
천국이란 땅에서 이루어진 하나님 나라의 언약적 공동체적 삶이 영생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영생은 시편 133편에 나와 있습니다.
“1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2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고
3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이 땅에서 형제와 자매가 연합하여 동거하는 삶이 바로 천국의 삶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를 선하고 아름답다 하시면서 영생의 복을 명하셨습니다.
마태복음 8장에 “11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 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12그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앉는 천국은 죽어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천국이 이 땅에서 시작되어 죽음 저편까지 연장되기 때문에 영생입니다.
신약성경은 이 땅에서 시작되는 천국이 죽음이후에도 온전히 계승되어 완전케 되는 천국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구약의 하나님 나라가 온전케 되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뭉쳐진 사람들의 사회생활은 지상에서 맛볼 수 있는 천국의 모습입니다.
신약이 말하는 천국과 구약의 하나님 나라는 같은 것입니다.
이 땅의 하나님 나라는 이루어져 가는 천국이고 사후에 경험한 천국은 완성된 하나님 나라입니다.
내가 쓴 요한복음 주석서[하나님 나라 신학으로 읽는 요한복음] 3장과 6장을 보면 ‘영생’에 대하여보다 자세한 설명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왜 우리가 하나님 나라인 이 땅에서 고난을 받아야 하는가요?
천국의 공동상속자로서 고난을 받는 것입니다.
로마서 8:17에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라 했습니다.
우리가 받는 고난은 하나님 상속받기 위해 우리가 택한 자발적 고난이자 사랑의 고난입니다.
왜 사랑이 고난인가?
우리 죄성이 사랑을 불편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난이라는 쓴 경험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만일 타락하지 않았다면 고난이 고난으로 여겨지지 않습니다.
타락한 본성 때문에 고난처럼 다가오는 것입니다.
(추가질문) 예수 믿어 구원을 받는 것에 대하여
천국과 관련된 추가 질문입니다.
예수를 믿음으로써 구원을 얻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복음에 접할 기회가 없는 사람들, 예를 들면 어린아이라든지, 장애로 인하여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사람이라든지, 미전도 종족 등은 구원받아 천국에 갈 수 없는 것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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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볼 때는 그 사람들이 예수님을 몰랐다고 생각할 수 있어도, 하나님은 그 사람들이 예수님을 몰랐다고 단정하지 않으실 수도 있습니다.
나 자신을 생각해보십시오.
내가 무슨 자격이 있어 구원받았습니까?
하나님께서 아무 공로 없는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하셨다면, 내가 보기에는 예수를 믿지도 않고 아무 공로를 세우지도 않은 것 같은 그 사람을 구원해준다고 하나님께 항의할 수 없습니다.
‘예수 믿으면 천국 가고, 안 믿는 사람은 지옥간다’고 주장하는 것은 ‘믿음공로주의’입니다.
특히 많은 한국 기독교인들이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잘못된 생각입니다.
믿음공로주의는 성경에 근거가 없습니다.
예수 믿는 것은 순전히 예수님 보혈의 은혜에 의한 것입니다.
구원이 먼저이고, 믿음은 그 다음입니다.
로마서 10:10에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했습니다.
이 구절을 잘못 해석하면 믿음과 입으로 시인하는 것이 구원에 앞선 행위처럼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다음의 내용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14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15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믿음보다 보내심과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보내심과 전파하는 일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그 사람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에 사람을 보내 복음을 전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믿음으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여 사람을 보내는 때부터 이미 시작된 것입니다.
칼빈도 그의 [기독교 강요] 3권에서 구원의 순서를 ‘구원 – 회개 – 회개의 열매에 의한 믿음’이라 했습니다.
믿음조차도 나로 말미암음이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떠한 경우에도 믿음을 공로로 삼을 수 없습니다.
그래도 복음제시를 받았는데 거부하면 구원받을 수 없지 않는가요?
꼭 그렇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복음제시를 한 사람이 잘못 전했기 때문에 거부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복음 제시를 거부한 사람에게만 책임을 물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공평하신 분입니다.
누가 예수 믿어 구원받고 안 받고는 내가 걱정할 일이 아닙니다.
구원은 우발적으로 그냥 봄볕처럼 찾아옵니다.
구원의 높이와 깊이와 길이는 끝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