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윤국영/"벳새다에서 가이사랴 빌립보 가는 길"/목회와 인문학


벳새다에서 가이사랴 빌립보 가는 길

윤국영 박사(기독인문학연구원 상임연구위원)


벳새다 들판

 

헬몬산 기슭에서 폭포를 이루며 울창한 물소리를 발하던 요단강은 50여 km를 남쪽으로 흘러 고요히 갈릴리 호수 북편으로 접어든다. 강에서 떠내 려온 비옥한 충적토는 이 호수 어귀 북동편 일대에 선상지를 형성하여 농 사짓기에 좋은 작은 평원을 이룬다. 호수 위 강렬한 태양이 저물며 어스름 이 짙어질 때면 이 일대는 빽빽한 수풀 사이로 깃드는 수많은 새의 보금자 리가 된다.

 

비옥하지만 황량한 풍경의 이 들판을 벳새다 들판이라 부른다. 그리고 이 지역에 예수의 세 제자 베드로, 안드레, 빌립의 고향인 벳새다(Bethsaida) 가 있다. 벳새다는 ‘어부의 집’이라는 뜻이다. 고기잡이가 마을의 전부일 수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지명이다. 실제로 갈릴리 호수에서 1년 내내 풍성한 고기잡이가 가능한 곳은 벳새다가 위치한 갈릴리 호수 북동편 일대뿐이다. 요단강을 따라 풍부한 먹잇감이 연중 내내 호수로 유입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갈릴리 가버나움, 타브가 지역에서 벳새다 방향으로 제자들과 배를 타고 건너셨던 호수 북부 일대는 이렇듯 어부들에게 황금 어장이자 익숙한 항로였을 것이다(마 6:45-52; 눅 9:10-17; 막 8:22-26). 수십 년 먹고 살기 위해 오갔던 뱃길. 그러나 이제 제자들은 예수와 함께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어 같은 물 위를 가로지른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곧 그물을 버려두고 따르니라” (막 1:17-18)


벳세다


유대사가 요세푸스(Flavius Josephus)에 의하면 헤롯왕의 아들 분봉왕 빌립(Herod Philip)은 주 후 30년경 어촌 마을 벳새다를 도시(polis)로 승격 발전시켰다. 그리고 당시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Tiberius)의 어머니 이름을 따서 이 도시의 이름을 줄리아(Julia)로 개칭했다. 빌립은 유대인 혈통이 흐르는 왕이었지만 생살여탈권을 쥔 로마 제국의 하수인 통치자일 뿐이었다. 예수 당시 로마 제국 내 도시(Polis)의 중요한 역할은 로마의 문 화와 우월성을 드러내는 것이었고 이에 따라 도시는 선진적 로마의 건축 요소로 채워지고, 그 가운데 황제 일가를 숭배하는 신전이 건립된다. 벳새 다 일대에서 발견된 한 동전에는 빌립이 벳새다에 건립한 신전으로 추정 되는 건물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헤롯 왕조의 왕들은 이렇듯 자신이 발행 하는 동전에 로마 황제의 얼굴이나 그 신전을 새겨넣어 로마에 대한 충성 심을 드러내고자 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형상과 이 글이 누구의 것이냐 이르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이에 이르시되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마 22:20-21)

 

벳새다는 예수 복음 사역의 주요 거점이자 회개하지 않아 책망받는 마을 중 하나이다(마 11:21; 눅 10:13). 예수의 본 마을 가버나움으로부터 도보 로는 약 13km 정도 거리이지만 요단강을 사이에 두고 있다. 요세푸스의 기록과 성경의 기록 등을 바탕으로 오늘날 갈릴리 호수 북동쪽에 위치한 두 장소, 에 텔(et-Tell)과 엘 아라즈(el-Araj)를 벳새다의 후보지로 본다.

 

에 텔(et-Tell)은 호숫가에서 북쪽으로 약 2km 남짓 떨어진 낮은 언덕에 위치하며 예수 시대에는 성벽에 둘러싸인 규모 있는 성읍의 모습을 보여 준다. 석회암 재질의 그릇과 유대 거주지에 특징적인 램프 등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유대인이 다수 거주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어업에 쓰이는 용 구들이 다수 발견되는 것을 볼 때 이곳 주민은 어업과 밀접한 연관을 맺었 을 것이다. 발굴자는 이 성읍 중심에 황제 숭배를 위한 신전의 흔적이 발 견되었다고 전한다.

 

또 다른 벳새다의 후보지 엘 아라즈(El-Araj)는 요단강이 호수로 유입되 는 지점 바로 옆 호숫가에 자리 잡고 있다. 2016년 첫 발굴이 시작된 이래 예수 시대 층위에서는 어촌 마을에서 로마적 도시로 변모되는 흔적들이 계속 발견되고 있다. 예수 시대로부터 수백 년 이후 비잔틴 시대 층위에서 발견되는 교회 모자이크 비문에는 ‘사도들의 우두머리 베드로’라는 표현 이 발견되는데, 벳새다에서 베드로의 집 위에 세워진 교회를 방문했다는 주 후 8세기 성지 순례객의 기록과 부합되는 면으로도 볼 수 있다.

 

이 두 장소는 서로 약 2km 정도 떨어져 있다. 두 곳 모두 유대인의 성읍이자 헤롯 빌립의 관할지이며 로마 문 화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는 점에서 공통적이지만 오늘날은 호숫가에 매 우 근접한 엘 아라즈(El-Araj)가 어부 출신 제자들의 고향마을에 더 부합한 다는 의견이 힘을 얻고 있다. 어쩌면 당대 어부들은 빠듯한 경제 상황으로 계절마다 일거리를 좇아 거주를 달리 했을지도 모르겠다. 어느 쪽이든 예수 의 벳새다 사역은 도시나 마을이 아닌 고요하고 평평한 이 일대 들판이 주요 무대였을 것이다.


골란


예수께서는 벳새다에서 맹인을 고치신 이후 벳새다를 떠나 가이사랴 빌 립보 여러 마을을 향하여 가셨다(막 8:22-38, 9:1). 벳새다 지역에서 가이 사랴 빌립보가 있는 헬몬산 기슭까지는 50여km 가까운 거리다. 예수 시 대에 가이사랴 빌립보로 가는 길은 거의 정북 방향 일직선으로 요단강 동 편 언덕을 타고 달린다. 이 여정 내내 왼편으로 요단강이 나란히 흐르고 그 너머에는 납달리 산지가 솟아 있다. 길 오른쪽으로는 골란고원(Golan Heights)이 펼쳐진다. 왼편으로 흐르는 요단강을 경계로 동편은 헤롯 빌 립의 관할지(Gaulanitis)요, 서편으로는 헤롯 안디바의 관할지(Galilee) 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로마 제국의 행정 분할에 국한되지 않고 이미 헬라 시대나 그 이전부터 팔레스타인 안팎 여러 지역에 흩어져 살기 시작했다. 주전 100년 전후로 하스모니안 왕조의 영토가 북쪽으로 헬몬산 기슭까지 크게 확장되었고, 이에 따른 유대인 이주 정책으로 인해 갈릴리를 비롯한 팔레스타인 북부 지역의 유대인 인구 증가는 더욱 가속화되었다. 갈릴리 가 유대인 집중 거주 지역이라면 예수 시대 골란 북쪽과 헬몬산 지역의 주 요 인구는 아랍 계통의 이두래인(Ituraeans)이었다(눅 3:1). 그러나 헬몬 산 기슭의 가이사랴 빌립보 지역에도 일정 부분 유대인 인구가 거주했을 것이다.

 

가이사랴 빌립보를 향해 가는 길 동편에 솟은 골란고원은 동쪽과 북쪽으 로 갈수록 더 고도가 높아지는데 구약 시대에는 바산 또는 바산 골란이라 불렸다(신 4:43; 수 20:8, 수 21:27; 대상 6:71). 골란고원은 갈릴리 호수 남동쪽에서 시작되어 헬몬산 남쪽까지 이르며 서쪽으로는 요단강과 훌라 계곡, 동쪽으로는 와디 라까드(Wadi Raqqad)까지가 경계이다. 화산 활동 에 의해 생성된 골란 지역의 고대 마을들은 가버나움 일대와 마찬가지로 어두운 화산암 빛깔을 띤다. 골란은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시리 아와 팔레스타인 지역의 정치적, 지리적 중간 지대이다. 전략적 요충지인 이곳에서 북동쪽으로 다메섹이 불과 60여km 떨어져 있다. 반대로 이 고 원에서 남서쪽으로는 갈릴리 지역이 훤히 내려다보인다. 현재 골란고원은 1967년 전쟁을 기점으로 시리아에서 이스라엘로 그 지배권이 바뀌었다.

 

골란고원을 넘어 다메섹으로 가려면 남서에서 북동 방향으로 비스듬히 넘어가야 한다. 벳새다에서 가이사랴 빌립보 길을 4시간 정도 걸으면 게쉐 르 브놋 야콥(Gesher Benot Ya’akov)이란 오래된 다리를 마주하게 된다. 수천 년 전부터 골란고원을 가로질러 팔레스타인-이집트 지역에서 시리 아-메소포타미아를 넘어가기 위한 요단강 도강 지점이요, 고대 국제 도로 ‘해변 길(Via Maris)’의 주요 포인트 중 하나다. 예수 시대에는 여기서 동북 방향으로 골란고원을 타거나 계속 북상하여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지중해와 시리아를 잇는 주요 도로와 합류하여 다메섹으로 갈 수 있었다. 구약시 대에는 서쪽 납달리 산지에 있는 갈릴리 중심 성읍 하솔(Hazor)에서 대략 현대 이스라엘의 90번 도로의 루트를 따라 계속 북상하거나 하솔 동편으로 게쉐르 브놋 야콥 지점을 통과하여 골란을 넘어 다메섹에 이르렀다.

 

그러고 보면 예수께서는 가이사랴 빌립보 가는 길을 따라 고대 지중해, 시리아, 메소포타미아 그리고 이집트의 문물과 사람이 숱하게 오갔던 역 사의 교차로를 지나가시는 셈이다. 이 길로 북상할수록 유대인 마을이나 인구는 조금씩 잦아들 것이며, 이방인과 이방 문화는 더 일상화될 것이다. 물론 이 길 주변으로 유대인 마을은 더러 있었을 터이고, 예수께서는 그곳 에서도 복음을 전하셨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 왜 멀리 가 이사랴 빌립보 지역까지 가셨을까 무엇을 더 염두에 두시는 바가 있었을 까 생각을 자아내게 한다.

 

훌라 계곡

 

게쉐르 브놋 야콥 지점을 지나면 곧 넓은 개활지가 펼쳐지는데 훌라 계 곡(Hula Valley) 혹은 훌라 평원이다. 예수 시대에 갈릴리를 관할하던 분 봉왕 헤롯 안디바는 갈릴리 행정 구역상 훌라 계곡 남쪽 경계까지 다스렸 다. 훌라 계곡부터 그 북서쪽은 페니키아 지역이며 그 동편으로는 빌립의 관할지인 골란고원이 계속된다. 가이사랴 빌립보로 가는 길은 훌라 계곡 과 골란고원이 맞닿은 야트막한 동쪽 언덕 비탈을 타고 이어진다.

 

훌라 계곡은 얕고 평평한 분지의 모습이다. 그 사이를 직선으로 재정비 된 요단강이 흐른다. 원래 계곡 남쪽에 약 13km² 크기의 얕은 호수, 그리 고 그 북편에 더 넓은 늪지대가 있었지만 대부분 개간되고 오늘날은 호수의 일부만 남아 있다. 구약 시대에 팔레스타인 땅 곳곳의 낮은 계곡 지대 는 가나안 문화의 보루 지역이자 지중해 문물의 이동 통로였다. 이 훌라 계곡도 악고나 두로, 시돈, 사렙다 등 지중해 페니키아 도시들과 연결되어 북이스라엘 왕국에 바알과 아세라 숭배를 유입시키는 통로가 된다(왕상 16:31). 페르시아 시대와 헬라 시대에도 서북부 팔레스타인 지역은 가나 안의 후예 페니키아인의 거주 지역으로 주변 일대에 강한 문화 경제적, 종 교적 영향력을 미쳤고, 이러한 영향은 예수 시대에까지 남아 있다.

 

그러나 문헌 및 성경 기록에 의하면 예수 시대에 이 페니키아 지역에 도 유대인 인구가 분포되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예수께서는 어쩌면 훌 라 계곡 이 어딘가를 경유하여 갈릴리 호수에서 두로와 시돈 지역을 방문 하셨을지 모르겠다. 그리고 거기서 수로보니게 여인을 만나셨다(마 7:24- 30, 15:21-28). 부스러기 은혜라도 간절히 구했던 수로보니게 여인. 받을 자격이 없음에도 얻는 구원의 은혜가 얼마나 그녀에게 소중했을까? 어쩌 면 예수께서는 그 여인에게서 스스로 자격 있다 믿는 유대인과는 다른 심 령의 가난함을 보지 않으셨을까?

 

“사람들이 동서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여하리니 보라 나 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 하시더라” (눅 13:29-30)

 

가이사랴 빌립보

 

왼편으로 훌라 계곡이 끝나는 즈음에 오른편으로 헬몬산이 성큼 다가와 있다. 북쪽으로 갈수록 나무가 두터워져 산림이 울창하다. 헬몬산 기슭은 안개가 많아 강수량이 풍부하며(1,200mm) 산 정상(해발 2,814m)은 종종 운무에 휩싸여 신비롭다. 이곳의 풍성한 이슬과 강수는 요단강을 이루 는 주요 세 지류(Hasbani, Dan, Banias streams)가 마르지 않게 하는 생 명의 원천이다(시 133:3). 골란고원의 거무스름한 화산암과는 달리 헬몬 산은 석회암과 그 계통 흙으로 덮여 뽀얀 베이지색의 정갈한 이미지를 연 출한다. 멀리 갈릴리 호수에서도 바라보이는 헬몬산의 장엄함은 고대인들 에게 분명 경외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1980년대에 진행된 헬몬산 유 적 탐사대의 보고에 따르면, 가 나안 시대부터 성산으로 여겨진 헬몬산에는 수천 년에 걸쳐 여 러 신들을 숭배했던 많은 흔적 이 봉우리와 여러 곳곳에서 발견된다고 한다. 신과 가장 가까이 맞닿을 수 있다고 믿는 이 높은 산에서 수천 년을 내려오며 신의 이름이 바뀌고 그 특성이 바뀌어도, 나를 가장 잘 보호해 줄 수 있는 존재라 받아들여 숭배하던 그 수많은 신들. 그리고 이 신들 앞에 가져갈 인생의 지난한 문제들은 얼마든지 있었다. 어디 헬몬 산뿐이겠는가? 민족마다, 지역마다 자신을 보호해 줄 신, 또 자신이 숭배 하고 정성을 쏟을 신을 찾는다.


헬몬산 기슭을 병풍 삼아 주전 3세기부터 숲의 신 판(Pan)을 위한 숭배 동굴이 조성되면서 이 지역은 파니아스(Panias=Banias)라는 이름으로 주 변 일대에 널리 알려지게 된다. 헤롯왕은 주전 19년에 아우구스투스 황제 를 기리는 신전(Augusteum)을 이 동굴 입구에 건립한다. 로마 제국이 세 계를 호령하던 그 시대에 출세의 발판은 지역마다 거행되는 로마 제국 공식 황제 숭배 의례에 적극 가담하는 것이었다. 헤롯왕의 아들 분봉왕 빌립은 주전 2년에 신전 지역 남쪽에 로마 도시 를 건립하고 이곳의 명칭을 가이사랴 빌립보 (Caesaria of Philip)로 변경한다. 이후 수 세기에 걸쳐 가이사랴 빌립보의 신전 지역에 는 새로운 숭배 장소가 계속 추가되고, 이 일 대는 후기 로마 시대까지 각종 신들과 신격화 된 황제 일가를 숭배하는 ‘성지’로 성황을 이룬다. 신의 도움을 얻고자, 사회적 성공을 이루고자 다양한 민족의 참배객 들이 이곳을 찾았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가이사랴 빌립보 지역에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셨다.

예수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어떠한가? 다윗 의 영광을 재현할 메시아를 기다리는 저들에 게 예수는 승리, 영광, 안위를 보장할 선지자, 어쩌면 저들이 고대하는 그 정치적 구원자였다. 오늘날 유대인들과 무슬림들에게 예수는 누구인가? 유대인들에게 그는 혁신적 랍비 요, 십자가에 처형되어 부활하지 못한 인물이다. 무슬림에게 그는 십자가에서 죽음을 맛보지 않고 승천한 인간 선지자 다. 바니아스와 헬몬산의 성지를 찾던 숭배자들에게는 어떠한가? 유대인 마술사나 능력 있는 선지자, 혹은 신 중에 하나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 다. 유대교, 무슬림 혹은 이교도 환경에서 태어나고 자랐다면 우리는 예수 를 누구라 했을까?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 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마 16:21-22)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b)라는 시몬 베드로의 위대한 대답. 그러나 후속된 베드로의 행동에서 어쩌면 당시 그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이생의 영광, 안위, 승리만을 보장하는 하나 님의 아들로 인식되지는 않았을지 모르겠다. 죄로 죽을 영혼에게 영생을 주시고자 이 땅에 오신 대속의 어린양. 그래서 예수께서는 죄에 대한 십자 가 죽음을 말씀하시는 것은 아닐까?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 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 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마 16:24-25)


2024. 09. 01.


출처: 교회성장연구소(portal.icg21.com/board/board.php?bbs_id=humanities&ptype=view&kbbs_doc_num=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