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이강선/"성경을 자국어로 번역하고 화형당한 '하나님의 선한 순교자', 윌리엄 틴테일(William Tyndale)"/목회와 인문학


"성경을 자국어로 번역하고 화형당한 '하나님의 선한 순교자', 윌리엄 틴테일(William Tyndale)"

이강선 교수(성균관대학교 초빙교수, 기독인문학연구원 연구위원)


1382년, 위클리프(John Wycliffe)가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고 그가 번역 한 성경이 영향을 끼치기는 했지만 이후 영국인이 자유로이 성경을 자국 어로 읽을 수 있게 된 것은 아니었다. 영국 평민들이 영어로 된 성경을 읽 을 수 있게 되려면 더 기다려야 했다. 평민들이 공적으로 영어 성경을 읽을 수 있게 된 것은 흠정성서라고 하는 킹 제임스 바이블(King James Bible) 이었지만 이 번역에 가장 큰 기여를 한 사람은 윌리엄 틴데일(William Tyndale, 1494~1536)이다. 킹 제임스 바이블은 혼자 번역한 것이 아니 라, 왕의 명령으로 54명의 학자들이 위원회를 만들어 모여 번역을 했다. 이 번역은 윌리엄 틴데일이 번역한 성경에서 약 70%를 가져왔으니 그만 큼 틴데일의 번역이 좋았다는 의미가 된다.

 

1382년에서 1611년, 자국어로 성경을 읽게 되기까지의 기간은 길고도 길었다. 그만큼 핍박이 심했다는 의미가 된다. 그동안 어떤 일이 있었을 까? 1428년, 유럽을 좌우하던 교황 마르티누스 5세(Martinus PP. IV)는 명령을 내려 무덤에 묻힌 위클리프의 유해를 파내어 불에 태운 뒤 재를 스 위프트강에 뿌리도록 했다. 반역자에게나 가할 형벌을 그에게 가했으니, 이 일은 이미 왕성하게 싹터오르고 있던 평민들의 열망을 잘라버리기 위 한 조치였다. 재를 강에 뿌린다는 것은 무덤이 없다는 의미다. 무덤이 없 다는 것은 후손이 그를 추모할 곳조차 없다는 의미다. 그것이 교황이 의도 한 바였다. 이 세상에 존재했다는 흔적을 없애 말살하는 것, 그렇게 해서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고자 했던 것인데, 오늘날의 현황은 교황 의 의도와 정반대가 되었다. 수많은 사람이 위클리프를 기억하고 있으며 그것도 ‘샛별’이라는 칭호를 붙여 우러르게 함으로써 교황보다 훨씬 더 높은 존재로 만들어놓았다.

 

교황의 이름은 기록에서, 그것도 위클리프를 처형한 존재로서만 남아 있 다. 샛별은 한 나라에서만 보는 것이 아니다. 여러 나라에서 볼 수 있는 별 이다. 이 별명처럼 여러 나라에서 위클리프를 기념하고 추앙하고 있으니 순전히 그가 성경을 자국어인 영어로 번역한 덕분이다. 한 역사가는 신을 향한 시대에 괄시받는 평민의 언어로 번역했다는 이유로 성경은 “돼지의 발굽에 짓밟혀 저속하게 되었다.”(Henry Hargraveas 세속 성경: 위클리 프 버전, 캠브리지 히스토리 바이블. 『성경 번역의 역사』에서 재인용)라고 적었다.

 

성경을 영어로 번역했다는 이유로 사형을 당한 인물은 또 있다. 앞서 언 급한 윌리엄 틴데일이다. 위클리프는 사후 화형을 당했지만 틴데일은 살 아생전 교수형을 당했다. 위클리프는 성경의 일부를 번역했고 다른 이들 을 협조하는 데에 더 중점을 두었다면 틴데일은 더욱 학자적이었다. 그는 성경을 코이네 그리스어에서 영어로, 신약과 구약 일부를 번역했다. 또한 위클리프는 중세 영어로 번역을 했기에 오늘날의 영어와는 다르지만 틴데 일이 사용한 영어는 오늘날에도 읽을 수 있으며 그가 만들어낸 영어 단어들과 구문들은 현대에도 사용되고 있다. 


윌리엄 틴데일에게 가해진 형벌 또한 가혹했다. 틴데일은 말뚝에 묶인 채 교살된 후 화형에 처해졌다. 그가 감옥에 갇혔을 때 간수들에게 끼친 감화 는 잘 알려져 있다. 그는 1년 반 동안 감옥에 갇혀 있었는데 그를 지키던 간수가 감화를 받아 개종했고, 간수의 딸, 그리고 간수 집안 사람들도 개종했 다고 한다. 그의 성품을 엿볼 수 있는 일화다. 


존 폭스(Jon Foxe)는 자신의 스승에 관한 이 이야기를 『순교자 열전』(Books of Martyrs, 1563)에 썼다. 폭스는 자신의 스승에 대해 단순히 순교자라고 쓴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선한 순교자’라고 썼고 그 이유에 대해 ‘틴데일은 주님이 특별히 임명하신 기관으로서, 하나님의 곡괭이로 교황의 교만한 성 직자들의 내적인 뿌리와 기초를 흔들었기 때문’이라고 썼다. 그에게 주어 진 이 표현은 성경을 번역한 행위보다는 평생에 걸친 그의 진실함과 교리 의 힘을 가리키고 있을 것이다. 진실하지 않았더라면, 자신의 원칙에 충실 하지 않았더라면, 교황과 국왕으로부터 압박을 받는 그 엄혹한 시대에 자 신을 배반하는 사람들로 인해 커다란 절망을 맛보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존 폭스는 틴데일의 말과 행동이 일치했다고 기록한다. 한편으로 초창기 에 그를 알고 있는 모든 사람에게 가장 덕 있는 사람으로 여겨졌고, 모두 가 그를 흠 없는 생활을 하는 사람으로 여겼다고도 기록한다. 그런가 하면 그의 마음이 성경에 빠져 있었다고 한다. 덕 있는 사람, 흠 없는 사람, 그리 고 성경에 빠져 있는 사람이란 어떤 의미일까? 성경의 본래 의미를 그대로 받아들인 사람이라는 의미였을까?

 

성경을 사랑한 그는 성경 자체보다 인간이 만든 전통을 더 중요시하는 토마스 모어(Thomas More)를 참을 수 없었다. 비록 토마스 모어가 당대

의 대법관으로 국왕의 신임을 받는 동시에 가톨릭교회에서 성인으로 추앙 받고 있고, 한편으로 『유토피아』를 쓴 저명한 저술가이기도 했지만 ‘예수 를 배신한 유다’라며 신랄하게 비판했다. 1531년에는 토머스 모어가 쓴『이단에 관한 대화』를 반박하는 글 『토머스 경의 대화에 대한 응답』을 썼 다. 그는 이 책의 여백에 토머스 모어를 ‘거짓의 교황!’이라고 명시해 놓았 는데, 토머스 모어가 전통을 성경보다 더 높게 평가한다고 생각했기 때문 이었다. 틴데일은 이 책에서 고백성사, 순례, 사죄경, 연옥, 십자가 기둥에 기도하기 등 가톨릭 전례들을 모두 바보스러운 의식과 성사라고 비판했다. 그는 모어가 복음의 진리를 외면하는 이유를 “성직자의 관을 쓴 자들의 도 움으로 명예와 높은 자리, 권력과 돈을 얻기 위한 것”이라고 야유했다.

 

그는 성경이 라틴어로 쓰여 있기 때문에 이런 일들이 일어난다고 생각했 다. 당시 평민들은 영어를 사용했고 성경은 라틴어로 쓰여져 있었다. 특별 한 사람들만이 성경을 읽을 수 있다면 그들은 교묘한 추론이나 성경의 근 거 없이 창안된 그들 자신의 전통으로, 또는 본문을 조작하여 본문의 의미 를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해석하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성 경이 무식한 평민이 사용하는 영어로 번역되면 가난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단순하고 명백한 말씀을 읽고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다. ‘쟁기를 모는 소년이 성직자보다 더 많이 성경을 알게 할 것(『성경번역의 역사』, 154)’ 이라는 그의 생각은 루터(Martin Luther)와 동일했다.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한 루터는 시장의 장사꾼도, 거리에서 뛰노는 아이들도 읽을 수 있도 록 하겠다는 마음으로 성경을 번역했던 것이다. 물론 두 사람의 만남도 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틴데일은 영국에 머무를 수가 없었다. 교황 은 물론, 국왕인 헨리 8세(Henry VIII)와의 사이도 좋지 않았다. 당시 헨리 8세는 교황의 눈치를 봐야 하는 입장에 있었 던 것이다. 틴데일은 1524년 영국을 떠나 독일 로 갔다. 틴데일은 함부르크(Hamburg)에서 비 밀리에 영어로 신약성경을 번역하고 그 후 쾰른 (Cologne)으로 가서 신약성경을 인쇄하기 시작 했다. 그 소식을 들은 의회가 인쇄 중단을 명령 하자 그는 보름스(Worms)로 옮겼다. 보름스의 한 인쇄업자에게서 틴데일이 번역한 영어 신약 성경을 6천 부 인쇄했다. 그리스어에서 영어로 번역한 그의 신약성경 초판이 1526년에 나왔다.

 

1526년 초, 틴데일은 곡물을 실은 영국행 배 에 영어 번역 성경을 숨겼다. 큰 상자나 맥주 통, 옷 보따리, 밀가루와 옥수수 부대 등의 짐 속에 숨겨 영국으로 가져갔던 것이다. 수천 권의 성경 들이 영국에 들어와 판매되었다. 이후 틴데일이 죽을 때까지 약 6만 부 이상이 팔렸다고 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성직자들은 공개적으로 그의 번역 성경을 불태워 버렸다. 어느 주교는 유럽을 방문하던 길에 상인과 접촉해 남은 틴데일의 신 약성경을 모두 샀다. 주교는 그의 성경을 불태웠 지만 틴데일은 그 돈으로 다시 개정판을 펴냈다. 이후에는 더 이상 반입을 막을 수 없게 되었다. 틴데일은 1529년, 벨기에 앤트베르프로 이주하여 모세오경을 번역한 후에 계속 구약의 일부를 번역하였다.


1535년, 동료인 영국인 헨리 필립스가 틴데일 을 배반하였다. 앤트베르프의 좁은 길에서 잠복 하고 있던 병사들이 틴데일을 체포했다. 틴데일 은 브뤼셀(Brussels) 근교 빌보르드 성(Vilvorde Castle) 감옥에 갇혔다. 1년 6개월 동안 틴데일 은 음산하고 어두운 감옥에 갇혀 추위와 싸우면 서도 히브리 성경과 히브리 문법책, 히브리 사전 을 가지고 구약성경 연구를 계속하였다. 그의 태 도가 간수로 하여금, 그의 집안 식구들로 하여금 개종하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틴데일은 1536년 10월 6일, 왕명을 받은 당국자들에 의하여 줄로 꽁꽁 묶인 채 죽임을 당한 후 화형에 처해졌는데, 먼저 교살한 것은 그를 아낀 처사라고 한다. 산채로 화형을 당하는 것 보다 죽은 후 화형이 한결 덜 고통스럽기 때문이었다. 그가 죽을 당시 나 이는 겨우 42세였다. 폭스는 스승이 화형당하기 직전에 “주여! 영국 왕의 눈을 열어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폭스가 그를 가리켜 ‘하나님의 선한 순교자’라고 쓴 것은 그의 흔들림 없 는 태도를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2024. 10. 01


출처: 교회성장연구소(portal.icg21.com/board/board.php?bbs_id=humanities&ptype=view&kbbs_doc_num=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