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사렛에서 요단강 세례터 가는 길
윤국영 박사(기독인문학연구원 상임연구위원)
나사렛 산지
팔레스타인을 유일하게 동과 서로 평평하게 통과할 수 있는 광활한 이스 르엘(Jezreel) 평원. 이곳에서 남쪽으로는 사마리아 산지가 솟아 유다 산지 까지 이어지고 북으로는 갈릴리 산지가 펼쳐진다. 갈릴리 산지는 북동쪽 으로 납달리 산지로 이어져 멀리 레바논산맥 기슭까지 이른다. 지중해와 갈릴리 호수의 중간쯤 평원과 인접하여 갈릴리 산지의 일부로서 나사렛 산지가 있다. 나사렛 산지는 해발 400m 내외로 그 한가운데 고대 나사렛 마을을 포근하게 감싸고 있다. 오늘날, 이 산지 일대는 인구 8만 명 정도의 도시가 형성되어 있다.
고대 나사렛 마을을 감싼 산지의 남쪽을 올라가면 이스르엘 평원이 눈 앞에 펼쳐진다. 수많은 성경의 이야기가 신구약 시간대를 초월하여 생생 히 되살아나는 곳. 예수께서도 이따금 이곳에 올라 저 평원을 바라보셨을 까? 서쪽을 바라보면 멀리 갈멜산이 보인다. 엘리야가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이키려 했던 영적 전장이다. 그리고 그 너머 바다 건너 헬라와 로마 문명이 있다. 고개를 돌려 북동쪽을 바라보면 곧 복음 선포가 시작될 갈릴리 호수께 골란고원 지역이 멀리 눈에 들어온다. 나사렛 마을이 기대어 있는 나 사렛 산지 북쪽 경사면을 오르 면 갈릴리 산지 너머 멀리 헬몬 산이 웅장한 자태를 드러낸다. 서북쪽으로 약 6km 거리에는 티베리아(Tiberia)와 함께 예수 당시 갈릴리의 양대 도시였던 세포리스(Sepphoris)가 있다. 유대사가 요세푸스(Josephus) 에 의하면 세포리스는 헤롯대왕 에 반기를 들었다가 파괴되었다. 이후 그 아들 헤롯 안디바(Herod Antipas)가 주전 4년, 갈릴리 분봉왕 으로 즉위한 이래 대대적으로 세포리스의 재건 사업을 추진했다. 혹 목수 이셨던 예수께서도 공생애 전에 일감을 좇아 저곳 세포리스에서 일하시지 않았을지 모르겠다.
나사렛 마을, 예수의 고향
예수 시대 나사렛 마을의 범위는 마을을 둘러싼 당시 무덤들의 분포로 추정 가능한데, 발굴이 아직 부분적이긴 하지만 대략 길이 300m 정도 타 원형 형태의 작은 마을로 추정한다. 이 마을은 대부분의 갈릴리 마을과 마 찬가지로 하스모니안 왕조의 갈릴리 정복과 맞물려 생겨났을 것이다. 토기 형태나 돌로 된 용기, 정결례탕, 그리고 신약 성서에 등장하는 회당의 존재(마 13:54; 막 6:2; 눅 4:16) 등에서 나사렛이 유대인 마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수태고지 교회(Church of the Annunciation)는 마리아의 집터라는 전 승을 지닌 곳이다. 이곳을 중심으로 비잔틴 교회, 십자군 교회, 그리고 근 세와 현대 교회들이 무너지고 세워지기를 반복했다. 이미 초기 기독교 시 대부터 이곳은 예수의 자취를 좇았던 신자들의 순례처였다. 오늘날 교회 의 거대한 팔각형 쿠폴라(Cupola) 지붕 아래 수태고지 동굴(Grotto of the Annunciation)이 있다. 마리아가 예수의 탄생 소식을 천사로부터 전 해 들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수태고지 교회에서 약 150m 교회 뜰을 가로질러 경사면을 오르면 요셉 교회(St. Joseph’s Church)가 나온다. 목수 요셉의 이름을 따서 지어진 교 회인데 예수의 가족이 거주했다는 전승을 가진 곳이다. 이 교회 지하에도 거주 동굴이 있다. 동굴 안팎으로는 곡식 저장고, 선반, 물 저장소 등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보인다.
오늘날까지 전통적 아랍 시골 마을에서도 여전히 발견되는 바, 초기 로 마 시대에 갈릴리에서 평범한 한 가족이 사는 집의 기본 형태는 방 한두 개와 지붕이 없는 마당이 결합한 구조였다. 전통적인 한국 민간의 사립문 울타리와는 달리 마당은 꽤 높은 담장으로 둘러 있어서 행인은 그 내부를 볼 수 없었다. 마당에서는 요리, 식사, 각종 작업, 수면 등 가족 활동의 많 은 부분이 이루어졌는데, 비가 오거나 추운 날씨에는 지붕이 있는 실내 공 간을 이용했다. 집은 보통 단층이었는데 한 공간을 위아래로 구분하여 내 부 계단으로 연결하기도 했다. 아래 공간은 지상층이거나 반지하 동굴 형 태로 가축우리나 창고, 작업장 등으로 사용했고, 위 공간은 잠을 자거나 물건과 곡물을 보관하는 데 사용했다.
고대 나사렛 윗마을의 한 돌담집 마당에서 대패질하고 돌을 다듬는 한 청년을 상상해 본다. 집안 장남으로 가계를 꾸리고 적잖은 세금에 시달리 기도 했을 것이다. 또 마을 목수로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집을 설계해 주 고 여러 조언을 해주었을 것이다. 인근 산비탈 밭에서는 동생들과 밀, 무 화과, 올리브, 포도 등을 수확하기 위해 구슬땀을 흘렸으리라. 안식일이나 절기에는 회당을 찾고, 일 년에 한두 번은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가고, 때 론 인근 마을에 각종 모임이나 애경사에도 참석하여 함께 울고 함께 웃는 평범한 갈릴리 유대인의 일상. 그러나 평범함 속에 감추어진 인류의 구원 이 담긴 일상이다.
“예수께서 함께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그 어 머니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눅 2:51-52)
같은 건물에 누가 사는지 심지어는 옆집, 윗집이 누구인지도 모른 채 살 아가는 오늘날 한국 풍경과는 너무도 다르게, 고대 나사렛 마을은 하루의 일상을 마을 전체가 공유하며 살았을 것이다. 훗날 마을 사람들은 예수가 누구인지, 그 어릴 적이 어떠했는지, 그 가족이 누구인지, 너무도 잘 안다 고 확신하며 예수를 배척하게 된다(마 13:53-58; 막 6:1-6). 가장 잘 안다 고 확신하는 것이 종종 가장 큰 장애물이다.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 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 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내 아버 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 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마 11:25-27)
이스르엘 평원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직전, 예수께서는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기 위해 사해 북쪽 요단강을 향해 길을 떠나셨다. 겨울철 우기의 이른 아침, 가족을 먹여 살리시던 목수 일을 이제 내려놓고 아직은 한가한 농한기라 조금은 더 가벼운 마음으로 길을 나서셨을지 모르겠다. 매년 가셨던 같은 예루살렘 순례길이지만, 공생애의 서막을 고하는 이번 길은 평소와는 사 뭇 다른 느낌이셨으리라.
요단 동편으로부터 여명이 점차 밝아지면서 나사렛 남쪽 산지 사이를 걸 어 이스르엘(Jezreel) 평원으로 내려온다. 이 평원은 오늘날은 잘 정비된 곡창 지대지만 10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늪지대가 많아 말라리아가 창궐하 던 곳이었다. 예수께서는 훗날 갈릴리와 사마리아 사이에 있는 이 평원을 지나시다가 늪지 어딘가에 숨어 살았을 10명의 나병 환자 무리를 만나신 다(눅 17:11-19). 절망과 고통 가운데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구분 없이 뒤섞여 살아가던 나병 환자 무리. 주께서는 저들에게 가장 필요한바 주님 의 긍휼히 여기심을 베푸신다.
이스르엘 평원을 남북으로 가로질러 약 6km를 걸으면 평원 가운데 섬같이 솟아 있는 모레 언덕(Hill of Moreh)에 이른다. 모레 언덕 북쪽 기슭에는 오늘 날 나인(Nein)이라는 아랍 마을 이 있는데 예수께서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려 내시게 될 나인 성이다(눅 7:11-17). 바로 인근 수넴 마을(Shunem=Sulam)에 서도 엘리사 선지자 시절 비슷한 기적 사건이 발생했었다(왕하 4:8-37).
모레 언덕 너머로는 구약 시대 전쟁의 드라마가 펼쳐진다. 언덕 기슭에 는 미디안 사람들, 그리고 평원 남쪽 너머 길보아 산에서 진치고 있던 기 드온과 용사들(삿 7:1). 그 150여 년 후에는 블레셋과 이스라엘이 같은 자리에서 서로 대치한다(삼상 28:4). 기드온은 이겼지만, 사울은 비극적 최 후를 맞았다. 요시아왕도 이 일대 므깃도 산지에서 애굽과 싸우다가 비극 적 죽음을 맞는다(왕하 23:29-30; 대하 35:20-24). 그 외 성경이 기록되 지 않은 많은 전쟁의 역사를 지닌 이스르엘 평원은 요한계시록 16장 16 절 아마겟돈(=므깃도 산지) 전쟁의 배경이다. 오늘날에도 세계인의 영적 고향 팔레스타인 땅에서 평화는 요원해 보인다. 더 잘 ‘소통’하여 하나가 될 것만 같은 지구촌에서 실상 나라나 민족 간 대립은 더 공교해지는 것 같다.
무성한 갈대와 농경지 사이 길을 계속 걸으면 평원 남단에 높이 솟은 길보아 산이 보이고 그 너머 사마리아 산지가 시작된다. 그 산지 가운데 로는 예루살렘으로 가는 족장 길이 나 있다. 그러나 산세도 험할뿐더러 유대인과는 앙숙인 사마리아 사람이 차지하고 있어서 지나기가 상당히 꺼려지는 길이다. 예수께서는 여느 때처럼 길보아 산기슭을 따라 이스르 엘 평원 남동쪽 벳샨을 통과하는 길을 택하신 듯하다. 나사렛에서 아침 일찍 출발하여 부지런히 하루를 걸으면 저녁에는 벧산쯤에서 유숙하실 수 있을 것이다.
벧산/스키토폴리스
이스르엘 평원에서 동쪽으로 계속 걸으면 어느덧 푸른 요단 계곡이 보이 고 그 너머 웅장하게 솟은 길르앗 산지를 마주 대한다. 이즈음에서 시리아 총독의 관할인 데가볼리(Decapolis) 지역이 시작된다. 데가볼리는 갈릴 리 호수 동쪽과 남동쪽 일대를 중심으로 10개의 헬라식 도시가 모여있는 지역이다. 유대인을 포함한 여러 인종이 거주하지만, 기본적으로 헬라와 로마적 생활 방식이 주도하는 이방 지역이다. 헤롯 안디바의 관할지인 갈릴리와 베레아를 오가려면 그 사이에 있는 이 지역을 통과해야 한다.
등 뒤로 해가 저물 무렵, 노상 이정표(Milestone)는 어느덧 수천 년 교통 의 요충지인 벧산에 가까이 왔음을 알려 준다. 예수 시대에 벧산은 스키토 폴리스(Scythopolis)라 불렸다. 이 도시는 데가볼리 10개 도시 중 유일하 게 요단강 서편에 자리 잡고 있으며, 로마의 팔레스타인 총독부(가이사랴) 와 시리아 총독부(다메섹)를 연결하는 핵심 위치에 있다. 또한 남쪽으로 유대의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의 네아폴리스, 그리고 동쪽으로 데가볼리 여 러 도시와 사통팔달로 연결되어 있다. 이런 이유로 스키토폴리스는 데가 볼리 도시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중심적 역할을 담당한다.
오늘날 스키토폴리스는 수십 년간의 집중적인 발굴을 통해 구약과 신약시대에 걸쳐 도시의 많은 부분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여러 방향에서 성문 을 통해 들어오는 사람들은 일렬로 늘어선 기둥의 거리를 지나 도시 중심 부 북쪽에 위치한 광장에 다다른다. 광장 북편으로 한때 가나안을 통치했 던 이집트 총독 본부의 언덕(Tel Beth-Shean) 위에는 이제 로마 신전이 세워져 위용을 뽐낸다. 광장에서 남쪽으로 쭉 뻗은 카르도 주변으로는 다 양한 물품을 판매하는 상점들이 늘어서 있고 상점가 동편으로는 아고라 (포럼)가 있어 도시의 각종 행정과 철학, 종교활동이 이루어진다.
아고라에서 발견되는 신전 중 하나는 대지의 풍요를 관장하는 데메테르 (Demeter) 여신과 그 딸 코레(Kore)에게 바쳐졌는데, 비옥한 계곡 주변 일대와 잘 조화를 이룬 선택인 듯 보인다. 아고라 남쪽의 화산암으로 지어 진 거대한 원형 극장을 비롯하여 로마적 문화와 쾌락의 흔적은 도시 곳곳 에서 발견된다. 포도주와 축제의 신 디오니소스(Dionysos)가 이 도시의 수호신이라는 점은 이 도시의 성격을 보여주는 듯하다. 거대한 공중목욕 탕과 발달된 공중화장실을 통해 예수 시대 스키토폴리스 주민들이 향유했 던 문화와 기술의 수준을 잘 엿볼 수 있다.
예수께서는 이날 저녁 어디에서 묵으셨을까? 또 권력, 명예, 부요함을 모두 가진 듯한 이 도시를 지나시며 무엇을 생각하셨을까? 흡사 천로역정 의 한 장면, 허영의 시장을 지나는 듯한 느낌이셨을까? 저 갈릴리 유대 마 을은 율법의 열심으로 자신의 의로움을 인정받고자, 또 강력한 메시아의 출현으로 로마의 압제를 보상받고자 한다. 반면 이 화려한 이방 도시는 이 미 하나님 없이도 모든 것이 잘 돌아가는 것 같다. 그러나 나사렛 청년은 남쪽 성문을 향하여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시기 위한 순종의 발걸음을 묵묵히 계속하셨을 것이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 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 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고전 1:22-24)
베레아 지역
스키토폴리스에서 베다니 세례터까지는 2~3일 거리다. 스키토폴리스를 지나 남쪽으로 10여 km 남짓 걸으면 텔 샬렘(Tel Shalem)이 나오는데 이 인근에 여러 샘이 있어 세례 요한의 또 다른 세례지인 애논(Aenon)의 추 정지로 여겨진다. 주후 4세기 유세비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애논은 스키토 폴리스 남쪽으로 약 12km 떨어져 있다. 애논은 ‘샘(Ein)’을 뜻하는 히브 리어가 헬라식으로 표현된 것이다.
“요한도 살렘 가까운 애논에서 세례를 베푸니 거기 물이 많음이라 그러 므로 사람들이 와서 세례를 받더라” (요 3:23)
애논을 지나 남쪽으로 직진하면 사마리아 지역이고 남동쪽으로 요단강 을 건너면 베레아(Perea) 지역이다. 베레아는 유대사가 요세푸스의 기록 에 주로 언급되는데, 신약성경에서는 베레아를 ‘요단강 건너편’이라고 표 현한다(마 4:25, 19:1; 막 3:8, 10:1; 요 1:28). 베레아 지역의 범위는 위로 데가볼리 도시의 하나인 펠라(Pella) 남쪽에서 시작하여 아래로 사해 중북 부에 이르며, 서쪽으로 요단강에서 동쪽으로 길르앗 산지 경사면에 걸쳐 있다.
베레아 지역에는 원래 구약 시대에는 므낫세 반지파, 갓 지파, 르우벤 지 파가 거주했던 북이스라엘 왕국의 영역이었다. 그러나 북이스라엘 왕국의 멸망 이후 남유다왕국 주민들이 이 지역에 이주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 한다. 이들 이주민은 포로기와 포로기 이후 시대에도 지속적으로 유다계 로서 정체성을 유지하였고 주전 1~2세기 하스모니안 왕조가 주변 지역을 정복해 나가는 과정에서 베레아 지역의 유대화는 더욱 가속화되었을 것이 다. 그래서 예수 시대가 되면 베레아에 많은 유대인이 거주하게 된다. 예 수께서도 공생애 사역 중 일부분을 이 지역에서 행하셨다.
요단 계곡은 기후적으로는 사바나 기후에 속해 건조하고 척박한 편이지 만 강이나 샘이 있어 예로부터 비옥한 농경지로 이용되어 왔다. 요단 계곡 의 동쪽 부분을 이루는 베레아 지역의 비옥한 농경지대는 오늘날까지도 요르단 왕국을 먹여 살리는 곡창 역할을 한다. 이 넓은 농경지 어딘가에 예수께 영생의 길을 묻고자 찾아온 부자 청년의 땅도 있지 않았을까?(마 19:16-26; 막 10:17-31; 눅 18:18-30).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 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마 19:21-22)
자기 죽음 이후도 보장받으며 이 세상에서 자신을 지켜줄 재물도 놓지 않으려는 부자 청년.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이 청년과 같지 않을 거 라고 장담할 자가 얼마나 되겠는가? 이런 점에서 제자들은 일면 훌륭하다. 저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랐던 자들이 아닌가(마 19:27; 막 10:28)? 그러나 헌신의 대가로 얻고자 하는 바가 이 세상 왕국의 영광이 라는 저들의 속내는 이내 자명해진다(마 20:20-28; 막 10:35-45). 경쟁 이 발전의 유일한 원동력이라 여기는 듯 자신의 영광을 위해 끊임없이 비 교에 시달리는 사회. 세상 영광이 없어도 주님을 위해 기꺼이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는가?
예수께서 걸으셨던 고대길은 요단 계곡 평지의 동쪽 가장자리를 타고 베다니 세례터까지 거의 정남향으로 이어진다. 이 루트를 따라 하루나 이틀 을 더 유숙하며 길을 가면 창세로부터 하나님의 비밀이 사람 앞에 드러나기 시작할 것이다.
2024. 11. 01.
출처: 교회성장연구소(portal.icg21.com/board/board.php?bbs_id=humanities&ptype=view&kbbs_doc_num=105)
나사렛에서 요단강 세례터 가는 길
윤국영 박사(기독인문학연구원 상임연구위원)
나사렛 산지
팔레스타인을 유일하게 동과 서로 평평하게 통과할 수 있는 광활한 이스 르엘(Jezreel) 평원. 이곳에서 남쪽으로는 사마리아 산지가 솟아 유다 산지 까지 이어지고 북으로는 갈릴리 산지가 펼쳐진다. 갈릴리 산지는 북동쪽 으로 납달리 산지로 이어져 멀리 레바논산맥 기슭까지 이른다. 지중해와 갈릴리 호수의 중간쯤 평원과 인접하여 갈릴리 산지의 일부로서 나사렛 산지가 있다. 나사렛 산지는 해발 400m 내외로 그 한가운데 고대 나사렛 마을을 포근하게 감싸고 있다. 오늘날, 이 산지 일대는 인구 8만 명 정도의 도시가 형성되어 있다.
고대 나사렛 마을을 감싼 산지의 남쪽을 올라가면 이스르엘 평원이 눈 앞에 펼쳐진다. 수많은 성경의 이야기가 신구약 시간대를 초월하여 생생 히 되살아나는 곳. 예수께서도 이따금 이곳에 올라 저 평원을 바라보셨을 까? 서쪽을 바라보면 멀리 갈멜산이 보인다. 엘리야가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이키려 했던 영적 전장이다. 그리고 그 너머 바다 건너 헬라와 로마 문명이 있다. 고개를 돌려 북동쪽을 바라보면 곧 복음 선포가 시작될 갈릴리 호수께 골란고원 지역이 멀리 눈에 들어온다. 나사렛 마을이 기대어 있는 나 사렛 산지 북쪽 경사면을 오르 면 갈릴리 산지 너머 멀리 헬몬 산이 웅장한 자태를 드러낸다. 서북쪽으로 약 6km 거리에는 티베리아(Tiberia)와 함께 예수 당시 갈릴리의 양대 도시였던 세포리스(Sepphoris)가 있다. 유대사가 요세푸스(Josephus) 에 의하면 세포리스는 헤롯대왕 에 반기를 들었다가 파괴되었다. 이후 그 아들 헤롯 안디바(Herod Antipas)가 주전 4년, 갈릴리 분봉왕 으로 즉위한 이래 대대적으로 세포리스의 재건 사업을 추진했다. 혹 목수 이셨던 예수께서도 공생애 전에 일감을 좇아 저곳 세포리스에서 일하시지 않았을지 모르겠다.
나사렛 마을, 예수의 고향
예수 시대 나사렛 마을의 범위는 마을을 둘러싼 당시 무덤들의 분포로 추정 가능한데, 발굴이 아직 부분적이긴 하지만 대략 길이 300m 정도 타 원형 형태의 작은 마을로 추정한다. 이 마을은 대부분의 갈릴리 마을과 마 찬가지로 하스모니안 왕조의 갈릴리 정복과 맞물려 생겨났을 것이다. 토기 형태나 돌로 된 용기, 정결례탕, 그리고 신약 성서에 등장하는 회당의 존재(마 13:54; 막 6:2; 눅 4:16) 등에서 나사렛이 유대인 마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수태고지 교회(Church of the Annunciation)는 마리아의 집터라는 전 승을 지닌 곳이다. 이곳을 중심으로 비잔틴 교회, 십자군 교회, 그리고 근 세와 현대 교회들이 무너지고 세워지기를 반복했다. 이미 초기 기독교 시 대부터 이곳은 예수의 자취를 좇았던 신자들의 순례처였다. 오늘날 교회 의 거대한 팔각형 쿠폴라(Cupola) 지붕 아래 수태고지 동굴(Grotto of the Annunciation)이 있다. 마리아가 예수의 탄생 소식을 천사로부터 전 해 들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수태고지 교회에서 약 150m 교회 뜰을 가로질러 경사면을 오르면 요셉 교회(St. Joseph’s Church)가 나온다. 목수 요셉의 이름을 따서 지어진 교 회인데 예수의 가족이 거주했다는 전승을 가진 곳이다. 이 교회 지하에도 거주 동굴이 있다. 동굴 안팎으로는 곡식 저장고, 선반, 물 저장소 등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보인다.
오늘날까지 전통적 아랍 시골 마을에서도 여전히 발견되는 바, 초기 로 마 시대에 갈릴리에서 평범한 한 가족이 사는 집의 기본 형태는 방 한두 개와 지붕이 없는 마당이 결합한 구조였다. 전통적인 한국 민간의 사립문 울타리와는 달리 마당은 꽤 높은 담장으로 둘러 있어서 행인은 그 내부를 볼 수 없었다. 마당에서는 요리, 식사, 각종 작업, 수면 등 가족 활동의 많 은 부분이 이루어졌는데, 비가 오거나 추운 날씨에는 지붕이 있는 실내 공 간을 이용했다. 집은 보통 단층이었는데 한 공간을 위아래로 구분하여 내 부 계단으로 연결하기도 했다. 아래 공간은 지상층이거나 반지하 동굴 형 태로 가축우리나 창고, 작업장 등으로 사용했고, 위 공간은 잠을 자거나 물건과 곡물을 보관하는 데 사용했다.
고대 나사렛 윗마을의 한 돌담집 마당에서 대패질하고 돌을 다듬는 한 청년을 상상해 본다. 집안 장남으로 가계를 꾸리고 적잖은 세금에 시달리 기도 했을 것이다. 또 마을 목수로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집을 설계해 주 고 여러 조언을 해주었을 것이다. 인근 산비탈 밭에서는 동생들과 밀, 무 화과, 올리브, 포도 등을 수확하기 위해 구슬땀을 흘렸으리라. 안식일이나 절기에는 회당을 찾고, 일 년에 한두 번은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가고, 때 론 인근 마을에 각종 모임이나 애경사에도 참석하여 함께 울고 함께 웃는 평범한 갈릴리 유대인의 일상. 그러나 평범함 속에 감추어진 인류의 구원 이 담긴 일상이다.
“예수께서 함께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그 어 머니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눅 2:51-52)
같은 건물에 누가 사는지 심지어는 옆집, 윗집이 누구인지도 모른 채 살 아가는 오늘날 한국 풍경과는 너무도 다르게, 고대 나사렛 마을은 하루의 일상을 마을 전체가 공유하며 살았을 것이다. 훗날 마을 사람들은 예수가 누구인지, 그 어릴 적이 어떠했는지, 그 가족이 누구인지, 너무도 잘 안다 고 확신하며 예수를 배척하게 된다(마 13:53-58; 막 6:1-6). 가장 잘 안다 고 확신하는 것이 종종 가장 큰 장애물이다.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 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 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내 아버 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 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마 11:25-27)
이스르엘 평원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직전, 예수께서는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기 위해 사해 북쪽 요단강을 향해 길을 떠나셨다. 겨울철 우기의 이른 아침, 가족을 먹여 살리시던 목수 일을 이제 내려놓고 아직은 한가한 농한기라 조금은 더 가벼운 마음으로 길을 나서셨을지 모르겠다. 매년 가셨던 같은 예루살렘 순례길이지만, 공생애의 서막을 고하는 이번 길은 평소와는 사 뭇 다른 느낌이셨으리라.
요단 동편으로부터 여명이 점차 밝아지면서 나사렛 남쪽 산지 사이를 걸 어 이스르엘(Jezreel) 평원으로 내려온다. 이 평원은 오늘날은 잘 정비된 곡창 지대지만 10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늪지대가 많아 말라리아가 창궐하 던 곳이었다. 예수께서는 훗날 갈릴리와 사마리아 사이에 있는 이 평원을 지나시다가 늪지 어딘가에 숨어 살았을 10명의 나병 환자 무리를 만나신 다(눅 17:11-19). 절망과 고통 가운데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구분 없이 뒤섞여 살아가던 나병 환자 무리. 주께서는 저들에게 가장 필요한바 주님 의 긍휼히 여기심을 베푸신다.
이스르엘 평원을 남북으로 가로질러 약 6km를 걸으면 평원 가운데 섬같이 솟아 있는 모레 언덕(Hill of Moreh)에 이른다. 모레 언덕 북쪽 기슭에는 오늘 날 나인(Nein)이라는 아랍 마을 이 있는데 예수께서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려 내시게 될 나인 성이다(눅 7:11-17). 바로 인근 수넴 마을(Shunem=Sulam)에 서도 엘리사 선지자 시절 비슷한 기적 사건이 발생했었다(왕하 4:8-37).
모레 언덕 너머로는 구약 시대 전쟁의 드라마가 펼쳐진다. 언덕 기슭에 는 미디안 사람들, 그리고 평원 남쪽 너머 길보아 산에서 진치고 있던 기 드온과 용사들(삿 7:1). 그 150여 년 후에는 블레셋과 이스라엘이 같은 자리에서 서로 대치한다(삼상 28:4). 기드온은 이겼지만, 사울은 비극적 최 후를 맞았다. 요시아왕도 이 일대 므깃도 산지에서 애굽과 싸우다가 비극 적 죽음을 맞는다(왕하 23:29-30; 대하 35:20-24). 그 외 성경이 기록되 지 않은 많은 전쟁의 역사를 지닌 이스르엘 평원은 요한계시록 16장 16 절 아마겟돈(=므깃도 산지) 전쟁의 배경이다. 오늘날에도 세계인의 영적 고향 팔레스타인 땅에서 평화는 요원해 보인다. 더 잘 ‘소통’하여 하나가 될 것만 같은 지구촌에서 실상 나라나 민족 간 대립은 더 공교해지는 것 같다.
무성한 갈대와 농경지 사이 길을 계속 걸으면 평원 남단에 높이 솟은 길보아 산이 보이고 그 너머 사마리아 산지가 시작된다. 그 산지 가운데 로는 예루살렘으로 가는 족장 길이 나 있다. 그러나 산세도 험할뿐더러 유대인과는 앙숙인 사마리아 사람이 차지하고 있어서 지나기가 상당히 꺼려지는 길이다. 예수께서는 여느 때처럼 길보아 산기슭을 따라 이스르 엘 평원 남동쪽 벳샨을 통과하는 길을 택하신 듯하다. 나사렛에서 아침 일찍 출발하여 부지런히 하루를 걸으면 저녁에는 벧산쯤에서 유숙하실 수 있을 것이다.
벧산/스키토폴리스
이스르엘 평원에서 동쪽으로 계속 걸으면 어느덧 푸른 요단 계곡이 보이 고 그 너머 웅장하게 솟은 길르앗 산지를 마주 대한다. 이즈음에서 시리아 총독의 관할인 데가볼리(Decapolis) 지역이 시작된다. 데가볼리는 갈릴 리 호수 동쪽과 남동쪽 일대를 중심으로 10개의 헬라식 도시가 모여있는 지역이다. 유대인을 포함한 여러 인종이 거주하지만, 기본적으로 헬라와 로마적 생활 방식이 주도하는 이방 지역이다. 헤롯 안디바의 관할지인 갈릴리와 베레아를 오가려면 그 사이에 있는 이 지역을 통과해야 한다.
등 뒤로 해가 저물 무렵, 노상 이정표(Milestone)는 어느덧 수천 년 교통 의 요충지인 벧산에 가까이 왔음을 알려 준다. 예수 시대에 벧산은 스키토 폴리스(Scythopolis)라 불렸다. 이 도시는 데가볼리 10개 도시 중 유일하 게 요단강 서편에 자리 잡고 있으며, 로마의 팔레스타인 총독부(가이사랴) 와 시리아 총독부(다메섹)를 연결하는 핵심 위치에 있다. 또한 남쪽으로 유대의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의 네아폴리스, 그리고 동쪽으로 데가볼리 여 러 도시와 사통팔달로 연결되어 있다. 이런 이유로 스키토폴리스는 데가 볼리 도시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중심적 역할을 담당한다.
오늘날 스키토폴리스는 수십 년간의 집중적인 발굴을 통해 구약과 신약시대에 걸쳐 도시의 많은 부분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여러 방향에서 성문 을 통해 들어오는 사람들은 일렬로 늘어선 기둥의 거리를 지나 도시 중심 부 북쪽에 위치한 광장에 다다른다. 광장 북편으로 한때 가나안을 통치했 던 이집트 총독 본부의 언덕(Tel Beth-Shean) 위에는 이제 로마 신전이 세워져 위용을 뽐낸다. 광장에서 남쪽으로 쭉 뻗은 카르도 주변으로는 다 양한 물품을 판매하는 상점들이 늘어서 있고 상점가 동편으로는 아고라 (포럼)가 있어 도시의 각종 행정과 철학, 종교활동이 이루어진다.
아고라에서 발견되는 신전 중 하나는 대지의 풍요를 관장하는 데메테르 (Demeter) 여신과 그 딸 코레(Kore)에게 바쳐졌는데, 비옥한 계곡 주변 일대와 잘 조화를 이룬 선택인 듯 보인다. 아고라 남쪽의 화산암으로 지어 진 거대한 원형 극장을 비롯하여 로마적 문화와 쾌락의 흔적은 도시 곳곳 에서 발견된다. 포도주와 축제의 신 디오니소스(Dionysos)가 이 도시의 수호신이라는 점은 이 도시의 성격을 보여주는 듯하다. 거대한 공중목욕 탕과 발달된 공중화장실을 통해 예수 시대 스키토폴리스 주민들이 향유했 던 문화와 기술의 수준을 잘 엿볼 수 있다.
예수께서는 이날 저녁 어디에서 묵으셨을까? 또 권력, 명예, 부요함을 모두 가진 듯한 이 도시를 지나시며 무엇을 생각하셨을까? 흡사 천로역정 의 한 장면, 허영의 시장을 지나는 듯한 느낌이셨을까? 저 갈릴리 유대 마 을은 율법의 열심으로 자신의 의로움을 인정받고자, 또 강력한 메시아의 출현으로 로마의 압제를 보상받고자 한다. 반면 이 화려한 이방 도시는 이 미 하나님 없이도 모든 것이 잘 돌아가는 것 같다. 그러나 나사렛 청년은 남쪽 성문을 향하여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시기 위한 순종의 발걸음을 묵묵히 계속하셨을 것이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 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 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고전 1:22-24)
베레아 지역
스키토폴리스에서 베다니 세례터까지는 2~3일 거리다. 스키토폴리스를 지나 남쪽으로 10여 km 남짓 걸으면 텔 샬렘(Tel Shalem)이 나오는데 이 인근에 여러 샘이 있어 세례 요한의 또 다른 세례지인 애논(Aenon)의 추 정지로 여겨진다. 주후 4세기 유세비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애논은 스키토 폴리스 남쪽으로 약 12km 떨어져 있다. 애논은 ‘샘(Ein)’을 뜻하는 히브 리어가 헬라식으로 표현된 것이다.
“요한도 살렘 가까운 애논에서 세례를 베푸니 거기 물이 많음이라 그러 므로 사람들이 와서 세례를 받더라” (요 3:23)
애논을 지나 남쪽으로 직진하면 사마리아 지역이고 남동쪽으로 요단강 을 건너면 베레아(Perea) 지역이다. 베레아는 유대사가 요세푸스의 기록 에 주로 언급되는데, 신약성경에서는 베레아를 ‘요단강 건너편’이라고 표 현한다(마 4:25, 19:1; 막 3:8, 10:1; 요 1:28). 베레아 지역의 범위는 위로 데가볼리 도시의 하나인 펠라(Pella) 남쪽에서 시작하여 아래로 사해 중북 부에 이르며, 서쪽으로 요단강에서 동쪽으로 길르앗 산지 경사면에 걸쳐 있다.
베레아 지역에는 원래 구약 시대에는 므낫세 반지파, 갓 지파, 르우벤 지 파가 거주했던 북이스라엘 왕국의 영역이었다. 그러나 북이스라엘 왕국의 멸망 이후 남유다왕국 주민들이 이 지역에 이주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 한다. 이들 이주민은 포로기와 포로기 이후 시대에도 지속적으로 유다계 로서 정체성을 유지하였고 주전 1~2세기 하스모니안 왕조가 주변 지역을 정복해 나가는 과정에서 베레아 지역의 유대화는 더욱 가속화되었을 것이 다. 그래서 예수 시대가 되면 베레아에 많은 유대인이 거주하게 된다. 예 수께서도 공생애 사역 중 일부분을 이 지역에서 행하셨다.
요단 계곡은 기후적으로는 사바나 기후에 속해 건조하고 척박한 편이지 만 강이나 샘이 있어 예로부터 비옥한 농경지로 이용되어 왔다. 요단 계곡 의 동쪽 부분을 이루는 베레아 지역의 비옥한 농경지대는 오늘날까지도 요르단 왕국을 먹여 살리는 곡창 역할을 한다. 이 넓은 농경지 어딘가에 예수께 영생의 길을 묻고자 찾아온 부자 청년의 땅도 있지 않았을까?(마 19:16-26; 막 10:17-31; 눅 18:18-30).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 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마 19:21-22)
자기 죽음 이후도 보장받으며 이 세상에서 자신을 지켜줄 재물도 놓지 않으려는 부자 청년.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이 청년과 같지 않을 거 라고 장담할 자가 얼마나 되겠는가? 이런 점에서 제자들은 일면 훌륭하다. 저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랐던 자들이 아닌가(마 19:27; 막 10:28)? 그러나 헌신의 대가로 얻고자 하는 바가 이 세상 왕국의 영광이 라는 저들의 속내는 이내 자명해진다(마 20:20-28; 막 10:35-45). 경쟁 이 발전의 유일한 원동력이라 여기는 듯 자신의 영광을 위해 끊임없이 비 교에 시달리는 사회. 세상 영광이 없어도 주님을 위해 기꺼이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는가?
예수께서 걸으셨던 고대길은 요단 계곡 평지의 동쪽 가장자리를 타고 베다니 세례터까지 거의 정남향으로 이어진다. 이 루트를 따라 하루나 이틀 을 더 유숙하며 길을 가면 창세로부터 하나님의 비밀이 사람 앞에 드러나기 시작할 것이다.
2024. 11. 01.
출처: 교회성장연구소(portal.icg21.com/board/board.php?bbs_id=humanities&ptype=view&kbbs_doc_num=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