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글은 칼럼이 아니라 필자의 학부 졸업 논문임을 이며,
'한국역사학과'라는 명칭으로 되어 있지만 (한국사학과 또는 舊 국사학과)라는 명칭으로도 통용될 수 있음을 밝힌다.
2019학년도 졸업논문
<조선총독부의 신사참배 정책과 강요>
학과: 한국역사학과
학번: 20150268
지도교수: 장석흥 (문학박사 국민대학교 前 독립기념관 소장)
이름: 이충환
조선총독부의 신사참배 정책과 강요
<목차>
Ⅰ. 서론
Ⅱ. 일본 신사의 성격과 특징
Ⅲ. 신사참배 강요의 전개
Ⅳ. 신사참배 강요
Ⅴ. 결론
Ⅰ. 서론
일제는 1910년 8월 29일 한일병합으로 조선총독부를 중심으로 조선을 식민통치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29년의 경제공항으로 이를 타계하기 휘해 전쟁을 빌미로 다른 국가들을 침략하기 사직했는데 특히 1930년대부터 조선인들을 전쟁 수단으로 삼고 일본인과 차등적으로 구별하면서도 일본인화 하기 위한 동화정책을 신사참배 정책을 중심으로 강요하기 시작했다. 여태까지 신사참배에 대해 다룬 자료들은 적지는 않지만, 크게 보면 세 가지의 부분으로 분류해서 볼 수 있다. 첫째는 일본의 신도가 형성되어지는 과정을 중점으로 그것이 일제와 일제 통치하에 있던 식민지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에 관한 연구, 두 번째는 일제가 취한 종교정책이 조선총독부가 중심이 돼서 만든 여러 규칙들과 어떤 관계를 형성했고 그것이 조선에 끼친 영향에 대한 연구, 그리고 세 번째는 신사참배 거부운동에 초점을 맞춘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첫째와 둘째 같은 경우에는 신사참배 정책에 대해 보다 더 심층적으로 접근해서 보다 광범위한 차원에서 조선총독부의 식민정책을 바라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연구의 초점이 일본을 중심으로 하다 보니 일제의 식민정책과 연결해서 바라보는 관점이 이해하기 쉽게 정리되어 있지 않고 복잡하다는 단점이 있었다. 세 번째의 경우에는 신사참배 정책에 거부하는 형태와 이유에 대해 보다 상세하게 설명이 되어있다는 장점이 있는 반면에 너무 지엽적으로 설명이 되어 있고, 개인적인 관점에서 다루었다는 단점이 있다. 본 논문에서는 먼저 일본의 신사의 성격과 특징에 대해 언급하고 이러한 신사가 일제의 신사참배 정책과 어떤 연결고리를 가지는지에 대해서 중점적으로 다루고자 한다. 그리고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가 어떤 환경에서 이루어졌는지를 신사와 신사참배 정책의 관계를 중심으로 알아볼 것이다.
Ⅱ. 일본 신사의 성격과 특징
일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신사에 대해 알아야 한다. 신사는 신도의 신들을 제사지내기 위해 세운 건물을 말하는 것으로, 신사를 이루는 구조는 크게 보면 신이 모셔져 있는 장소인 본전과 신을 예배하고 각종 의례를 행하는 배전(拜殿), 그리고 이를 둘러싸고 있는 서원(瑞垣)으로 볼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신보를 두는 보전(寶殿)과 참배자가 심신을 정결히 하기 위한 수수사(手水舍) 등이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신사의 존재 목적이라 볼 수 있는 신도의 신앙은 고대 일본의 신에 대한 신앙과 이를 제사하는 것에서 출발했다고 볼 수 있다. 이 신앙은 다신교적인 민간신앙적 형태로 이해할 수 있는데, 사실 ‘다신적인 민간신앙’이라는 부분만 본다면 일본에만 존재해왔던 신앙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이해를 돕기 위해 한국을 예로 들자면, 예부터 집 곳곳에 신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믿는 애니미즘 중심의 민간신앙으로 볼 수 있다. 애니미즘이란, 모든 생물, 사물, 현상에 존재하는 영혼을 영적존재로 인식하고 이 존재에 대한 신앙을 말하는데, 이는 선사시대부터 행해져온 고대 종교로 볼 수 있다. 일본인들은 자연에도 생명이 있다고 여기며, 사람이 죽고 나서 일정기간이 지나면, 신이 되어서 가족을 지켜준다고 믿었다. 즉. 단순하게 자연물을 신적인 것으로 숭배하는 애니미즘적인 요소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더욱 확장시켜서 사람이 죽고 나면 신이 되어 자신의 가정과 자신을 지켜주는 수호신이 된다고 믿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마치 이집트인들이 죽은 사람을 미라로 만드는 이유와도 연결지어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이집트인들은 사후에 다시 부활하여 저승세계에서 다시 산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신사가 어떤 역할을 해 왔는지에 대해서 설명하겠다. 에도 시대에 신사가 건립되었는데 이 때는 주로 지역사회를 위해 공을 세운 농민이나 무사가 신사에 이름을 올릴 수 있는 자격이 있었다. 그 후 메이지 천황시기로 오면서 근대국가로 정비가 되어가는 과정에서 전쟁 희생자들을 신으로 삼고 국가차원에서 관리하게 되는 형태가 나타났는데 이 때 생긴 신사가 바로 도쿄초혼사이다. 도교초혼사는 현재의 야스쿠니 신사의 옛 명칭으로 무신전쟁 당시 천황을 위해 싸우다가 죽은 이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메이지 천황이 중심이 되어 건립했다. ‘신도’에서는 ‘천황’이라는 신성시되는 존재가 중요하게 여겨진다. 천황은 국가의 정치적 권한이나. 정책에 거의 관여를 하지 않지만, 일본의 기념일이나 국가적으로 중요한 행사에는 빠질 수 없는 존재이다. 본문에서 다룰 신사참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바로 이 천황이라는 존재와 신도라는 종교가 중요한 키워드라고 할 수 있다. 한민족 독립운동사에 따르면, 1868년 명치유신으로 왕정복고(王政復古)를 이룬 일본은 존왕사상(尊王思想)을 바탕으로 인접국가에 대한 침략론이 더욱 고조되었고, 이 당시 대표적인 조선침략론이었던 ‘정한론(征韓論)’이 국가정책 차원의 문제로 등장하면서 ‘아시아 연대론(連帶論)’과 ‘탈아론(脫亞論)’을 중심으로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을 정당화하는 주장들이 대두되었다고 한다. 일제는 자국이 문명국이라는 것을 각인시키기 위해 이데올로기를 이용한 수단을 찾게 되었고, 그것이 바로 국가 중심의 종교인 신도이다. 그들은 신도를 통해 민중을 교화하고 종교와 교육으로 국가가 국민을 통제, 이용하려는 목적의 수단으로 사용하였다. 이는 마치 한국사에서 전근대시기 특히 삼국시대에 지배자인 왕이 백성을 교화시키고 전쟁으로부터 민심을 안심시키기 위해 불교를 국교로 장려한 것과 비슷한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신불분리정책(神佛分離政策)’ 이라고 불리는 이 정책은 전통적으로 일본에서 불교와 전통신앙인 신도가 혼합되어 나타나는 현상이 예로부터 존재했으나, 이를 억제하고 신도를 장려하고 불교를 억압하기 위한 목적이 들어간 정책이었다. 필자는 이 부분 또한 우리 역사의 일면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는데, 고려 말, 이성계와 성리학을 신봉하는 그의 무리들이 역성혁명으로 고려를 폐하고, 조선을 건국할 때, 삼봉 정도전은 ‘불씨잡변’을 저술하여 불교의 폐단을 지적하고 성리학을 조선의 통치규범이자 백성을 교화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장려한 역사적 사실을 생각했을 때, 이와 비슷한 사례로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종교는 전근대시기에서 국가를 통치하는 자의 의도에 맞게 국가를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한 방편으로 이용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일제 또한 마찬가지였다. ‘일본은 태양신의 후손인 천황이 통치하는 나라이며, 따라서 일본은 신국이다.’ 이러한 이데올로기를 기본 전제로 삼고 일본은 자신들이 서양에게 문호개방을 연 방식 그대로 조선에게 적용시키기 시작했고, 점진적으로 조선의 경제와 정치적 간섭을 넓혀가기 시작하면서 제국주의 국가로의 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Ⅲ. 신사참배 강요의 전개
1. 조선총독부의 시기별 통치방식
일제강점기는 우리 역사에서 가장 암울했던 암흑기에 해당이 되는 시기이다. 다만 일제강점기를 언제부터로 봐야할 것인지에 대해서 조동걸은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하여 첫 번째는 1904년 한일의정서가 체결되는 시기부터 식민지로 봐야 된다는 주장, 두 번째는 1905년에 강제로 체결된 ‘을사늑약’으로 통감부가 설치된 후부터를 식민지로 봐야 한다는 주장, 마지막 세 번째는 1910년 한일병합으로 인해 대한제국의 이름이 사라지고 조선총독부가 설치된 때부터를 식민지로 봐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즉, 1900년대 초는 통감부가 먼저 세워지고, 통감이 한국의 정치에 영향을 주기 시작하였고, 서서히 한국을 식민지로 만들어가는데 일조하였다고 보면 된다. 그러다가 1대 총독 데라우치 마사다케가 출현하는 1910년의 헌병경찰제가 시행되던 시기는 학교 교원들이 칼을 차고 수업을 하던 시대였다. 1920년에는 1919년 3.1 운동의 영향으로 무자비하게 억압하던 헌병경찰제에서 문화통치로 전환이 되었고, 1930년대에는 1929년 대공항의 영향을 해결할 빌미를 찾고 있던 세계의 국가들 중 일부가 파시즘 체제를 통해 전체주의 국가로 부상하게 되면서 그 중 일본도 이러한 해결방안을 위해서 1937년의 중일전쟁과 1941년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것이다. 이 시기는 우리민족의 암흑기인 일제 강점기 시절 중 가장 참혹하고 어려웠던 시기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본격적으로 들어가서 당시 이러한 시대적 상황이 일본에서 어떤 정책과 같이 맞물려서 적용을 했는지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다.
2. 신도의 국교화 과정
먼저 일제는 일본에서 천황을 중심으로 보는 국체론과 관련된 논쟁이 많아지면서 정부가 논쟁의 중심에 개입하게 되는 현상이 발생하게 된다. 국체론(또 다른 말로 국체관념이라고도 한다.)은 1930년대부터 천황제 중심의 파시즘, 전시체제로 이어지는 핵심사상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이어지는 과정들은 국체명징운동과 함께 맥을 같이한다고 볼 수 있는데, 그것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역사적 사건이 바로 1937년 5월 국체명징의 서명을 기반으로 문부성에서 『국체의 본의』를 발간해서 배포한 것이다. 이 『국체의 본의』는 천황 통치 체제를 찬양하는 내용이 주를 이루는 내용으로, 필자가 앞서 언급했던 국체론, 국체명징운동과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1890년에 교육칙어가 등장하고, 일본제국 헌법에서 일본의 천황이 통치하는 체제를 ‘국체의 정화’라고 부른 것에서 볼 수 있듯이 『국체의 본의』또한 이러한 ‘국체론’을 지지하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는 내용으로 볼 수 있다. 이렇게 천황을 중심으로 한 통치제제를 지지하는 관념이 과연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알기 위해서는 1900년대 신도가 모든 종교를 초월한 국가의 상징으로 구축하기 시작하는 메이지 신정부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신정부는 종교전체를 국가의 틀로 묶는 방법을 찾아내었는데, 가장 먼저 알 수 있는 근원이 바로 ‘제국헌법’이다. 제국헌법의 목적은 무력한 천황의 새로운 등극과 신도의 국가제도화를 통해 모든 종교를 한 틀로 묶어서 국가의 통제아래 두고자 한 의도와 연결된다. 즉 천황을 중심으로 한 이념과 통치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정부를 출범시키고 그러한 정부를 지탱하기 위한 ‘이데올로기’로써 제국헌법이라는 법을 제정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와 더불어 신도를 국가의 공적인 제사로 승격시키기 위해 1871년 신사를 국가의 종사로 관사 이하의 신관직원 규칙을 태정관 포고를 통해 하달하고 천황신도의 중심 신궁이라 할 수 있는 이세신궁의 개혁을 통해 이전까지 존재해오던 여러 세습제와 사직을 폐지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신사를 5단계로 나누어 사격제도를 확립하고, 전국에 존재하고 있었던 17만 개의 크고 작은 신사들을 모두 이세신궁을 중심으로 국가의 공적 기구에 편입이 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이것은 신정부를 세운 이들에 뜻에 맞게 국가의 정체성이 천황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가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1873년 기독교를 금지하는 고찰(高札)의 폐지와 화장의 금지 등 여러 가지 이전부터 계속 유지되어 왔던 여러가지 정책들을 폐지하면서 신도국교화 작업이 잠시 어려움을 겪는 과정을 겪기도 했었지만 1889년 일본제국헌법(이하 제국헌법)의 발포와 황실전범의 제정과 1890년 교육칙어의 제정으로 이어지면서 국가신도화 정책은 마침내 완결되게 된다. 이렇게 완결된 국가신도화 정책이 당시 일제의 식민지였던 조선에도 간접적으로 영향을 줘서 ‘신사참배’라고 하는 정책이 시행되기 시작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3. 조선에서의 신사의 건립 과정
조선에서 신사가 국가적인 목적으로 자리잡기 시작하는 것은 크게 세 가지로 구분 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일본이 조선을 병합하는 1910년 이전시기이며 두 번째는 1920년대,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는 1930년대이다. 먼저, 조선에 신사가 들어오기 시작한 계기는 1609년 을유조약이 체졀되고 일본인들이 부산에 점차 거주하기 시작한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부산에 있는 일본인들의 항해의 안전을 기원하는 목적으로 금도비라신을 모신 사당이 부산에 세워지는데, 1678년 왜관을 용두산 기슭으로 옮기고 쓰시마 번주가 금도비라 신사를 건립하여 운영하게 되었다. 이것이 1894년 거류지 신사, 1900년에는 용두산 신사라고 개칭이 되면서 조선에서 유일한 신사가 되었다. 1875년 9월 20일에 일어난 운요호 사건 이후 조선은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맺게 되는데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이 더욱 늘어나게 되면서 신사가 필요하게 되었고, 이로인해 1910년 이전에 건립된 신사는 12개정도로 추정된다. 다만 이 중 3곳은 강화도 조약으로 개항한 부산, 인천, 원산에서 건립이 되었다. 건립된 연도는 1609년 (부산 용두산 신사), 1882년 (원산 신사), 1890년 (인천 신사)으로, 부산에 세워진 용두산 신사를 제외하면 조선에 대한 여러 열강들과의 침탈이 복잡했던 시기에 신사가 건립되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신사에 모셔진 제신의 중심은 주로 일본의 시조인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였으며, 이외에도 메이지 천황이 모셔진 곳도 있었다. 이는 이미 일본에서 국가 중심의 종교이자 통치의 근원으로 삼고 있던 신도가 점진적으로 영향력을 가지기 시작하여 식민지에까지 확장되어 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즉 1910년 일제가 조선을 병합한 이전 시기까지는 신사의 설립 목적은 주로 조선 내 거주하는 일본인들을 위한 목적이 컸다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에는 식민지 내의 신사참배 목적은 없었다고 볼 수 있다.
1910년대까지 조선 내의 자국민을 위해서 신사를 하나 둘씩 건립해나갔던 사실과 비교해보면 1920년대 말까지 세워진 신사의 수는 대략 280여개 정도로 급속하게 많이 늘어났다는 점을 인식할 수 있다. 이렇게 금속하게 늘어난 신사를 통해 일제는 조선을 신을 받드는 사상인 경신사상에 물들게 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경신사상이란 문자 그대로 ‘이미 있던 것을 새롭게 고치는 사상’ 이라는 뜻으로 일제가 새롭게 고치는 목적으로 신사참배 정책을 시행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1920년대에 신사가 급속도로 늘어나기 시작하면서 조선총독부를 필두로 일제는 신사참배 강요를 서서히 하기 시작하였고, 1930년대가 되면 신사참배에 대한 강요가 심해지게 된다.
일제는 신도국교화 정책을 식민지였던 조선에도 적용시켜 일반 평민들에도 천황에 대한 이데올로기와 신사에 대한 신앙을 가지기를 강요하고, 일본 내에서 천황 중심의 통치체제를 완결한 것을 토대로 일본의 풍속과 일본 국민에 대한 국가적인 의례를 이식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조선 내의 조선신사의 건립은 바로 ‘동화정책’에 그 목적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목적으로 건립한 조선신사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가 바로 ‘조선신궁’이다. 조선신궁은 크게 사전과 부속건물, 그리고 봉납 건설물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서 사전(社殿)이란, 신사에 모셔져 있는 신이 모셔져 있는 본전, 그러한 제신에게 경배하는 배전, 신직과 칙사가 축사를 행하는 축사사, 참배자의 부정을 없애는 수수사로 이루어져 있는 곳을 말하는데, 참배하러 오는 이들이 조선신궁으로 가는 길은 세 가지로 이우어져 있었다. 첫째는 현재 남산의 백범광장 쪽에서 올라가는 길로, 당시에는 이 길을 표참도라고 불렀다. 두 번째는 현재의 남산도서관 쪽에서 올라가는 길로 서쪽에 있는 도로를 이용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는 숭의여자대학 쪽에서 올라가는 동쪽에 있는 이면도로를 이용한 것이다. 방금 언급한 세 가지의 길 중 백범광장 쪽에서 올라오는 길인 표참도를 기준으로 당시 표참도 앞에 “朝鮮神宮”이라고 쓰인 사호표를 오른쪽에 두고, 신궁의 상징이었던 도리이를 지나면 총 384개로 이루어진 계단이 나왔고, 안으로 가면 배전에 모셔진 아마테라스와 메이지 천황이 나오는데, 이 두 신에게 참배객들은 참배했다. 조선신궁은 1920년대에 건립되는데, 1930년대로 가면서 생활의 한 부분으로 자리잡게 된다. 국가의 행사적인 날이나 명절이 되면 누구나 가서 신궁에 참배를 하게 되고 1931년 만주전쟁과 1937년 중일전쟁으로 일본이 전쟁을 자주 일으키게 되는 전시체제기에 전쟁터에 나간 친척들과 자식들을 위해 신궁참배를 하는 이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여기서 일제의 조선 지배정책에 관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조선신궁이 건립된 시기인 1925년은 사이토 마코토가 조선총독으로 부임해 있는 시기로, 그는 잘 알다시피 ‘문화정책’을 표방하며 이전까지 헌병경찰제로 폭력적으로 조선을 지배하던 방식을 버리고 새로운 정책을 펴고 있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문화정책에 대해 아는 것은 1910년대의 헌병경찰제와 비교해봤을 때, 헌병경찰의 수를 줄이고, 신문이나 잡지의 간행을 허용하며, 조선인들이 차별받지 않고 정치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정도로 배워왔다. 그러나 다른 면에서는 한국인에 대한 감시를 이전보다 더 철저하게 했으며, 이에 대한 탄압으로 치안유지법을 제정하기도 했던 시기라고 볼 수 있다. 김신재는 동화정책을 중심으로 기존의 이러한 구분에서 벗어나 일제강점기를 3시기로 구분하고 1910년대의 1기는 병합시기부터 3·1운동시기로, 2기는 중일전쟁 발발 전까지, 그리고 3기는 해방까지의 시기로 보면서 각각을 무단통치에 의한, 유화책에 의한, 좀 더 노골적으로 취하게 되는 적극적인 동화정책 시기로 보았다. 즉, 조선총독부의 2기 정책 때 내선융화와 내지연장주의를 표방하면서 겉으로는 일본인과 조선인의 차별을 줄이려는 정책을 시행하는 듯 했으나 조선을 단순히 식민지로 본 것이 아니라, 일본제국과 동등한, 일본의 연장선에 조선이 있는 것으로 간주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 주장에서 보면 1925년 조선신궁이 건립되고 1930년대로 갈수록 신사참배가 일상화가 되는 것이 단순히 1930년대에 조선총독부가 조선의 민족성과 고유성을 말살하여 일본을 위한 도구로만 간주하여 이용을 하는 전시체제기의 모습의 한 일면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1920년대 문화정책을 추진하면서 이미 조선에 일본적 요소들을 이식시켜 나갔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1930년대에 이르게 되면 조선총독부의 정책이 새로운 것으로 바뀐 것이 아니라 정도가 심화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Ⅳ. 신사참배의 강요
1. 1930년대 신사참배 강요
먼저 신사에 대해 조선총독부에서 공식적으로 규정한 것들에 대해 살펴보면 1915년 8월에 「신사사원규칙」(조선총독부령 제 82호)를 공포함으로써, 신사에 공립적인 성격을 부여하고, 같은 날 공포된 포교규칙(조선총독부령 제83호)에서 기독교, 불교, 교파신도만을 종교로 인정하여 신도를 종교의 범위에서 벗어나게 하였다. 그리고 난 후에 공포된 「신사에 관한 규칙」(조선총독부령 제 21호)으로 신사의 전국적인 설립을 확대한 것이다. 원영상은 이러한 현상에 대해 대일본제국헌법 제 28조에 의거하여 제한적인 종교의 자유만을 허용하는 것으로, 결국에는 천황과 천황중심의 신도를 긍정하느냐와 긍정하지 않음에 따라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지 않겠다는 의미로 해석했다. 이 말은 천황 중심의 신도와 신사참배를 긍정해야만 천황의 신민으로서의 누릴 수 있는 자유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대일본제국헌법과 교육칙어로 천황의 충실한 신민으로서의 생활을 할 것을 권고하고 있는 것이라 볼 수 있는데 이렇게 된 배경은 일본 내의 신도는 종교가 아니라는 입장인 신사비종교론의 취지에서 나온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 중 대표적인 인물인 다나카 요시토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신사의 제사는 완전한 국가의 정치이며, 제사와 정치는 하나이다. 종교가가 치병을 해도 의사가 아니듯이 신직이 기년제를 올리고 오곡이 풍요를 기도해도 종교라고 볼 수 없다. 종교의 본의는 그 교지(敎旨)를 선전하고 인민을 교화시키는데 있다. 관혼상제의 식전을 주재하는 것은 반드시 종교의 의무라고는 볼 수 없으며, 꼭 종교 이외에도 이것이 허가된다. 일본인이 행하는 의식에는 신기(神祇)에 관련된 것들이 많기 때문이다. 신사에 있어서도 신전결혼을 행하고 신직이 신장을 주재하는 것을 종교행위라고 하는 것은 우매한 것이다. […] 신사는 국가의 종사이며, 그것에 대한 숭경 다른 말로 제사는 보본반시이고, 감사이고, 기념이라고 볼 수 있다. 결코 종교가 아니다. 신도를 종교로 보게 되면, 타 종교를 믿는 자는 신자가 아니게 되어 신사에 참배하지 않는 자가 속출하게 된다. 학교생도의 단체참배도 시킬 수 없게 된다. […] 학교에서 어진영을 모시고 절을 하고 예배를 하는 것은 종교행위가 아니다. 만약 종교행위라고 한다면, 교장, 교원 등은 처분을 받게 되는데, 이는 불합리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러한 일본 내의 정치적 관념적 토대와 1929년 경제대공황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만주전쟁을 일으켜 식민지를 포함한 일본 전역에 ‘정신교화운동’과 종교통제를 강화하면서 기독교계 학교에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동시에 적극적인 종교통제정책을 펴게 되었다. 이에 대해 기독교계 학교가 참여하기를 거부하여 문제가 된 경우가 적지 않았다. 전라남도 광주지역에서 가장 먼저 이런 사례가 발생하게 된다. 1932년 일본인이 발행했던 ‘목포신보’가 광주에 있는 모 사립 보통학교와 보통여학교가 종교가 다르기 때문에 만주전쟁에 대한 기원제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했다며, 계속 참여하지 않을 경우 학무당국에서 엄중한 조치를 취하겠다는 내용의 기사를 실었다. 여기서 언급한 모 사립 보통학교와 보통여학교는 숭일학교와 수피아 여학교를 가리킨다. 같은 해 9월에 평양에서 숭실전문학교를 중심으로 한 10여 개의 기독교계 학교가 만주전쟁 1주년을 기념하여 전몰자 위령제에 참여하라는 평남 지사의 공식적인 요구를 무시하고 불참하여 문제가 된 적이 있었는데, 그 때 이미 도 당국에서는 총독부에 이를 통보하고 해당학교에 대해서 폐교처분까지 고려하고 있었다. 이러한 현상은 일시적으로 어느 지역과 학교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이미 전국적으로 퍼져서 어느 지역이나 동일한 처지에 놓여있었다. 1931년을 첫 시작으로 대륙침략을 가장 먼저 단행한 만주에서는 일제가 군사력을 가지고 있는 관동군 사령관과 관동장관을 앞세워 관동주와 만주 철도국의 군사 행정을 모두 장악하게 하였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철도로, 철도는 제국주의 국가들이 자국의 경제적 이익을 위해 설치한 의도가 적지 않은데 군사와 행정을 담당하게 했다는 사실 또한, 식민지 국가에 침투하여 간섭하겠다는 의도가 깔려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1932년에 만주국이 세워지기 이전에 만주에서는 거류민의 증가와 더불어 신사의 수도 급증하고 있었는데, 이는 일본의 신도 보급기간이었던 全國神職會(전국신직회)와 皇典講究所(황전강구소)가 ‘滿洲國祀官養成所規定’(만주국사관양성소규정)을 만들어 신직들을 양성하여 신사에 보내고자 한 의도도 한 몫을 했다고 볼 수 있다. 만주 지역 내에 설립한 신사의 수는 점진적으로 증가해 오다 1920년대 후반에 잠시 주춤하고 만주국을 설립한지 1년이 되는 1933년에 다시 증가하기 시작하여 1940년대로 가게 되면 대략 179개에 달하게 된다. 또한, 일제가 본격적으로 대륙 침략에 손을 뻗게 되는 것의 시발점이라 할 수 있는 1937년의 중일전쟁을 시작으로 만주(국)에서의 치외법권의 철폐와 철도부속권의 이양에 대한 조약은 일본과 만주국 사이에서 처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에 반하여, 만주 내에서의 신사와 교육만은 일본 측의 만주국주차특명전권을 가지고 있는 대사가 관장하도록 되어있었다. 이 부분에서 필자는 일제가 신사와 교육 부분에서 간접적으로 특명의 전권을 가지고 있는 대사를 통해 관장하고자 했던 목적이 1930년대 식민지 조선을 다스리고자 했던 통치방식과 이어진다고 보았다. ‘신사’와 ‘교육’은 국가를 유지하는 데 꼭 있어야 하는, 고유적인 특성과 정신을 드러내는데 밀접한 관계가 있으므로 다른 부차적인 부분이라 볼 수 있는 경제적 특성(철도 설치)보다도 더 기본적이고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주국에서 관동군 사령관의 자리에 군사적인 성격이 강한 인물을 임명함으로써 처리하고자 했듯이 조선 내에서도 이런 군사적인 성격이 강한 인물을 중심으로 신사참배 강요 정책을 전개시켜 나가게 된다. 문화정책을 표방했던 제 5대 총독 사이토 마코토 이후에 1931년 우가키 가즈시케가 6대 총독으로 부임하고나서 그는 전임자의 방침을 토대로 조선을 통치해 나갈 계획이지만, 일본인과 조선인 간의 융화를 중심적으로 이루어나가겠다는 의지를 나타냈다. 그 이후에 부임한 조선 제 7대 총독 미나미 지로는 부임과 동시에 동화정책의 극단적 정책이라 할 수 있는 ‘황국신민화정책’을 이전보다 더욱 적극적으로 시행하였고, 자신이 총독으로 부임해 있는 기간 내에 조선인들이 천황을 만나 알현하고, 징병제를 실시하여 조선인들을 그들의 제국주의 침략전쟁에 동원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리고 그러한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서 조선인을 모두 천황에게 충실한 신민으로 개조하기 위해서 학교와 교회에 신사참배를 강요하였다.
2. 신사참배 강요에 대한 대응
조선총독부를 중심으로 한 신사참배 정책에 대한 대응은 불교, 기독교, 대종교 등 여러 종교적인 차원에서 나타났다. 각 종교마다 추구하는 종교관이 달랐고, 시기 별로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히면서 결과적으로 보면 신사참배 정책에 굴복하는 현상을 보이기는 하지만, 각 종교계가 신사참배 정책에 대해 일관된 대응을 보일 수 있었던 것은 신사참배 정책이 가지고 있는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식민지였던 조선에 추구하는 목표가 피지배적 위치에 있었던 조선인들에게 맞지 않다고 생각했고, 때문에 이러한 정치적인 이데올로기가 강한 정책이 조선인들에게 그리고 조선에서 존재해왔던 각 종교계에 종교의 자유를 위협하는 요인으로 느끼게 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일본 신화에 나오는 존재인 아마테라스와 메이지 천황에게 절을 한다는 것은 각 종교가 가지고 있던 독자적인 요소를 침범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이러한 요인들에 대해 신사참배를 할 수 없는 나름대로의 이유를 가지고 맞선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에 필자는 이 논문에서 신사참배 정책과 관련하여 대응한 종교들을 전부 다루기에는 너무도 광범위하다고 생각이 되어, 기독교적인 측면에서 이러한 흐름을 다루어 보고자한다. 다만 일일이 개인적인 행동까지 다루는 것보다는 한 조직 내에서 신사참배 정책에 대해 어떤 식으로 인식을 해 갔는지를 보는데 목적이 있다. 한 조직 내에서 신사참배에 관한 의견이 어떠한 흐름 상황에서 나오기 시작했으며, 이것이 조선총독부에 어떠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는지에 대해 먼저 살펴볼 것이다.
1924년 강경 공립보통학교 학생의 신사참배에 대한 의의제기를 처음으로 시작하여, 천주교의 신사참배거부운동은 1930년대 미국의 메리놀 외방전교회가 관할했던 평양교구를 중심으로 하여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물론 앞서 언급한 목포신보에서 종교가 다르기 때문에 만주전쟁 관련 기원제에 참여하기를 무시한 기독교계 학교의 사건은 광주에서 벌어진 일이지만, 개신교와 천주교의 신사참배에 대한 대응을 가장 잘 보여주는 지역은 평양지역이다. 신도에 대한 정책과 교육이 무엇보다도 강조되고 우선적으로 이루어진 신사참배라 이르는 정책에 대해서 조선에서의 기독교는 신사가 종교적이냐 종교적이 아닌 국민의 도덕규범의 한 일 부분일 뿐이라는 논쟁을 벌여야 했고, 이에 대해 이진구는 천주교는 전래 당시 조상의 제사를 우상숭배로 보았지만, 일제의 신사참배에 관해서는 우상숭배가 아닌, 국가적인 행사로 보았다고 말하며, 개신교는 초기부터 행위 자체를 우상숭배로 보았기 때문에 신사참배 정책에 관해서도 일관적인 태도를 취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앞에서 잠시 언급한 다나카는 ‘신도’를 종교적인 것이 아닌 일본인이 지켜야 할 국민도덕으로 본 것에 반하여, 이노우에 데쓰지로는 신도를 ‘민족의 신앙으로 내세운 국가적 종교’로 규정한다. (다른 말로 하면 국교이다.) 1932년 만주전쟁 1주년을 기념하여 전사자 위령제에 참여하기를 거부했던 평양 교구장 모리스 몬시뇰을 중심으로 증화 교구의 콜만신부가 「신사참배 :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를 교황 사절단에게 제출하면서 신사참배에 참여하기를 반대하는 입장을 지니게 되는 양상은 신도를 종교적 관점에서 이해하여 두 신을 섬길 수 없기 때문에 이러한 입장을 취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여기서 중요하게 봐야 할 것은 단순히 ‘평양교구가 이러한 입장을 취해서 신사참배에 참여하지 않았다’가 아니라, 신사참배에 참여하기를 거부한 입장이 어떤 식으로 흘러갔는지를 파악하는 것이다. 콜만신부는 일제의 신사참배를 종교적인 의미로 간주할 것인지 아니면 국민으로서의 도덕적인 의무 정도로 볼 것인지의 이분법적 구분으로 바라볼 것이 아닌 종교적인 측면과 국가의례적 성격의 두 가지 측면을 함께 가지고 있다고 인식했다. 그러한 인식을 토대로 그는 일본의 애국주의를 비판하였다. 신사참배라는 정책이 단순히 ‘일본 국민이면 마땅히 가져야 하는 것’이라면 이것은 결국 과거 나치즘에서 나타났던 전체주의의 성격과 같은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이런 정책을 인정하게 된다면 각 국가들이 국제법으로 다른 국가들로부터 침입을 받지 않게 하려는 시도가 영향이 없다고 보았다. 평양교구는 개신교와의 협력을 통해서 신사참배 정책에 대응해나가기도 하였으나, 신사참배를 종교적 관점과 별개로 수용할 수 있다는 히로시마 교구장 로스의 견해가 나오면서 신사참배의 사례에 따라 참배할 수 있다는 논리를 세우고 결국에는 신사참배에 참여하게 되었다. 조선에서의 외국인(선교사)들과 일제의 관계는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어 가는 1900년대 초까지만 하더라도(정확히 시기를 따져보면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고, 전시상황 속에서 일본의 한국 내 군사기지 요구로 인해 한·일 의정서가 체결되고, 전세가 유리해져 가는 상황) 일본은 당시 서구 열강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고, 이 우호적인 관계에 선교사들의 역할이 중요했음으로 이들과의 관계가 나쁘지 않았다. 이 말은 선교사들의 종교에 대해서도 적대적이지 않았다는 말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1930년대에 오게 되면서 일제는 대륙침략정책을 적극적으로 펴게 되고, 이에 따라 일본에 호의적이던 서구 열강들도 이러한 일본의 정책을 견제하게 되면서, 일본은 외부와의 관계를 끊게 되고, 독자적으로 식민지를 경영하게 되면서 선교사들은 더 이상 아군이 아니었고, 일제는 당시 기독교 학교의 중심이었던 선교사들을 추방시키며 조선에서 그들의 입지를 줄여나가 보다 효율적으로 조선을 지배하고자 했다. 평양 교구 사건을 통해서 초기에는 교구 내의 선교사가 독자적으로 신사참배에 대한 대응을 해 나갔으나 뒤로가면서 선교사들 내부에서도 입장차이가 드러나게 되면서 결국에는 신사참배 정책을 허용하게 되는 양상을 보인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사적인 이유만이 아닌 국가와 국가 간의 관계를 고려한 이유도 포함되어 있었고, 결코 작은 문제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Ⅴ. 결론
일제는 1910년대부터 조선이 해방을 맞는 1945년에 이르기까지 35년의 세월동안 조선총독부를 중심으로 악랄한 정책들을 통하여 조선 내의 민중들을 억압하고 통제했다. 처음에는 헌병경찰제와 사립학교규칙 등을 통해서 전국에 파출소와 주재소 등을 설치하여 감시하고 억압하였다. 이러한 정책은 1919년 일어난 3·1운동의 여파로 1920년대부터 조선총독부는 문화통치로 전환하게 되었다. 그러나 겉으로만 조선인을 등용하고, 신문의 창간을 허용하는 듯 조선인과 일본인을 차별하지 않는 정책을 시행하는 척 하면서 실상은 무단통치기 때보다 더욱 계획적이고 철저하게 탄압해나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 중심에 신사를 이용하여 조선 내에서 신사참배를 차츰 강요해나가기 시작한다. 1910년대에는 일본인 중심의 신사 건립이 목적이었다면 1920년대에 조선신궁을 세우면서 각 도마다 신사가 들어서게 되고, 1930년대 이르게 되면 신사에 가서 참배하는 것이 일상의 한 부분으로 자리잡게 되면서 일제는 1868년 메이지 신정부가 들어서면서 신정부를 지지하는 세력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굳건히 하기 위해 국가신도화의 과정을 통해 천황 중심의 관념을 국민도덕의 한 부분으로 세우게 된 것과 같이 신민지에도 동일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신사참배를 강요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에서 천황중심의 신도를 종교적으로 볼지 아니면 국가 중심의 국민도덕화로 봐야하는지에 대해서 일본 내에서도 논쟁이 발생하기 시작했고, 마찬가지로 조선 내에서 특히 기독교계를 중심으로 이러한 논쟁이 발생하게 되면서 일본이 의도했던 것과는 달리 조선에서는 천황이 국체라는 인식이 일본에서 정착되어가는 과정과는 다르게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급기야는 1920년대에 신사참배 정책에 대한 의의제기가 나오게 되고, 이는 사회적 이슈를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또한 1930년대로 가게되면 평양 지역을 중심으로 신사참배 정책에 대해서 참여하지 않겠다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한다. 하지만 신사참배 정책이 신사에 가서 참배하는 여러 가지 사례들에 따라 다르게 해석할 수 있다는 히로시마 교구장이었던 로스의 의견이 표출되면서 교황사절단은 점차 수용하게 되고, 일본과의 관계적 악화를 우려한 드라우트 신부가 이를 받아들이면서 결국에는 신사참배 정책에 대해 수용하는 태도를 보이게 된다. 이는 일제가 조선을 병합하는 1900년대 초까지는 서구열강들과의 관계가 중요했고, 그래서 이 시기 까지는 그들의 종교에 대해서도 적대적이지 않은 입장이었으나. 1930년대에 일본이 대륙침략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이에 대해 견제를 보인 다른 국가들과의 관계가 틀어지기 시작하면서 이들의 종교에도 영향을 끼쳐서 선교사들을 추방하고, 자신들에게 호의적인 입장에 있었던 친일적 인사들로 하여금 평양 내의 여러 학교의 경영권을 맡기기 시작했고, 신사참배 정책에 대해 호의적이지 않던 학교들을 모두 폐교시키게 된 것이라 볼 수 있다. 현재 일본인들에게 신사는 빼 놓을 수 없는 공간이다. 그들에게는 신사란 문화적 공간이자 역사적인 맥락과 같이 하고 있는 곳이다. 하지만 한국에게 신사는 일본으로부터 조선총독부를 중심으로 한 신사참배 정책을 강요받은 역사적 아픔을 떠올리게 하는 공간이다. 이렇듯 역사는 하나로 정의될 수 없으며 다양한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는 학문이다.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의 아픈 역사적 기억을 과거로만 인식하지 않고 우리의 현재와 미래를 위한 길로 바라보고 과거와 지속적으로 대화하는 습관을 들인다면, 우리는 다가올 미래를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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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은 칼럼이 아니라 필자의 학부 졸업 논문임을 이며,
'한국역사학과'라는 명칭으로 되어 있지만 (한국사학과 또는 舊 국사학과)라는 명칭으로도 통용될 수 있음을 밝힌다.
2019학년도 졸업논문
<조선총독부의 신사참배 정책과 강요>
학과: 한국역사학과
학번: 20150268
지도교수: 장석흥 (문학박사 국민대학교 前 독립기념관 소장)
이름: 이충환
조선총독부의 신사참배 정책과 강요
<목차>
Ⅰ. 서론
Ⅱ. 일본 신사의 성격과 특징
Ⅲ. 신사참배 강요의 전개
Ⅳ. 신사참배 강요
Ⅴ. 결론
Ⅰ. 서론
일제는 1910년 8월 29일 한일병합으로 조선총독부를 중심으로 조선을 식민통치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29년의 경제공항으로 이를 타계하기 휘해 전쟁을 빌미로 다른 국가들을 침략하기 사직했는데 특히 1930년대부터 조선인들을 전쟁 수단으로 삼고 일본인과 차등적으로 구별하면서도 일본인화 하기 위한 동화정책을 신사참배 정책을 중심으로 강요하기 시작했다. 여태까지 신사참배에 대해 다룬 자료들은 적지는 않지만, 크게 보면 세 가지의 부분으로 분류해서 볼 수 있다. 첫째는 일본의 신도가 형성되어지는 과정을 중점으로 그것이 일제와 일제 통치하에 있던 식민지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에 관한 연구, 두 번째는 일제가 취한 종교정책이 조선총독부가 중심이 돼서 만든 여러 규칙들과 어떤 관계를 형성했고 그것이 조선에 끼친 영향에 대한 연구, 그리고 세 번째는 신사참배 거부운동에 초점을 맞춘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첫째와 둘째 같은 경우에는 신사참배 정책에 대해 보다 더 심층적으로 접근해서 보다 광범위한 차원에서 조선총독부의 식민정책을 바라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연구의 초점이 일본을 중심으로 하다 보니 일제의 식민정책과 연결해서 바라보는 관점이 이해하기 쉽게 정리되어 있지 않고 복잡하다는 단점이 있었다. 세 번째의 경우에는 신사참배 정책에 거부하는 형태와 이유에 대해 보다 상세하게 설명이 되어있다는 장점이 있는 반면에 너무 지엽적으로 설명이 되어 있고, 개인적인 관점에서 다루었다는 단점이 있다. 본 논문에서는 먼저 일본의 신사의 성격과 특징에 대해 언급하고 이러한 신사가 일제의 신사참배 정책과 어떤 연결고리를 가지는지에 대해서 중점적으로 다루고자 한다. 그리고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가 어떤 환경에서 이루어졌는지를 신사와 신사참배 정책의 관계를 중심으로 알아볼 것이다.
Ⅱ. 일본 신사의 성격과 특징
일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신사에 대해 알아야 한다. 신사는 신도의 신들을 제사지내기 위해 세운 건물을 말하는 것으로, 신사를 이루는 구조는 크게 보면 신이 모셔져 있는 장소인 본전과 신을 예배하고 각종 의례를 행하는 배전(拜殿), 그리고 이를 둘러싸고 있는 서원(瑞垣)으로 볼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신보를 두는 보전(寶殿)과 참배자가 심신을 정결히 하기 위한 수수사(手水舍) 등이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신사의 존재 목적이라 볼 수 있는 신도의 신앙은 고대 일본의 신에 대한 신앙과 이를 제사하는 것에서 출발했다고 볼 수 있다. 이 신앙은 다신교적인 민간신앙적 형태로 이해할 수 있는데, 사실 ‘다신적인 민간신앙’이라는 부분만 본다면 일본에만 존재해왔던 신앙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이해를 돕기 위해 한국을 예로 들자면, 예부터 집 곳곳에 신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믿는 애니미즘 중심의 민간신앙으로 볼 수 있다. 애니미즘이란, 모든 생물, 사물, 현상에 존재하는 영혼을 영적존재로 인식하고 이 존재에 대한 신앙을 말하는데, 이는 선사시대부터 행해져온 고대 종교로 볼 수 있다. 일본인들은 자연에도 생명이 있다고 여기며, 사람이 죽고 나서 일정기간이 지나면, 신이 되어서 가족을 지켜준다고 믿었다. 즉. 단순하게 자연물을 신적인 것으로 숭배하는 애니미즘적인 요소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더욱 확장시켜서 사람이 죽고 나면 신이 되어 자신의 가정과 자신을 지켜주는 수호신이 된다고 믿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마치 이집트인들이 죽은 사람을 미라로 만드는 이유와도 연결지어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이집트인들은 사후에 다시 부활하여 저승세계에서 다시 산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신사가 어떤 역할을 해 왔는지에 대해서 설명하겠다. 에도 시대에 신사가 건립되었는데 이 때는 주로 지역사회를 위해 공을 세운 농민이나 무사가 신사에 이름을 올릴 수 있는 자격이 있었다. 그 후 메이지 천황시기로 오면서 근대국가로 정비가 되어가는 과정에서 전쟁 희생자들을 신으로 삼고 국가차원에서 관리하게 되는 형태가 나타났는데 이 때 생긴 신사가 바로 도쿄초혼사이다. 도교초혼사는 현재의 야스쿠니 신사의 옛 명칭으로 무신전쟁 당시 천황을 위해 싸우다가 죽은 이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메이지 천황이 중심이 되어 건립했다. ‘신도’에서는 ‘천황’이라는 신성시되는 존재가 중요하게 여겨진다. 천황은 국가의 정치적 권한이나. 정책에 거의 관여를 하지 않지만, 일본의 기념일이나 국가적으로 중요한 행사에는 빠질 수 없는 존재이다. 본문에서 다룰 신사참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바로 이 천황이라는 존재와 신도라는 종교가 중요한 키워드라고 할 수 있다. 한민족 독립운동사에 따르면, 1868년 명치유신으로 왕정복고(王政復古)를 이룬 일본은 존왕사상(尊王思想)을 바탕으로 인접국가에 대한 침략론이 더욱 고조되었고, 이 당시 대표적인 조선침략론이었던 ‘정한론(征韓論)’이 국가정책 차원의 문제로 등장하면서 ‘아시아 연대론(連帶論)’과 ‘탈아론(脫亞論)’을 중심으로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을 정당화하는 주장들이 대두되었다고 한다. 일제는 자국이 문명국이라는 것을 각인시키기 위해 이데올로기를 이용한 수단을 찾게 되었고, 그것이 바로 국가 중심의 종교인 신도이다. 그들은 신도를 통해 민중을 교화하고 종교와 교육으로 국가가 국민을 통제, 이용하려는 목적의 수단으로 사용하였다. 이는 마치 한국사에서 전근대시기 특히 삼국시대에 지배자인 왕이 백성을 교화시키고 전쟁으로부터 민심을 안심시키기 위해 불교를 국교로 장려한 것과 비슷한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신불분리정책(神佛分離政策)’ 이라고 불리는 이 정책은 전통적으로 일본에서 불교와 전통신앙인 신도가 혼합되어 나타나는 현상이 예로부터 존재했으나, 이를 억제하고 신도를 장려하고 불교를 억압하기 위한 목적이 들어간 정책이었다. 필자는 이 부분 또한 우리 역사의 일면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는데, 고려 말, 이성계와 성리학을 신봉하는 그의 무리들이 역성혁명으로 고려를 폐하고, 조선을 건국할 때, 삼봉 정도전은 ‘불씨잡변’을 저술하여 불교의 폐단을 지적하고 성리학을 조선의 통치규범이자 백성을 교화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장려한 역사적 사실을 생각했을 때, 이와 비슷한 사례로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종교는 전근대시기에서 국가를 통치하는 자의 의도에 맞게 국가를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한 방편으로 이용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일제 또한 마찬가지였다. ‘일본은 태양신의 후손인 천황이 통치하는 나라이며, 따라서 일본은 신국이다.’ 이러한 이데올로기를 기본 전제로 삼고 일본은 자신들이 서양에게 문호개방을 연 방식 그대로 조선에게 적용시키기 시작했고, 점진적으로 조선의 경제와 정치적 간섭을 넓혀가기 시작하면서 제국주의 국가로의 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Ⅲ. 신사참배 강요의 전개
1. 조선총독부의 시기별 통치방식
일제강점기는 우리 역사에서 가장 암울했던 암흑기에 해당이 되는 시기이다. 다만 일제강점기를 언제부터로 봐야할 것인지에 대해서 조동걸은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하여 첫 번째는 1904년 한일의정서가 체결되는 시기부터 식민지로 봐야 된다는 주장, 두 번째는 1905년에 강제로 체결된 ‘을사늑약’으로 통감부가 설치된 후부터를 식민지로 봐야 한다는 주장, 마지막 세 번째는 1910년 한일병합으로 인해 대한제국의 이름이 사라지고 조선총독부가 설치된 때부터를 식민지로 봐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즉, 1900년대 초는 통감부가 먼저 세워지고, 통감이 한국의 정치에 영향을 주기 시작하였고, 서서히 한국을 식민지로 만들어가는데 일조하였다고 보면 된다. 그러다가 1대 총독 데라우치 마사다케가 출현하는 1910년의 헌병경찰제가 시행되던 시기는 학교 교원들이 칼을 차고 수업을 하던 시대였다. 1920년에는 1919년 3.1 운동의 영향으로 무자비하게 억압하던 헌병경찰제에서 문화통치로 전환이 되었고, 1930년대에는 1929년 대공항의 영향을 해결할 빌미를 찾고 있던 세계의 국가들 중 일부가 파시즘 체제를 통해 전체주의 국가로 부상하게 되면서 그 중 일본도 이러한 해결방안을 위해서 1937년의 중일전쟁과 1941년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것이다. 이 시기는 우리민족의 암흑기인 일제 강점기 시절 중 가장 참혹하고 어려웠던 시기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본격적으로 들어가서 당시 이러한 시대적 상황이 일본에서 어떤 정책과 같이 맞물려서 적용을 했는지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다.
2. 신도의 국교화 과정
먼저 일제는 일본에서 천황을 중심으로 보는 국체론과 관련된 논쟁이 많아지면서 정부가 논쟁의 중심에 개입하게 되는 현상이 발생하게 된다. 국체론(또 다른 말로 국체관념이라고도 한다.)은 1930년대부터 천황제 중심의 파시즘, 전시체제로 이어지는 핵심사상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이어지는 과정들은 국체명징운동과 함께 맥을 같이한다고 볼 수 있는데, 그것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역사적 사건이 바로 1937년 5월 국체명징의 서명을 기반으로 문부성에서 『국체의 본의』를 발간해서 배포한 것이다. 이 『국체의 본의』는 천황 통치 체제를 찬양하는 내용이 주를 이루는 내용으로, 필자가 앞서 언급했던 국체론, 국체명징운동과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1890년에 교육칙어가 등장하고, 일본제국 헌법에서 일본의 천황이 통치하는 체제를 ‘국체의 정화’라고 부른 것에서 볼 수 있듯이 『국체의 본의』또한 이러한 ‘국체론’을 지지하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는 내용으로 볼 수 있다. 이렇게 천황을 중심으로 한 통치제제를 지지하는 관념이 과연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알기 위해서는 1900년대 신도가 모든 종교를 초월한 국가의 상징으로 구축하기 시작하는 메이지 신정부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신정부는 종교전체를 국가의 틀로 묶는 방법을 찾아내었는데, 가장 먼저 알 수 있는 근원이 바로 ‘제국헌법’이다. 제국헌법의 목적은 무력한 천황의 새로운 등극과 신도의 국가제도화를 통해 모든 종교를 한 틀로 묶어서 국가의 통제아래 두고자 한 의도와 연결된다. 즉 천황을 중심으로 한 이념과 통치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정부를 출범시키고 그러한 정부를 지탱하기 위한 ‘이데올로기’로써 제국헌법이라는 법을 제정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와 더불어 신도를 국가의 공적인 제사로 승격시키기 위해 1871년 신사를 국가의 종사로 관사 이하의 신관직원 규칙을 태정관 포고를 통해 하달하고 천황신도의 중심 신궁이라 할 수 있는 이세신궁의 개혁을 통해 이전까지 존재해오던 여러 세습제와 사직을 폐지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신사를 5단계로 나누어 사격제도를 확립하고, 전국에 존재하고 있었던 17만 개의 크고 작은 신사들을 모두 이세신궁을 중심으로 국가의 공적 기구에 편입이 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이것은 신정부를 세운 이들에 뜻에 맞게 국가의 정체성이 천황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가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1873년 기독교를 금지하는 고찰(高札)의 폐지와 화장의 금지 등 여러 가지 이전부터 계속 유지되어 왔던 여러가지 정책들을 폐지하면서 신도국교화 작업이 잠시 어려움을 겪는 과정을 겪기도 했었지만 1889년 일본제국헌법(이하 제국헌법)의 발포와 황실전범의 제정과 1890년 교육칙어의 제정으로 이어지면서 국가신도화 정책은 마침내 완결되게 된다. 이렇게 완결된 국가신도화 정책이 당시 일제의 식민지였던 조선에도 간접적으로 영향을 줘서 ‘신사참배’라고 하는 정책이 시행되기 시작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3. 조선에서의 신사의 건립 과정
조선에서 신사가 국가적인 목적으로 자리잡기 시작하는 것은 크게 세 가지로 구분 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일본이 조선을 병합하는 1910년 이전시기이며 두 번째는 1920년대,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는 1930년대이다. 먼저, 조선에 신사가 들어오기 시작한 계기는 1609년 을유조약이 체졀되고 일본인들이 부산에 점차 거주하기 시작한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부산에 있는 일본인들의 항해의 안전을 기원하는 목적으로 금도비라신을 모신 사당이 부산에 세워지는데, 1678년 왜관을 용두산 기슭으로 옮기고 쓰시마 번주가 금도비라 신사를 건립하여 운영하게 되었다. 이것이 1894년 거류지 신사, 1900년에는 용두산 신사라고 개칭이 되면서 조선에서 유일한 신사가 되었다. 1875년 9월 20일에 일어난 운요호 사건 이후 조선은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맺게 되는데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이 더욱 늘어나게 되면서 신사가 필요하게 되었고, 이로인해 1910년 이전에 건립된 신사는 12개정도로 추정된다. 다만 이 중 3곳은 강화도 조약으로 개항한 부산, 인천, 원산에서 건립이 되었다. 건립된 연도는 1609년 (부산 용두산 신사), 1882년 (원산 신사), 1890년 (인천 신사)으로, 부산에 세워진 용두산 신사를 제외하면 조선에 대한 여러 열강들과의 침탈이 복잡했던 시기에 신사가 건립되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신사에 모셔진 제신의 중심은 주로 일본의 시조인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였으며, 이외에도 메이지 천황이 모셔진 곳도 있었다. 이는 이미 일본에서 국가 중심의 종교이자 통치의 근원으로 삼고 있던 신도가 점진적으로 영향력을 가지기 시작하여 식민지에까지 확장되어 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즉 1910년 일제가 조선을 병합한 이전 시기까지는 신사의 설립 목적은 주로 조선 내 거주하는 일본인들을 위한 목적이 컸다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에는 식민지 내의 신사참배 목적은 없었다고 볼 수 있다.
1910년대까지 조선 내의 자국민을 위해서 신사를 하나 둘씩 건립해나갔던 사실과 비교해보면 1920년대 말까지 세워진 신사의 수는 대략 280여개 정도로 급속하게 많이 늘어났다는 점을 인식할 수 있다. 이렇게 금속하게 늘어난 신사를 통해 일제는 조선을 신을 받드는 사상인 경신사상에 물들게 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경신사상이란 문자 그대로 ‘이미 있던 것을 새롭게 고치는 사상’ 이라는 뜻으로 일제가 새롭게 고치는 목적으로 신사참배 정책을 시행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1920년대에 신사가 급속도로 늘어나기 시작하면서 조선총독부를 필두로 일제는 신사참배 강요를 서서히 하기 시작하였고, 1930년대가 되면 신사참배에 대한 강요가 심해지게 된다.
일제는 신도국교화 정책을 식민지였던 조선에도 적용시켜 일반 평민들에도 천황에 대한 이데올로기와 신사에 대한 신앙을 가지기를 강요하고, 일본 내에서 천황 중심의 통치체제를 완결한 것을 토대로 일본의 풍속과 일본 국민에 대한 국가적인 의례를 이식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조선 내의 조선신사의 건립은 바로 ‘동화정책’에 그 목적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목적으로 건립한 조선신사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가 바로 ‘조선신궁’이다. 조선신궁은 크게 사전과 부속건물, 그리고 봉납 건설물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서 사전(社殿)이란, 신사에 모셔져 있는 신이 모셔져 있는 본전, 그러한 제신에게 경배하는 배전, 신직과 칙사가 축사를 행하는 축사사, 참배자의 부정을 없애는 수수사로 이루어져 있는 곳을 말하는데, 참배하러 오는 이들이 조선신궁으로 가는 길은 세 가지로 이우어져 있었다. 첫째는 현재 남산의 백범광장 쪽에서 올라가는 길로, 당시에는 이 길을 표참도라고 불렀다. 두 번째는 현재의 남산도서관 쪽에서 올라가는 길로 서쪽에 있는 도로를 이용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는 숭의여자대학 쪽에서 올라가는 동쪽에 있는 이면도로를 이용한 것이다. 방금 언급한 세 가지의 길 중 백범광장 쪽에서 올라오는 길인 표참도를 기준으로 당시 표참도 앞에 “朝鮮神宮”이라고 쓰인 사호표를 오른쪽에 두고, 신궁의 상징이었던 도리이를 지나면 총 384개로 이루어진 계단이 나왔고, 안으로 가면 배전에 모셔진 아마테라스와 메이지 천황이 나오는데, 이 두 신에게 참배객들은 참배했다. 조선신궁은 1920년대에 건립되는데, 1930년대로 가면서 생활의 한 부분으로 자리잡게 된다. 국가의 행사적인 날이나 명절이 되면 누구나 가서 신궁에 참배를 하게 되고 1931년 만주전쟁과 1937년 중일전쟁으로 일본이 전쟁을 자주 일으키게 되는 전시체제기에 전쟁터에 나간 친척들과 자식들을 위해 신궁참배를 하는 이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여기서 일제의 조선 지배정책에 관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조선신궁이 건립된 시기인 1925년은 사이토 마코토가 조선총독으로 부임해 있는 시기로, 그는 잘 알다시피 ‘문화정책’을 표방하며 이전까지 헌병경찰제로 폭력적으로 조선을 지배하던 방식을 버리고 새로운 정책을 펴고 있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문화정책에 대해 아는 것은 1910년대의 헌병경찰제와 비교해봤을 때, 헌병경찰의 수를 줄이고, 신문이나 잡지의 간행을 허용하며, 조선인들이 차별받지 않고 정치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정도로 배워왔다. 그러나 다른 면에서는 한국인에 대한 감시를 이전보다 더 철저하게 했으며, 이에 대한 탄압으로 치안유지법을 제정하기도 했던 시기라고 볼 수 있다. 김신재는 동화정책을 중심으로 기존의 이러한 구분에서 벗어나 일제강점기를 3시기로 구분하고 1910년대의 1기는 병합시기부터 3·1운동시기로, 2기는 중일전쟁 발발 전까지, 그리고 3기는 해방까지의 시기로 보면서 각각을 무단통치에 의한, 유화책에 의한, 좀 더 노골적으로 취하게 되는 적극적인 동화정책 시기로 보았다. 즉, 조선총독부의 2기 정책 때 내선융화와 내지연장주의를 표방하면서 겉으로는 일본인과 조선인의 차별을 줄이려는 정책을 시행하는 듯 했으나 조선을 단순히 식민지로 본 것이 아니라, 일본제국과 동등한, 일본의 연장선에 조선이 있는 것으로 간주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 주장에서 보면 1925년 조선신궁이 건립되고 1930년대로 갈수록 신사참배가 일상화가 되는 것이 단순히 1930년대에 조선총독부가 조선의 민족성과 고유성을 말살하여 일본을 위한 도구로만 간주하여 이용을 하는 전시체제기의 모습의 한 일면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1920년대 문화정책을 추진하면서 이미 조선에 일본적 요소들을 이식시켜 나갔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1930년대에 이르게 되면 조선총독부의 정책이 새로운 것으로 바뀐 것이 아니라 정도가 심화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Ⅳ. 신사참배의 강요
1. 1930년대 신사참배 강요
먼저 신사에 대해 조선총독부에서 공식적으로 규정한 것들에 대해 살펴보면 1915년 8월에 「신사사원규칙」(조선총독부령 제 82호)를 공포함으로써, 신사에 공립적인 성격을 부여하고, 같은 날 공포된 포교규칙(조선총독부령 제83호)에서 기독교, 불교, 교파신도만을 종교로 인정하여 신도를 종교의 범위에서 벗어나게 하였다. 그리고 난 후에 공포된 「신사에 관한 규칙」(조선총독부령 제 21호)으로 신사의 전국적인 설립을 확대한 것이다. 원영상은 이러한 현상에 대해 대일본제국헌법 제 28조에 의거하여 제한적인 종교의 자유만을 허용하는 것으로, 결국에는 천황과 천황중심의 신도를 긍정하느냐와 긍정하지 않음에 따라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지 않겠다는 의미로 해석했다. 이 말은 천황 중심의 신도와 신사참배를 긍정해야만 천황의 신민으로서의 누릴 수 있는 자유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대일본제국헌법과 교육칙어로 천황의 충실한 신민으로서의 생활을 할 것을 권고하고 있는 것이라 볼 수 있는데 이렇게 된 배경은 일본 내의 신도는 종교가 아니라는 입장인 신사비종교론의 취지에서 나온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 중 대표적인 인물인 다나카 요시토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신사의 제사는 완전한 국가의 정치이며, 제사와 정치는 하나이다. 종교가가 치병을 해도 의사가 아니듯이 신직이 기년제를 올리고 오곡이 풍요를 기도해도 종교라고 볼 수 없다. 종교의 본의는 그 교지(敎旨)를 선전하고 인민을 교화시키는데 있다. 관혼상제의 식전을 주재하는 것은 반드시 종교의 의무라고는 볼 수 없으며, 꼭 종교 이외에도 이것이 허가된다. 일본인이 행하는 의식에는 신기(神祇)에 관련된 것들이 많기 때문이다. 신사에 있어서도 신전결혼을 행하고 신직이 신장을 주재하는 것을 종교행위라고 하는 것은 우매한 것이다. […] 신사는 국가의 종사이며, 그것에 대한 숭경 다른 말로 제사는 보본반시이고, 감사이고, 기념이라고 볼 수 있다. 결코 종교가 아니다. 신도를 종교로 보게 되면, 타 종교를 믿는 자는 신자가 아니게 되어 신사에 참배하지 않는 자가 속출하게 된다. 학교생도의 단체참배도 시킬 수 없게 된다. […] 학교에서 어진영을 모시고 절을 하고 예배를 하는 것은 종교행위가 아니다. 만약 종교행위라고 한다면, 교장, 교원 등은 처분을 받게 되는데, 이는 불합리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러한 일본 내의 정치적 관념적 토대와 1929년 경제대공황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만주전쟁을 일으켜 식민지를 포함한 일본 전역에 ‘정신교화운동’과 종교통제를 강화하면서 기독교계 학교에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동시에 적극적인 종교통제정책을 펴게 되었다. 이에 대해 기독교계 학교가 참여하기를 거부하여 문제가 된 경우가 적지 않았다. 전라남도 광주지역에서 가장 먼저 이런 사례가 발생하게 된다. 1932년 일본인이 발행했던 ‘목포신보’가 광주에 있는 모 사립 보통학교와 보통여학교가 종교가 다르기 때문에 만주전쟁에 대한 기원제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했다며, 계속 참여하지 않을 경우 학무당국에서 엄중한 조치를 취하겠다는 내용의 기사를 실었다. 여기서 언급한 모 사립 보통학교와 보통여학교는 숭일학교와 수피아 여학교를 가리킨다. 같은 해 9월에 평양에서 숭실전문학교를 중심으로 한 10여 개의 기독교계 학교가 만주전쟁 1주년을 기념하여 전몰자 위령제에 참여하라는 평남 지사의 공식적인 요구를 무시하고 불참하여 문제가 된 적이 있었는데, 그 때 이미 도 당국에서는 총독부에 이를 통보하고 해당학교에 대해서 폐교처분까지 고려하고 있었다. 이러한 현상은 일시적으로 어느 지역과 학교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이미 전국적으로 퍼져서 어느 지역이나 동일한 처지에 놓여있었다. 1931년을 첫 시작으로 대륙침략을 가장 먼저 단행한 만주에서는 일제가 군사력을 가지고 있는 관동군 사령관과 관동장관을 앞세워 관동주와 만주 철도국의 군사 행정을 모두 장악하게 하였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철도로, 철도는 제국주의 국가들이 자국의 경제적 이익을 위해 설치한 의도가 적지 않은데 군사와 행정을 담당하게 했다는 사실 또한, 식민지 국가에 침투하여 간섭하겠다는 의도가 깔려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1932년에 만주국이 세워지기 이전에 만주에서는 거류민의 증가와 더불어 신사의 수도 급증하고 있었는데, 이는 일본의 신도 보급기간이었던 全國神職會(전국신직회)와 皇典講究所(황전강구소)가 ‘滿洲國祀官養成所規定’(만주국사관양성소규정)을 만들어 신직들을 양성하여 신사에 보내고자 한 의도도 한 몫을 했다고 볼 수 있다. 만주 지역 내에 설립한 신사의 수는 점진적으로 증가해 오다 1920년대 후반에 잠시 주춤하고 만주국을 설립한지 1년이 되는 1933년에 다시 증가하기 시작하여 1940년대로 가게 되면 대략 179개에 달하게 된다. 또한, 일제가 본격적으로 대륙 침략에 손을 뻗게 되는 것의 시발점이라 할 수 있는 1937년의 중일전쟁을 시작으로 만주(국)에서의 치외법권의 철폐와 철도부속권의 이양에 대한 조약은 일본과 만주국 사이에서 처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에 반하여, 만주 내에서의 신사와 교육만은 일본 측의 만주국주차특명전권을 가지고 있는 대사가 관장하도록 되어있었다. 이 부분에서 필자는 일제가 신사와 교육 부분에서 간접적으로 특명의 전권을 가지고 있는 대사를 통해 관장하고자 했던 목적이 1930년대 식민지 조선을 다스리고자 했던 통치방식과 이어진다고 보았다. ‘신사’와 ‘교육’은 국가를 유지하는 데 꼭 있어야 하는, 고유적인 특성과 정신을 드러내는데 밀접한 관계가 있으므로 다른 부차적인 부분이라 볼 수 있는 경제적 특성(철도 설치)보다도 더 기본적이고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주국에서 관동군 사령관의 자리에 군사적인 성격이 강한 인물을 임명함으로써 처리하고자 했듯이 조선 내에서도 이런 군사적인 성격이 강한 인물을 중심으로 신사참배 강요 정책을 전개시켜 나가게 된다. 문화정책을 표방했던 제 5대 총독 사이토 마코토 이후에 1931년 우가키 가즈시케가 6대 총독으로 부임하고나서 그는 전임자의 방침을 토대로 조선을 통치해 나갈 계획이지만, 일본인과 조선인 간의 융화를 중심적으로 이루어나가겠다는 의지를 나타냈다. 그 이후에 부임한 조선 제 7대 총독 미나미 지로는 부임과 동시에 동화정책의 극단적 정책이라 할 수 있는 ‘황국신민화정책’을 이전보다 더욱 적극적으로 시행하였고, 자신이 총독으로 부임해 있는 기간 내에 조선인들이 천황을 만나 알현하고, 징병제를 실시하여 조선인들을 그들의 제국주의 침략전쟁에 동원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리고 그러한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서 조선인을 모두 천황에게 충실한 신민으로 개조하기 위해서 학교와 교회에 신사참배를 강요하였다.
2. 신사참배 강요에 대한 대응
조선총독부를 중심으로 한 신사참배 정책에 대한 대응은 불교, 기독교, 대종교 등 여러 종교적인 차원에서 나타났다. 각 종교마다 추구하는 종교관이 달랐고, 시기 별로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히면서 결과적으로 보면 신사참배 정책에 굴복하는 현상을 보이기는 하지만, 각 종교계가 신사참배 정책에 대해 일관된 대응을 보일 수 있었던 것은 신사참배 정책이 가지고 있는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식민지였던 조선에 추구하는 목표가 피지배적 위치에 있었던 조선인들에게 맞지 않다고 생각했고, 때문에 이러한 정치적인 이데올로기가 강한 정책이 조선인들에게 그리고 조선에서 존재해왔던 각 종교계에 종교의 자유를 위협하는 요인으로 느끼게 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일본 신화에 나오는 존재인 아마테라스와 메이지 천황에게 절을 한다는 것은 각 종교가 가지고 있던 독자적인 요소를 침범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이러한 요인들에 대해 신사참배를 할 수 없는 나름대로의 이유를 가지고 맞선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에 필자는 이 논문에서 신사참배 정책과 관련하여 대응한 종교들을 전부 다루기에는 너무도 광범위하다고 생각이 되어, 기독교적인 측면에서 이러한 흐름을 다루어 보고자한다. 다만 일일이 개인적인 행동까지 다루는 것보다는 한 조직 내에서 신사참배 정책에 대해 어떤 식으로 인식을 해 갔는지를 보는데 목적이 있다. 한 조직 내에서 신사참배에 관한 의견이 어떠한 흐름 상황에서 나오기 시작했으며, 이것이 조선총독부에 어떠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는지에 대해 먼저 살펴볼 것이다.
1924년 강경 공립보통학교 학생의 신사참배에 대한 의의제기를 처음으로 시작하여, 천주교의 신사참배거부운동은 1930년대 미국의 메리놀 외방전교회가 관할했던 평양교구를 중심으로 하여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물론 앞서 언급한 목포신보에서 종교가 다르기 때문에 만주전쟁 관련 기원제에 참여하기를 무시한 기독교계 학교의 사건은 광주에서 벌어진 일이지만, 개신교와 천주교의 신사참배에 대한 대응을 가장 잘 보여주는 지역은 평양지역이다. 신도에 대한 정책과 교육이 무엇보다도 강조되고 우선적으로 이루어진 신사참배라 이르는 정책에 대해서 조선에서의 기독교는 신사가 종교적이냐 종교적이 아닌 국민의 도덕규범의 한 일 부분일 뿐이라는 논쟁을 벌여야 했고, 이에 대해 이진구는 천주교는 전래 당시 조상의 제사를 우상숭배로 보았지만, 일제의 신사참배에 관해서는 우상숭배가 아닌, 국가적인 행사로 보았다고 말하며, 개신교는 초기부터 행위 자체를 우상숭배로 보았기 때문에 신사참배 정책에 관해서도 일관적인 태도를 취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앞에서 잠시 언급한 다나카는 ‘신도’를 종교적인 것이 아닌 일본인이 지켜야 할 국민도덕으로 본 것에 반하여, 이노우에 데쓰지로는 신도를 ‘민족의 신앙으로 내세운 국가적 종교’로 규정한다. (다른 말로 하면 국교이다.) 1932년 만주전쟁 1주년을 기념하여 전사자 위령제에 참여하기를 거부했던 평양 교구장 모리스 몬시뇰을 중심으로 증화 교구의 콜만신부가 「신사참배 :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를 교황 사절단에게 제출하면서 신사참배에 참여하기를 반대하는 입장을 지니게 되는 양상은 신도를 종교적 관점에서 이해하여 두 신을 섬길 수 없기 때문에 이러한 입장을 취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여기서 중요하게 봐야 할 것은 단순히 ‘평양교구가 이러한 입장을 취해서 신사참배에 참여하지 않았다’가 아니라, 신사참배에 참여하기를 거부한 입장이 어떤 식으로 흘러갔는지를 파악하는 것이다. 콜만신부는 일제의 신사참배를 종교적인 의미로 간주할 것인지 아니면 국민으로서의 도덕적인 의무 정도로 볼 것인지의 이분법적 구분으로 바라볼 것이 아닌 종교적인 측면과 국가의례적 성격의 두 가지 측면을 함께 가지고 있다고 인식했다. 그러한 인식을 토대로 그는 일본의 애국주의를 비판하였다. 신사참배라는 정책이 단순히 ‘일본 국민이면 마땅히 가져야 하는 것’이라면 이것은 결국 과거 나치즘에서 나타났던 전체주의의 성격과 같은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이런 정책을 인정하게 된다면 각 국가들이 국제법으로 다른 국가들로부터 침입을 받지 않게 하려는 시도가 영향이 없다고 보았다. 평양교구는 개신교와의 협력을 통해서 신사참배 정책에 대응해나가기도 하였으나, 신사참배를 종교적 관점과 별개로 수용할 수 있다는 히로시마 교구장 로스의 견해가 나오면서 신사참배의 사례에 따라 참배할 수 있다는 논리를 세우고 결국에는 신사참배에 참여하게 되었다. 조선에서의 외국인(선교사)들과 일제의 관계는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어 가는 1900년대 초까지만 하더라도(정확히 시기를 따져보면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고, 전시상황 속에서 일본의 한국 내 군사기지 요구로 인해 한·일 의정서가 체결되고, 전세가 유리해져 가는 상황) 일본은 당시 서구 열강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고, 이 우호적인 관계에 선교사들의 역할이 중요했음으로 이들과의 관계가 나쁘지 않았다. 이 말은 선교사들의 종교에 대해서도 적대적이지 않았다는 말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1930년대에 오게 되면서 일제는 대륙침략정책을 적극적으로 펴게 되고, 이에 따라 일본에 호의적이던 서구 열강들도 이러한 일본의 정책을 견제하게 되면서, 일본은 외부와의 관계를 끊게 되고, 독자적으로 식민지를 경영하게 되면서 선교사들은 더 이상 아군이 아니었고, 일제는 당시 기독교 학교의 중심이었던 선교사들을 추방시키며 조선에서 그들의 입지를 줄여나가 보다 효율적으로 조선을 지배하고자 했다. 평양 교구 사건을 통해서 초기에는 교구 내의 선교사가 독자적으로 신사참배에 대한 대응을 해 나갔으나 뒤로가면서 선교사들 내부에서도 입장차이가 드러나게 되면서 결국에는 신사참배 정책을 허용하게 되는 양상을 보인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사적인 이유만이 아닌 국가와 국가 간의 관계를 고려한 이유도 포함되어 있었고, 결코 작은 문제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Ⅴ. 결론
일제는 1910년대부터 조선이 해방을 맞는 1945년에 이르기까지 35년의 세월동안 조선총독부를 중심으로 악랄한 정책들을 통하여 조선 내의 민중들을 억압하고 통제했다. 처음에는 헌병경찰제와 사립학교규칙 등을 통해서 전국에 파출소와 주재소 등을 설치하여 감시하고 억압하였다. 이러한 정책은 1919년 일어난 3·1운동의 여파로 1920년대부터 조선총독부는 문화통치로 전환하게 되었다. 그러나 겉으로만 조선인을 등용하고, 신문의 창간을 허용하는 듯 조선인과 일본인을 차별하지 않는 정책을 시행하는 척 하면서 실상은 무단통치기 때보다 더욱 계획적이고 철저하게 탄압해나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 중심에 신사를 이용하여 조선 내에서 신사참배를 차츰 강요해나가기 시작한다. 1910년대에는 일본인 중심의 신사 건립이 목적이었다면 1920년대에 조선신궁을 세우면서 각 도마다 신사가 들어서게 되고, 1930년대 이르게 되면 신사에 가서 참배하는 것이 일상의 한 부분으로 자리잡게 되면서 일제는 1868년 메이지 신정부가 들어서면서 신정부를 지지하는 세력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굳건히 하기 위해 국가신도화의 과정을 통해 천황 중심의 관념을 국민도덕의 한 부분으로 세우게 된 것과 같이 신민지에도 동일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신사참배를 강요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에서 천황중심의 신도를 종교적으로 볼지 아니면 국가 중심의 국민도덕화로 봐야하는지에 대해서 일본 내에서도 논쟁이 발생하기 시작했고, 마찬가지로 조선 내에서 특히 기독교계를 중심으로 이러한 논쟁이 발생하게 되면서 일본이 의도했던 것과는 달리 조선에서는 천황이 국체라는 인식이 일본에서 정착되어가는 과정과는 다르게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급기야는 1920년대에 신사참배 정책에 대한 의의제기가 나오게 되고, 이는 사회적 이슈를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또한 1930년대로 가게되면 평양 지역을 중심으로 신사참배 정책에 대해서 참여하지 않겠다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한다. 하지만 신사참배 정책이 신사에 가서 참배하는 여러 가지 사례들에 따라 다르게 해석할 수 있다는 히로시마 교구장이었던 로스의 의견이 표출되면서 교황사절단은 점차 수용하게 되고, 일본과의 관계적 악화를 우려한 드라우트 신부가 이를 받아들이면서 결국에는 신사참배 정책에 대해 수용하는 태도를 보이게 된다. 이는 일제가 조선을 병합하는 1900년대 초까지는 서구열강들과의 관계가 중요했고, 그래서 이 시기 까지는 그들의 종교에 대해서도 적대적이지 않은 입장이었으나. 1930년대에 일본이 대륙침략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이에 대해 견제를 보인 다른 국가들과의 관계가 틀어지기 시작하면서 이들의 종교에도 영향을 끼쳐서 선교사들을 추방하고, 자신들에게 호의적인 입장에 있었던 친일적 인사들로 하여금 평양 내의 여러 학교의 경영권을 맡기기 시작했고, 신사참배 정책에 대해 호의적이지 않던 학교들을 모두 폐교시키게 된 것이라 볼 수 있다. 현재 일본인들에게 신사는 빼 놓을 수 없는 공간이다. 그들에게는 신사란 문화적 공간이자 역사적인 맥락과 같이 하고 있는 곳이다. 하지만 한국에게 신사는 일본으로부터 조선총독부를 중심으로 한 신사참배 정책을 강요받은 역사적 아픔을 떠올리게 하는 공간이다. 이렇듯 역사는 하나로 정의될 수 없으며 다양한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는 학문이다.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의 아픈 역사적 기억을 과거로만 인식하지 않고 우리의 현재와 미래를 위한 길로 바라보고 과거와 지속적으로 대화하는 습관을 들인다면, 우리는 다가올 미래를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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