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시편 42편 본문비평 영혼의 갈급함을 찾는 사슴 부제: 하나님을 기뻐할 수 없을 때(The Hidden God)


본 과제는 계신 신대원 1학년 1학기 때 작성했음을 서두에 밝힌다.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다. 


지도 교수: 강정주(University of Gloucestershire Ph.D)  

이충환(Richard C.H. LEE 기독인문학 연구원 연구생)


1) 주석본문 설정: 시편42:1-5(6) (BHS에서는 제목을 1절로 따르고 있기 때문에 6절이 곧 5절에 해당한다)

2) 주석본문의 원문 확정(재구성): 


1:42 לַמְנַצֵּחַ מַשְׂכִּיל ªלִבְנֵי־קֹרַחb׃

2:42 כְּאַיָּלa תַּעֲרֹג עַל־אֲפִיקֵי־מָיִם כֵּן נַפְשִׁי תַעֲרֹג אֵלֶיךָ אֱלֹהִיםb ׃

3:42 צָמְאָה נַפְשִׁי לֵאלֹהִים לְאֵל חָי מָתַי אָבֹוא וְאֵרָאֶהa פְּנֵי אֱלֹהִים ׃

4:42 הָיְתָה־לִּי דִמְעָתִי לֶחֶם יֹוםָם וָלָיְלָה בֶּאֱמֹרa אֵלַי כָּל־הַיֹּום אַיֵּה אֱלֹהֶיךָ׃

5:42 אֵלֶּה אֶזְכְּרָה וְאֶשְׁפְּכָה עָלַי נַפְשִׁי כִּי אֶעֱבֹר aבַּסָּךְ אֶדַּדֵּםa עַד־בֵּית אֱלֹהִים בְּקֹול־רִנָּה וְתֹודָה bהָמֹון חֹוגֵגb ׃

:6 מַה־תִּשְׁתֹּוחֲחִי נַפְשִׁי וַתֶּהֱמִי עָלָי הֹוחִילִי לֵאלֹהִים כִּי־עֹוד אֹודֶנּוּ יְשׁוּעֹות פָּנָיוa ׃


3. 본문비평

1.a. 마스길의 정확한 의미는 아직까지 불투명하다. 다만 다음과 같은 여러가지 가능성이 존재하고 있다. 첫째는 “교훈시”로 보는 견해[1], 두 번째는 “묵상”과 “이해의 시”로 보는 견해, (헬라어 구약성경) 그리고 마지막은 “능숙한 시”로 보는 견해이다. 먼저, 첫 번째 견해는 32편과 78편의 시에는 적합하지만 다른 시편들에는 적합하지 않다. 즉 전체적으로 보편적이지 않고 통일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반면 이를 제외한 나머지 3가지 견해는 ‘쇠칼’의 사역형에서 유래한 분사와 어울린다는 특징이 있다. 의미가 불확실한 주요 이유는 이것이 시 자체를 가리키는지 아니면 음악적 연주를 가리키는 것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1.b. 고라 자손의 시는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는데, 첫째는 43편을 제외한 시편42편-49편과 둘째는 시편84편-88편이다. 이들은 레위인으로서 성전의 음악을 담당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 2.a. MT의 ‘아얄’보다는 일반적 형태인 ‘아얄레트’로 읽는 것이 바람직하다. 중음탈락으로 타우가 생략되었다.

3.a. 이 동사는 MT에서는 재귀형으로 쓰여졌지만, 문법적으로는 맞지 않다. 따라서 단순형으로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러우며, 몇몇 히브리 사본들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4.a ‘베아므람’으로 읽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네 개의 히브리 사본 입증)

5.a MT의 ‘에다덤’은 다다의 재귀형으로 해석된다. (BDB) 다후드는 우가릿어에 입각하여 나다드 (고개를 숙여라)에서 파생된 것으로 주장한다. 그러나 우가릿어로 주장하기에는 빈약한 점이 있다.

6.a ‘프네이 엘로하이’로 읽어라. 이것은 첫 단어를 5절에 속한 것으로 본 것이다.


4. 번역


1절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원문의 ‘아얄’은 “수사슴”을 뜻하므로 정확히 표현하자면 이보다는 “사슴”을 뜻하는 일반적 형태의 ‘아얄레트’가 더 옳다.) KJV 성경은 MT의 “수사슴”을 뜻하는 hart로 번역하고 있다.

NIVPsalms 42:1 For the director of music. A maskil of Sons of Korah. As the deer pants for streams of water, so my soul pants for you, O God.

KJV Psalms 42:1 Maschil, for the sons of Koeah. As the hart panteth after the water brooks, so penteth my soul after thee, O God.

 

2절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언제 내가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



NIVPsalms 42:2 My soul thirsts for God, for living God. When can I go and meet with God?

KJV Psalms 42:2 My soul thirsteth for God, for living God: when shall I come and appear before God?

 

 3절 사람들이 끊임없이 내게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니 이로 인해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NIVPsalms 42:3 My tears have been my food day and night, while men say to me all day long, “Where is your God?”

KJVPsalms 42:3 My tears have been my meat day and night, while they continually say unto me, Where thy God?

4절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함께 기쁨과 감사의 소리를 내며 그들을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 일들을 기억하고 내 안의 마음이 쏟아져 나와버렸도다

These things을 ‘이러한 일들’ 로 번역해도 되지만 문맥상으로 볼 때 이것은 무리와 함께 하나님의 집으로 갔던 이전의 일을 뜻하므로 나는 ‘이 일들’이 더 자연스럽다고 생각한다.

NIVPsalms 42:4 These things I remember as I poor out my soul: how I used to go with the multitude, leading the procession to the house of God, with shouts of joy and thanksgiving among the festive throng.


KJVPsalms 42:4 When I remember these[things], I pour out my soul in me: for I had gone with the multitude, I went with them to the house of God, with the voice of joy and praise, with a multitude that kept holyday. 

 

5절 내 영혼아 왜 그렇게 낙심하며 내 안에서 왜 그렇게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 안에서 소망을 두라 그의 도우심으로 내가 여전히 찬송할 것이다.


NIVPsalms 42:5 Why are you downcast, O my soul? Why so disturbed within me? Put your hope in God, for I will yet praise him, my Savior and my God.

KJVPsalms 42:5 Why art thou cast down, O my soul? And [why] art thou disquieted in me? Hope thou in God: for I shall yet praise him [for] the help of his countenance. 

 

5. 역사적 배경

이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있는데, 크게 시편 42편은 다윗이 자기 아들 압살롬으로부터 반란을 당한 상황(삼하 15:1-12)에서 오직 하나님을 향하여 구원을 호소한 시라는 견해[2]와 사울의 핍박을 받던 망명시기로 보는 견해(Calvin)[3] 혹은 정확한 시기를 알 수 없는 한 개인의 애가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다윗이 이 둘 중 정확히 어느 시기에 해당하는지 필자가 알 수 없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곤경에 처해 망명하던 시기에 쓰여진 다윗의 시”로 보고자 한다.

 

6. 문학적, 문법적, 문외적 특징

시편 42편은 시편을 나누는 5가지 유형(찬송시, 탄식시, 궁중시, 애가) 중 하나인 “개인적인 애가”에 속한다. 시편기자는 여기에서 비유를 통해 자신이 처한 곤경을 서술하고 있다. 특히 여기에서 그는 사슴이 시냇물을 찾는 것과 같은 필수적이면서도 의존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을 찾는 것을 영적인 목마름을 강하게 전달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갈망하는 것은 구체적으로 성전에서의 예배이다.(2절에서의 하나님의 얼굴을 뵙는다고 표현이 된 것이 이를 암시하고 있다) 첫 번째 비유(사슴이 시냇물 찾기에 갈급함 같이)는 3절의 은유(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다)로 전환되며 물로 연결된다.(1절에서의 시냇물에서 3절에서의 눈물) 시편기자에게 제기된 너의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라는 질문은 바벨론 포로를 뜻하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왜냐하면 이것은 포로가 된 사실이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버린 것으로 비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본다면 이것은 직접적으로 어떤 절망적인 상황에 의해서 제공되는데, 그의 원수들에 의해서 질병이나 고통에 있는 것은 하나님이 떠나가신 것처럼 보였다. 즉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 버림을 받고 성전 예배에 참석하는 것이 배제된 상황에서 시편 기자는 이전의 좋았던 때를 회상하기 시작한다. 그는 거룩한 날을 지키는 무리와 큰 절기의 예배를 지키기 위해 성전으로 갔던 때를 회상하기로 마음먹고 상기해보지만 억지로 생각한 향수가 현실이 될 수는 없다. 처음 등장하는 후렴부분(5절)은 그의 곤경을 강조하고 있을 뿐이다. 여기서 지배적인 것은 후렴의 첫 부분(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불안해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이다. 후렴의 나중 절은 하나님이 나타나 도우심으로 내가 찬송하리라는 희망을 나타내고 있다. 이는 현실이 아니며 따라서 시편기자는 여전히 곤경에 처해있다.


7. 양식 구조 표기


시편42편의 구조는 크게 두 개의 단원으로 나누어지며 이 중 필자가 선택한 1-5절은 두 개 중 하나를 이룬다. 그리고 각각의 단원은 시편의 전체적인 틀을 제공해 주는 동일한 후렴(42:5,11,43:5)으로 끝나고 있다. 또한 히브리 사본들은 42편과 43편은 하나의 단위로 표현하고 있다. 공통적인 후렴들을 가지고 있지만 두 개의 시편으로 분리되어 있는 이유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이를 헬라어 구약성경에서 찾기도 한다. 헬라어 구약성경애서는 42편의 제목을 ‘다윗의 시’로 표기했다는 점에서 42편을 애가로, 43편을 기도로 구별하여 보고 있다.


42:1-5 (a) 애가(1-4절) 하나님을 찾기에 갈급함, 하나님을 뵙기를 갈망함

어떠한 곤경에 처해있음 이전에 성전에 올라가 예배를 드리던 때에 대한 향수

(b) 후렴(5절) 현실극복에 대한 의지와 희망

2. 42:6-11 (a)’ 애가(6-10절) 현재의 곤경과 이전의 동행하시던 하나님을 기억함

하나님의 도우심을 갈망하며 계속 교제하고자 함

(b)’ 후렴(11절) 5절과 같은 후렴으로 되어있다.

이 시에서의 구조는 위의 것을 참조한다면 곤경에 처한 상황(1,3절)과 이전에 행했던 거룩한 날에 대한 예배를 회상(4절), 또는 지난날에 하나님이 동행하셨던 것을 기억하는 것 (6절) 과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자 하는 시편기자의 의지가 드러나 있다. 그리고 후렴이 동일하게 2번 반복되는 형태이다. 따라서 지난 날과 현재의 상황이 대조되고 있으며, 곤경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찾고 있는 것이다.

후렴은 이 시편 전체에 어떤 정적인 속성을 부여해 주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사실 후렴은 절망에서 확신으로 옮겨가는 통로를 제공해준다. 각각의 애가 다음에 나오는 후렴은 미래의 찬양의 가능성을 일깨워주는 역할을 한다.

이 시편은 이스라엘의 제의적 생활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예배에 대한 향수와 (4절) 미래에 성전 예배에 참여하리라는 희망(43:4)은 개인적인 애가가 비 제의적인 형식으로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다.


8. 사전적 자료

תַּעֲרֹג (1절) “갈급함같이” - 지독한 가뭄 때 하나님을 향하여 '헐떡거리는' 들짐승들을 묘사하는 데 사용되었다. (욜1:20)

לֵאלֹהִים לְאֵל חָי (2절) “생존하시는 하나님” – 하나님이 살아있는 인격체로서 모든 생명의 근원이며 기초임을 나타내는 것이지만 본문에서 하나님에 대한 갈망은 그 분의 성소에 대한 갈망으로 해석되기도 하는데 이는 다음 구절에 의해 더 지지를 받는다.


מָתַי אָבֹוא וְאֵרָאֶה פְּנֵי אֱלֹהִים (2절) 이 구절은 지성소 혹은 성소에 나아가게 됨을 묘사할 때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표현이다(출23:17) 하지만 이러한 의미는 “하나님의 면전에서”와 같은 식으로 표현되어 있지 않지만 본 대목을 지성소에서의 갈망이 있는 구절로 보는 근거는 여기에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갈망이 분명한 형태로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אַיֵּה אֱלֹהֶיךָ׃ (3절) -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이 조소적인 질문은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대적들의 입술에서 자주 발견된다 (시79:10; 115:2; 욜2:17; 미7:10).

그 대적들이 이러한 질문을 던지게 된 배후에는 그의 하나님은 어디에도 계시지 않고 설령 계시다 해도 힘이 없거나 사람들의 고통에 무관심한 분이라는 어리석은 지식이 전제되어 있었을 것이다.


הָיְתָה־לִּי דִמְעָתִי לֶחֶם יֹוםָם וָלָיְלָה (3절) -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이를 직역하면 ‘눈물이 나의 빵이 되었다’이다. 즉 시편기자의 눈물이 그에게 있어서 매일의 식사처럼 날마다 취하는 몫이 되었다는 것이다.(시80:5 ; 102:9 : 욥3:2) 이 같은 표현이 지니는 강조점은 눈물을 흘렸다는 것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없다는 조롱에 대해서 심한 고통의 마음을 가졌다는 것을 나타낸다.

눈물을 매일의 식사로 취했다는 이 구절을 시편 저자의 심한 비통과 고통의 상태를 과장적으로 묘사하는 이중적 어법의 구절로 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시80:5)

הָמֹון חֹוג (4절)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는 ‘호게그’ 로, 뜻은 ‘원 안에서 돌다’, ‘성스럽게 행진하다’. ‘춤추다’ 등이다. 즉 이것은 춤추면서 축제를 즐기고 성일을 축하하는 행위를 가리키는 말이다. (출5:1 ; 레23:41) 또한 무리의 의미는 군대와 같이 ‘소란하고 시끄러운 소리를 내는 군중’을 지칭하는 말로 (삿4:7 ; 왕상8:41) 즉 이 구절은 시편기자가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모인 무리와 함께 예배를 드렸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בְּקֹול־רִנָּה וְתֹודָה (4절) – 기쁨과 찬송의 소리의 문자적 뜻은 ‘큰 노래의 소리와 감사함’이다 이는 순례자의 행렬이 모든 음악과 노래를 돕는 수단을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향하곤 했던 사실을 나타내고 있다. (삼하6:5)


אֵלֶּה אֶזְכְּרָה וְאֶשְׁפְּכָה (4절)-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 시편기자가 많은 무리와 함께 과거에 경험하였던, 그들을 인도하여 하나님의 전 예루살렘에 올라가 그들과 함께 기도하며 온갖 악기로 하나님을 찬양, 예배하고 감사하였던 사실을 가리킨다. 바로 그와 갈은 기억은 낙담 가운데 있던 당시의 시편 기자에게 큰 위로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기와 함께 찬양했던 무리들이 이제는 그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하나님이 어디있느냐는 말로 조롱하는 서슴지 않는 현실 속에서 그는 마음이 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מַה־תִּשְׁתֹּוחֲחִי (5절)-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여기에서 저자는 두 부분으로 나누어 자신을 드러내고 있다. 영과 육, 고등한 본성과 저등한 본성, 즉 신앙으로부터 온 믿음의 마음과 불신의 상태 사이의 갈등을 보여주고 있다.

אֹודֶנּוּ יְשׁוּעֹות פָּנָיו׃그 얼굴의 도우심- 문자적인 뜻은 ‘그의 얼굴의 구원들’이다. 예슈오트는 하나님의 구원사역이 절대적으로 완벽함을 암시하는 표현이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어떤 사람에게 그의 값없는 은혜를 베푸심을 나타낼 때 '얼굴의 빛을 비추인다'는 식으로 표현하는데 여기의 '얼굴'은 바로 그런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4:6 ; 21:6 ; 44:3 ; 89:15). 그 얼굴의 도우심이란 표현은 하나님께서 낙망과 슬픔 가운데 있는 자신에게 값없는 은혜를 베푸셔서 그를 슬픔과 역경으로부터 구원하시되 완벽하게 해내실 것을 확실히 기대하는 저자의 믿음이 담겨져 있는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단어연구들을 통해서 말로 표현치 못할 고난의 상황과 이에 대한 사람들의 조롱과 핍박 등 힘든 고난을 겪음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갈망하는 시편기자의 부르짖음이 중요함을 인식하게 된다. 우리 인간은 잘 알 수 없는 부분까지 하나님께서는 알고 계시며 설령 우리를 힘든 고난의 순간에 혼자 두시는 것 같은 그 순간에도 우리를 지켜보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항상 신뢰하며 예배해야 한다.


9. 성경간의 상호관계


시편42:1-5의 상호관계

시42:1-----→시84:10 (하나님에 대한 사모)

시42:2-----→사26:8 (영혼의 갈망, 사모함)

시42:3 ----→ 고전4:9; 고전4:13; 욥2:9 (구경거리, 조롱, 만물의 찌꺼기)

시42:5-----→창18:14; 렘32:27; 눅1:37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음)

본문의 시편저자는 1절에서 하나님을 찾는 것을 사슴이 시냇물을 찾는 것에 빗대어서 갈급히 하나님을 찾고 있다. 어떠한 상황인지는 아직 모르나, 1절에서는 하나님을 사슴이 시냇물을 찾는 동안 헐떡이듯이 급하게 찾고 있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을 무엇보다도 신뢰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가장 먼저 찾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2절에서는 ‘영혼이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한다’고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는 ‘하나님’이 두 번 나오기 때문에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고, ‘갈급’에서 갈망으로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시편 기자는 예배에서의 하나님을 뵙기를 간절히 바라고, 사모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은 3절에서의 시편기자의 상황을 보여주면서 그가 곤경에 처해 있는 순간에 하나님 뵙기를 갈망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의 처지를 비방하는 것 때문에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조롱하고 비방하는 행위 때문에 슬피 울고 있다. 이 슬픔은 4절로 가면서 이전에 무리와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던 시기를 회상하면서 슬픔을 이겨보고자 노력하나, 현재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송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기 때문에 시편기자는 한편으로 마음이 상하고 있는 상태에 있다. 그러면서 그는 5절에서 자신의 영혼에게 하나님을 바라고 소망함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으로 현재의 상황과 낙심을 이겨보고자 애쓰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는 표현에는 하나님께서 그의 얼굴의 도우심으로 자신을 곤경과 처지에서 건져내실 것이라는 시편기자의 강한 확신과 믿음이 담겨져 있다고 볼 수 있다.


10. 신학


본문의 시편기자는 하나님을 사모하고 있다. 그 이유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이 제일 가는 기쁨이기 때문이다. 그 기쁨을 표현하기란 쉽지 않다. 웨스트민스터 대,소요리문답 제1문은 인간의 제일 되는 목적이 바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라 하였는데, 바로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 이에 해당하는 기쁨이라고 말할 수 있다. 본문의 시편기자는 이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1절에서 가장 먼저 영혼이 하나님을 갈급히 찾고 있었던 것이다. 이 ‘갈급’은 가뭄 때 짐승들이 헐떡거리는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2절에서는 하나님을 ‘생존하는 분’으로 묘사되어 있는데, 이는 말 그대로 살아계신 참 하나님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지만,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성소를 나타내는 데 더 적합하다.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는 곧 내가 언제 하나님의 성소로 나아가 그를 뵈올 수 있을까 라는 뜻인 것이다. 3절의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라고 주위 사람들이 조롱을 할 때 그는 자신의 힘이 되시고 가장 완전하시고 무한하신 하나님이 그런 비방의 대상이 되시는 것을 슬퍼하며 과거에 경험한 은혜의 때를 회상하며 (4절) 다시 은혜 받기를 하나님 앞에서 사모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시편기자는 현재는 과거와 달리 은혜를 받을 수 없기 때문에 과거를 기억하고 슬퍼하고 있다. 그렇기에 5절에서 시편기자는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불안해하느냐” 라고 자문하고 있다. 이는 그의 고등한 본성인 영혼과 저등한 본성인 육체가 현재 갈등하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그는 고통스러워하고 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시편기자는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이다. 5절의 “그 얼굴의 도우심”이란 표현은 하나님께서 낙망과 슬픔 가운데 있는 자신에게 값없는 은혜를 베푸셔서 그를 슬픔과 역경으로부터 구원하시되 완벽하게 해내실 것을 의심치 않는 의지를 나타내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얼굴을 들어 낙심한 영혼들을 구원하시고 다시 그의 값없는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시다.


이 본문과 유사한 욥13:15에 나타난 욥의 하나님을 사모하는 태도에서도 하나님을 갈급해하고 갈망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는 시편기자처럼 심한 환난 중에 있을 때, 그의 아내조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욥2:9) 하나님께 은혜를 받고자 계속 나아갔다. 따라서 인간의 본분은 하나님을 사모하고 즐거워하는 것이다. (4절 상반부) 설령 환난 중에 있더라도(3절) 하나님은 과거부터 지금까지 나를 지켜보고 계시고 어려운 순간에도 함께 하고 계시다는 ‘믿음’과 그를 사모하는 것(4-5절)만이 그의 피조물인 신자가 이 세상에서 지녀야 할 태도이다.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 하나님을 ‘의존’하도록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다.

 

11. 이차적인 문헌들


1 a. 이 시편은 표제가 “고라 자손의 마스길”이라고 적혀있다. 즉 이것은 얼핏보면 저자가 고라자손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칼빈은 이를 다윗이 지은 시를 고라자손이 맡아 보관하였다는 의미로 보고 있다.[4] 필자도 이에 동의한다.

5 a. 다후드는 MT의 에다덤을 나다드로부터 파생된 것으로 해석하는데 이는 우가릿어에 근거하여 주장을 한 것이다. 이는 UT 76 ⅱ.17-18과 UT 51, ⅲ. 11-12에서 ydd형을 인용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우가릿어 ydd의 어근형태에 문제가 있다는 약점이 있기 때문에 동의하지 않는다. 깁슨은 이를 dwd(일어섰다)로 해석하지만 이를 ndd로 인정할 경우, “서두르다”, “달리다”를 의미한다는 문제가 있다. (아라비아어의 nadda)[5]


12. 적용


예상치 못한 환난에도 영적인 갈망마저 놓지 말고 우리의 인도자시며 피난처가 되시는 하나님을 사모합시다. 특히 주위 사람들의 말, “하나님이 버린 것” 이라거나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더라도 거기에 빠져 낙심하지 말고 우리의 믿음의 선조들이 그런 것처럼 (욥13:15; 창32:26)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합시다. 주님이 나의 주인되시고 내 자신의 중심을 이루어 어떤 한난 중에도 우리가 즐거워하고 인내와 연단으로 소망을 이루는 삶 (롬5:3) 을 살아갈 수 있도록, 오르지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존할 수 있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세를 무엇보다도 우선시 하는 자세를 지닙시다.


참고문헌

박윤선, 『박윤선주석:시편』, 영음사, 1994.

Thompson, 『톰슨Ⅱ 주석성경』, 기독지혜사, 2011.

P. C. Craigie, 『시편:WBC』, 솔로몬, 2000.

[1] 박윤선, 『박윤선 주석:시편』, 396.

[2] Thompson, 『톰슨Ⅱ 주석성경』, 831.

[3] 박윤선, 앞의 책, 396.

[4] 위와 같음.

[5] P. C. Craigie, 『시편:WBC』, 4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