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복음 著 이충환 (Richard C. LEE 기독인문학연구원 연구생)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

-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복음 레슬리 뉴비긴 著-

 이충환(Richard C. LEE 기독인문학연구원 연구생) 

 

우리는 다원주의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다. 저자에 따르면 다원주의는 크게 ‘문화적 다원주의’와 ‘종교적 다원주의’로 나눌 수 있다. 전자가 한 사회 안에 있는 다양한 문화와 생활 방식이 인간이 삶에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보는 견해라면, 후자는 종교 간의 차이를 동일한 진리에 대한 인식에서 찾을 수 있다고 보는 견해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그릇된 성격을 지니고 있으며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를 하는 것과 같다.

 

그 이유는 첫째로, 한 사회에 있는 다양한 방식이 진정 인간의 삶에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면, 다문화 가정에서 벌어지는 부부간의 다툼, 심하게는 학대와 고통은 어떻게 있을 수 있으며, 대표적으로 다양한 문화가 한 곳에 모여 있는 미국의 뉴옥 같은 도시에서는 해마다 총기난사로 인해 많은 흑인들이 사망하는 사건이 자주 발생하는데, 이러한 현상들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가? 둘째로, 세계에는 다양한 종교가 존재하고 있다. 이것은 ‘당연한 사실’이다. 그런데 앞서 언급한대로 종교가 동일한 진리에 대한 인식의 차이에서 기인한다는 종교적 다원주의의 주장이 참이라면 다양한 종교가 동일한 진리를 표방하고 있다는 것이 되며, 종교의 차이는 단지 ‘인식의 차이’에서 기인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불교와 기독교를 비교해보면, 불교는 윤회사상(순환론)를 표방하면서 마음을 비우는 삶(무소유)을 추구할 것을 권면하는데 비해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적 사랑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말한다. 이것은 동일한 진리라고 볼 수 없으며, 인식에 따른 차이라고 할 수도 없다. 그렇다면 다원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어떻게 복음을 인식해야 하는가? 이에 대해 저자는 조심스레 자신의 독자에게 속삭이고 있다. 그는 가장 먼저 ‘사실’과 ‘가치’에 대한 명확한 정의를 내리고 있다. 전자가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어떠한 것’을 뜻한다면 후자는 ‘우리가 선택한 것’을 의미한다. 조금 더 쉽게 말하면 전자에 대해서는 모두가 동의하고 의심을 하지 않지만 후자의 경우를 예로 들어본다면 가령, 누군가가 특정 종교를 다른 사람에게 포교하거나 믿을 것을 권한다면, 그 사람은 고소를 당할 수 있고 심하면 재판까지 회부될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이 발생하는 이유는 ‘타당성의 구조’에 기인한다. 타당성의 구조란, 쉽게 말하면 ‘어떠한 개념이 사회적으로 과연 타당하다고 볼 수 있는지 규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18세기 이전까지 기독교는 타당성의 구조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었고, 철학자들과 과학자들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학문적인 접근을 시도했다. 그리고 이것은 사회적으로 ‘당연하게’ 여겨졌다. 다시 말해, 기독교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너무 당연한 하나의 사실’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그러나 18세기 계몽주의와 합리주의가 등장하기 시작하면서 기독교는 타당성의 구조의 중심에서 주변적 요소로 전락하고 말았다. 바로 이러한 새로운 국면에서 우리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가? 이를 알기 위해서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 사회를 이해하는 것이 무엇보다 가장 중요하다.

 

현대 사회는 먼저 말한 것처럼 다원주의 사회를 이루고 있고, 이 다원주의 사회를 대부분의 사람들은 누구에게나 관용적인 성격을 지닌 것으로 이해한다. 이러한 인식은 과학적인 사고방식을 중심으로 한 근대적 접근방식에 따른 것이며 이는 곧 ‘나’와 ‘개인주의’를 중시하는 경향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당연히 복음을 전도하는 것이 이전과는 다르게 매우 힘들고 어려울 수밖에 없다. 안 그래도 쉽지 않은 상황인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제작년에 발생한 코로나 19는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활동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이것 뿐만이 아니라 교회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날이 갈수록 커지면서 교회는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고 있다. 이렇게 내*외적으로 힘든 상황에서 교회는 과연 무엇을 해야하는가?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복음을 어떻게 전해야 하는가? 이를 다루기 전에 먼저 복음에 대해서 말해보고자 한다. 복음은 무엇인가? 복음은 기독교의 정체성이다. 복음을 모르면 기독교의 본질을 모르는 것이고 기독교의 본질을 모르는 것은 곧 기독교를 모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전도를 하는 이유는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이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해서 마지막 날 심판에 처하는 사실이 너무나 안타깝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그리스도인이 된 것이 매우 감사해서,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권리를 얻게 되었다는 것이 너무나 감격스러워 주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더욱 열심히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복음은 그리스도인들의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더불어 복음은 성경의 권위로부터 나오는 것이기도 하다. 성경이 오류가 없는,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확신은 우리의 믿음으로부터 나온다. 그런데 이 믿음에 대해 현대 불신자들은 아마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너가 하나님을 볼 수도 없는데 어떻게 성경을 믿을 수 있냐?” 또는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혀서 돌아가셨는데 어떻게 다시 살아날 수 있냐?” 이러한 질문에 답하기 전에 먼저 나는 한 가지 오류를 밝히고 싶다. 성경의 권위를 믿는 것, 그리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우리가 현재 가능한 기본적인 도구나 태도로 그것에 대해 온전히 알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쉽게 말해, 우리의 인식을 뛰어넘는 것으로 가능하다는 의미이며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계시를 통해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과 성경을 바로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계시는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통용되는 것들과 상충되지는 않을까? 저자는 ‘전통과 이성은 따로 존재하거나 대치되는 것이 아니라 상호관계를 이루고 있다고 주장한다. 어느 한쪽만 강조하거나, 다른 한쪽은 배제하고 말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보았을 때 사회적으로 불가능한 구조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 저자의 견해이다. 또한 이러한 전통은 혼자 가능하지 않으며, 공동체를 이루어 형성된 구조를 이루고 있다고 본다.

 

예를 들어 어느 과학자의 이론이 하나의 정설로 학계에 받아들여지고 있다면, 그것은 다른 과학자들로부터 받아들여졌다는 말이 되고 더 나아가 학회나 세미나를 통해서도 여러 권위자들로부터 인정을 받았다는 말이 되기 때문에 이것은 단순한 정립된 진리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한 공동체에서 인정을 받은 이론‘이 되는 것이다. 성경에서도 공동체를 통해 전통이 형성되었다는 찾아볼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열 두 제자를 택하셨고, 승천하실 때에는 성령을 통해 그들로 하여금 주님의 복음을 전파하도록 힘쓰기를 원하셨다. 그 이후에는 초대교회 성도들이 사도로부터 받은 믿음의 유산들을 이어나가려고 애썼다. 이 때문에 우리는 사회적으로 이성과 전통이 따로따로 갈 수 없으며 공동체적 요소를 지니고 계승되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사역자들은 이에 입각해서 한국사회와 한국교회에도 여전히 동일하게 복음을 전파할 소명을 가져야 할 것이다.

 

이전과 비교해 보았을 때 한국사회는 더욱 각박해졌으며, 이러한 모습은 1890년대 사회적으로 소외된 여성들이 주를 이루어 전도를 하고 사경회를 이끌어가는 등 성숙한 신앙인으로서의 모습을 몸소 보여주었던 ’전도부인들‘의 모습과 매우 대조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는 첫째, 1890년에는 복음이 우리에게 들어온지 얼마 안된 시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특히 사회적으로 소외된 계층들) 복음을 의심없이 순수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둘째, 대원군의 쇄국정책으로 외국에 대한 인식이 많이 부족했고, 이는 우리의 내부의 문제에만 깊은 관심을 기울이게 되는 요인이 되었다. 셋째, 다른 국가에서 벌어지는 일에 관심이 없고 벽만 쌓다보니 당연히 근대 유럽의 계몽주의와 합리주의의 물결이 조선에 영향을 줄 수 없었고, 결국 이러한 상황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간의 권리에 대해, 이성과 종교의 관계에 대해 잘 알지는 못했다. 결국 이러한 단점이자 장점인 요소 덕분에 1890년대의 조선은 복음을 전하는 일에 대해 누구보다 뜨거운 사람들이 많았고, 이러한 복음에 대한 열정이 1904년 평향 부흥운동이 발흥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이렇듯 복음은 뜨거움으로 전해야 한다. 만일 복음을 전하는 사역자가 열정 없이, 에수 그리스도가 나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셨다는 은혜에 대한 기쁨 없이 복음을 전한다면 그는 자신이 복음의 본질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제부터는 역사적인 입장에서 복음을 다루어보고자 한다. 역사란 보편적 의미로 인간이 살아온 것들에 대한 기록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배우는 역사는 저자에 따르면 대부분 국가사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자기가 속한 민족과 국가가 어떻게 생겨났고, 어떠한 과정을 거쳐 현재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배우는 것이다.

 

보편적인 역사가 국가사를 다룬다고 하다면 기독교 역사는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한다. 우리가 가장 잘 아는 창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하나님이 가장 먼저 행하신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이방인들이나 모두 하나님의 자녀로 삼고자 작정하셨다. 따라서 이렇게 보면 기독교적 역사는 세상의 국가사보다 더 고차원적이고 포괄적인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세상사가 단지 인간의 탄생과 현재까지의 과정만을 다루고 있다면 기독교적 역사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크신 계획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의 은혜, 그리고 성령님의 함께하심에 초월적인 성격을 지니는 사건들이 적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알고자 기독교적 역사를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초점을 두고 나의 정체성을 하나님으로부터 끊임없이 찾고자 노력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서, 그리고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와 제자들을 통해서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형성해가는 것에 대해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있다.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각기 개개인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형성하려고 강요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로, 한 공동체로서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것을 수많은 이야기와 말씀을 통해 보여주고 계시다. 우리가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것은 이 천 년전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도 포함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이전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존재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분의 작정과 뜻 역시 동일하게 계속 지속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한 가지 질문을 만나게 된다.

 

‘다원주의 사회에서 복음을 어떻게 전할 것인가?’ 이에 대한 대답은 저자가 말한 것처럼 자신감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복음은 자신감 있게 전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 속에는 생명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복음이 지닌 생명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을 변화시키며 그 변화는 (기쁨, 감사함 전인격적 변화 등) 오직 복음으로만 설명될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두 가지를 주의해야 한다. 첫째로, 복음을 전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어느 정도의 다원성은 존중하되 다원주의, 정확하게 말하자면 다원주의 이데올로기는 거부해야 한다. 왜냐하면 주님을 믿기로 시인한 사람들이 각자 다양한 문화와 생활을 지니고 있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특정한 신념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는 주관적인 견해는 상당히 위험하며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어떠한 진리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다는 것은 곧 어떠한 궁국적인 존재, 즉 절대자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18세기 합리주의가 발흥할 때까지 철학자들은 나름대로의 철학적 명제들로 이 세상이 어떻게 생겨났고 어떠한 원리로 돌아가는지 설명하고자 노력했다. 물론 다 완벽하지는 못했으나 그 중에서 가장 잘 인식한 것이 한 가지 있다. ‘목적론적 명제’라고 불리는 것이 그것이다. 이 명제(또는 논의)에 따르면, 이 세상은 어떠한 목적이 반드시 있고 그 목적은 어떠한 궁극적인 존재가 반드시 존재한다는 것을 근거로 하는 것이다. 따라서 다원주의의 물결이 어느 때보다 강력한 현대에 복음을 전하는 그리스도인들은 확신과 자신감을 가지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해야 한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사명이요, 복음이 존재하는 목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