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이유로 자국어로 번역된 성경, 제임스 왕 성경"
이강선 교수(기독인문학연구원 연구위원, 성균관대 번역대학원)
빅토르 위고(Victor Hugo)는 “잉글랜드에는 두 권의 책, 곧 성경과 셰익 스피어를 갖고 있다.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는 잉글랜드가 낳 은 작가지만, 성경은 잉글랜드를 형성했다.”라고 말했다. 이 책들은 영국 의 두 기둥으로 여겨진다. 그만큼 영향력이 크다는 말로 이해된다. 시대상 으로 따지면 영어로 번역된 성경이 먼저다. 그러므로 이 표현은 성경이 잉 글랜드를 만들었기에 잉글랜드에서 셰익스피어가 나왔다고 읽히는 것으 로, 성경이 얼마나 큰 영향을 주었는지를 보여준다. 그런가 하면 영국인은 어디에 가든지 제임스 왕 성경을 가져간다고 할 정도로 영국인에게 끼친 영향이 크다. 곧 나라의 정체성, 문학, 역사에 큰 영향을 끼친 것인데, ‘어 디에 가든지’라는 표현에는 물론 미국도 포함된다. 미국에 간 청교도들이 가져간 성경이 바로 제임스 왕 성경이었던 것이다. 한편으로 한반도에 가 장 먼저 들어온 성경도 제임스 왕 성경이었다.
제임스 왕 성경은 여러 가지 면에서 다른 영어 번역 성경과 구별된다. 지 난 회까지 다루어온 중세 이후 번역은 순수하게 종교적 열정으로 이루어 진 자국으로의 성경 번역이었다.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와 윌리엄 틴데일(William Tyndale)이 그러했고, 종교개혁을 불러온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도 그러했다. 그들은 성경의 권위를 믿는 한편 모든 사람이 성경을 읽을 권리가 있다고 믿었다. 중재자 없이 개인이 직접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주장했고, 성경은 그 자체로 명확하며, 모든 이가 이해할 수 있다고 여겼던 것이다. 틴데일이 “쟁기질하는 소년도 성경을 알 게 하겠다.”라고 했던 것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나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하겠다는 의미였으며 한편으로 성직자들의 독점적 해석에서 벗어 나, 개인의 종교적 자유를 증진하고자 했다. 자국어로의 성경 번역은 결과 적으로 일반 대중이 성경을 읽게 됨으로써 영적인 깨어남을 의미했고 지적 계몽을 의미하기도 했다.
이처럼 근대의 자국어로의 성경 번역과정에서 번역자들이 순수한 종교 적 열정에서 성경을 자국어로 번역했고 그 과정에서 교회의 핍박을 받았 다면 제임스 왕 성경은 달랐다. 왕이 인가했다는 의미에서 ‘흠정 성서’라 고 불리는 제임스 왕 성경은 말 그대로 왕의 명령으로 영어로 번역된 성경 이다. 제임스 왕은 왜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라고 명령했을까? 여기에는 종교적 이유뿐 아니라 정치적 이유가 있다.
제임스 1세는 스코틀랜드 출신으로 잉글랜드 왕이 되기 전에는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였다. 엘리자베스 1세는 튜더 왕조의 마지막 군주로 후 계자를 지정하지 않은 채로 1603년 사망했다. 의회는 가장 가까운 친척을 찾았고 그가 바로 스코틀랜 드의 제임스 6세였다. 두 사람은 6촌간이었다. 제임 스 6세는 잉글랜드 의회의 선택에 따라 잉글랜드의 왕위에 올랐고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는 병합되었 으며, 그는 제임스 1세로 스튜어트 왕조를 열었다.
당시 잉글랜드의 국왕은 아일랜드의 왕을 겸하고 있었으므로, 제임스 1세의 잉글랜드 국왕 즉위는 스코틀랜드, 잉글랜드, 아일랜드 세 나라가 병합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잉글랜드 의회가 제임스 1세를 옹립하기는 했지만 왕의 종교마저 받아 들인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제임스 1세는 왕권 신수권자였으므로 의회와 국왕의 협치로 나라를 꾸려나가는 잉글랜드의 정치 체제와도 맞지 않았다. 이처럼 세 나라가 병합된 17세기 초 영국의 종교적 상황은 매우 복잡하고 다양했다. 헨리 8세의 종교개혁 이후 영국 국교회가 공식 종교가 되었지만, 개신교도로 청교도가 있었고, 탄압받기는 했지만 여전히 상당수의 가톨릭 신자들이 존재했다. 제임스 1세의 어머니가 가톨릭 신자였으므로 일부 가 톨릭 신자들은 제임스 1세에 대한 기대가 컸다. 그들의 기대에 걸맞게 즉위 초기 제임스 1세는 가톨릭 신자들에 대한 관용적인 정책을 펼쳤다.
이러한 제임스 1세의 가톨릭 관용 정책을 완전히 뒤바꾼 사건이 있었다. 바로 가이 포크스(Guy Fawkes)의 화약 음모단 사건이다. 가톨릭 신자였던 가이 포크스와 음모단은 제임스 1세를 제거하고 가톨릭 왕정을 복원하려 했 다. 하지만 이 음모는 미리 발각되었고, 음모단원들 은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가이 포크스는 주모자가 아니었지만, 이 음모의 대표적인 인물이 되었다. 불 행하게도, 그는 현장에서 적발되어 첫 번째로 체포 되었으며, 런던 타워로 이송된 후 가장 마지막으로 처형되었다. 이후 400년이 넘었지만 가이 포크스의 이미지는 여전히 반역의 상⑨으로 남아 있으며 전 세계자의 시위자들은 사진과 같은 가면을 쓰고 시위를 하곤 한다.
이 사건은 제임스 1세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자신을 향한 살해 음모는 왕권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었으며, 가톨릭 신자들에 대한 불신을 더욱 증 폭시켰다. 이는 이후 영국에서 가톨릭에 대한 탄압이 더욱 강화되는 계기 가 되었다. 이 사건을 통해 제임스 1세는 종교적 통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를 깨달았다. 그는 국교회를 강화하고 가톨릭을 탄압함으로써 종교적 통 일을 이루려고 노력했다. 한편으로 왕은 장로교와 청교도들을 ‘해충’이라 고 불렀고, 그들의 독립적인 입장을 증오했다. 왕권 신수권자로서 그는 왕 권을 강화하려 했고 결국 내전으로 이어지는 불씨가 되었다. 그가 영국 국 교회를 강화한 것은 국교회에서는 교회와 국가의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 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청교도는 교회를 국가로부터 분리하려고 했다.
한편으로 장로교는 교회의 권위를 장로회에 두고, 왕의 권위를 제한하려 는 경향으로 인해 절대 왕권 주장과 직접적으로 충돌했다. 장로 교인들은 교회 개혁을 요구하며 왕의 권위에 도전했다. 제임스 1세는 이들의 도전 을 권력에 대한 위협으로 인식했다. 제임스 1세는 이미 스코틀랜드에서 장 로교의 강력한 저항을 경험한 적이 있었다. 이 불편한 경험은 제임스 1세 에게 장로교에 대한 강한 반감을 심어주었다.
이처럼 종교적, 정치적으로 갈등이 고조되는 가운데, 1604년 1월 제임스 1세는 햄프턴 궁전에서 회의를 소집했다. 소집 당시 제임스 1세가 성경 번역을 하고자 했던 것은 아니다. 그가 내세운 안건은 교회 문제와 관련해 몇 가지 중요한 사항에 대한 개혁이었다. 이때 청교도 대표로 참석한 존 레이놀즈가 새로운 성경 번역을 제안했고 제임스 1세는 동의했다. 그는 자신의 지시로 영어 성경이 출판되면 백성의 충성심이 자신을 향하고 한 편으로 영적 지도자로서 이미지를 강화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다.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고자 했던 그의 의도에는 순수한 종교적 열정도 있었을 테지만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려는 의도가 강했던 것이다.
제임스 1세는 대규모의 번역위원회를 꾸렸다. 그는 54명을 임명했지만, 실질적으로 47명의 학자들이 성경 번역에 참가했다. 이들은 한 명을 제외 한 위원들이 모두 영국 국교회 성직자로서 옥스퍼드 대학과 캠브리지, 웨 스트민스터에 각각 두 개의 위원회를 꾸려 총 여섯 개의 위원회에서 일했 다. 또한 제임스 1세는 자신의 재위 기간 내에 새로운 영어 성경을 출판하 고 싶어 했다.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왕은 기존 번역본들을 참고하라는 명 령을 내렸다. 물론 단순한 시간 절약만이 이유는 아니었다. 왕이 따르라고 명시한 성경에는 ‘주교 성경’이 있었다. 이 주교 성경은 ‘대성경’을 따랐고 대성경은 커버데일(Coverdale)이 ‘매튜 성경’을 개정한 것이었고 매튜 성 경은 ‘틴데일 성경’을 포함하고 있었다. 달리 말해 왕은 기존의 번역본들 을 참고하라는 지침을 주었는데 이 성경들은 이미 오랜 시간 동안 검증되 고 수정되어 온 것들이었다.
더욱이 제임스 1세는 영국 국교회의 정체성을 강화하고 싶어했다. 기존의 번역본들을 참고하여 새로운 번역본을 만들면, 영국 교회의 역사와 전통을 계승하고, 교회의 권위를 강화하는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이미 많은 사람에게 알려진 기존 번역본의 표현을 사용하면 새로운 번역본을 더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이는 새로운 번역본의 저항을 줄이고, 성경의 대중화에 기여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다양한 번역본을 참고함으로써, 단순히 한 가지 해석만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해석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더 풍부한 번역을 만들 수 있었다.
즉, 제임스 1세가 기존 번역본을 참고하도록 한 것은 시간 절약과 영국교회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함이었다. 이러한 노력은 ‘제임스 왕 성경’이 오랫동안 영어권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성경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일은 그 역시 작가이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제임스 1세는 『악마론』(1597), 『자유 군주제의 참된 법률』(1598), 『왕권 에 대한 조언』(1599)과 같은 여러 작품을 저술하기도 했다. 그의 치하에서 잉글랜드는 번영하였는데, 윌리엄 셰익스피어( William Shakespeare), 존 던(John Donne), 벤 존슨(Ben Jonson), 프란시스 베이컨(Francis Bacon)과 같은 걸출한 작가들이 나타났던 것이다.
제임스 왕 성경 번역 위원회에는 47명의 학자들이 참여했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이 성경은 틴데일이 번역한 성경과 상당히 유사하다. 혹자는 약 70%를 가져왔다고 하는데, 이는 그만큼 틴데일의 번역이 제임스 왕 성경 에 미친 영향력이 크다는 의미다. 제임스 왕 성경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용되고 있는데 그것은 이 성경이 문학적으로 매우 아름다운 표현으로 번역되어 있기 때문이다. 셰익스피어를 비롯한 많은 영문학 작가들이 킹 제임스 성경의 문체를 인용하고 영감을 얻었다. 제임스 왕 성경이 영어권 세계에서 오랫동안 가장 권위 있는 성경으로 자리매김한 것은 이처럼 다양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2024. 12. 02.
출처: 교회성장연구소(portal.icg21.com/board/board.php?bbs_id=humanities&ptype=view&kbbs_doc_num=106)
"정치적 이유로 자국어로 번역된 성경, 제임스 왕 성경"
이강선 교수(기독인문학연구원 연구위원, 성균관대 번역대학원)
빅토르 위고(Victor Hugo)는 “잉글랜드에는 두 권의 책, 곧 성경과 셰익 스피어를 갖고 있다.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는 잉글랜드가 낳 은 작가지만, 성경은 잉글랜드를 형성했다.”라고 말했다. 이 책들은 영국 의 두 기둥으로 여겨진다. 그만큼 영향력이 크다는 말로 이해된다. 시대상 으로 따지면 영어로 번역된 성경이 먼저다. 그러므로 이 표현은 성경이 잉 글랜드를 만들었기에 잉글랜드에서 셰익스피어가 나왔다고 읽히는 것으 로, 성경이 얼마나 큰 영향을 주었는지를 보여준다. 그런가 하면 영국인은 어디에 가든지 제임스 왕 성경을 가져간다고 할 정도로 영국인에게 끼친 영향이 크다. 곧 나라의 정체성, 문학, 역사에 큰 영향을 끼친 것인데, ‘어 디에 가든지’라는 표현에는 물론 미국도 포함된다. 미국에 간 청교도들이 가져간 성경이 바로 제임스 왕 성경이었던 것이다. 한편으로 한반도에 가 장 먼저 들어온 성경도 제임스 왕 성경이었다.
제임스 왕 성경은 여러 가지 면에서 다른 영어 번역 성경과 구별된다. 지 난 회까지 다루어온 중세 이후 번역은 순수하게 종교적 열정으로 이루어 진 자국으로의 성경 번역이었다.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와 윌리엄 틴데일(William Tyndale)이 그러했고, 종교개혁을 불러온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도 그러했다. 그들은 성경의 권위를 믿는 한편 모든 사람이 성경을 읽을 권리가 있다고 믿었다. 중재자 없이 개인이 직접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주장했고, 성경은 그 자체로 명확하며, 모든 이가 이해할 수 있다고 여겼던 것이다. 틴데일이 “쟁기질하는 소년도 성경을 알 게 하겠다.”라고 했던 것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나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하겠다는 의미였으며 한편으로 성직자들의 독점적 해석에서 벗어 나, 개인의 종교적 자유를 증진하고자 했다. 자국어로의 성경 번역은 결과 적으로 일반 대중이 성경을 읽게 됨으로써 영적인 깨어남을 의미했고 지적 계몽을 의미하기도 했다.
이처럼 근대의 자국어로의 성경 번역과정에서 번역자들이 순수한 종교 적 열정에서 성경을 자국어로 번역했고 그 과정에서 교회의 핍박을 받았 다면 제임스 왕 성경은 달랐다. 왕이 인가했다는 의미에서 ‘흠정 성서’라 고 불리는 제임스 왕 성경은 말 그대로 왕의 명령으로 영어로 번역된 성경 이다. 제임스 왕은 왜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라고 명령했을까? 여기에는 종교적 이유뿐 아니라 정치적 이유가 있다.
제임스 1세는 스코틀랜드 출신으로 잉글랜드 왕이 되기 전에는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였다. 엘리자베스 1세는 튜더 왕조의 마지막 군주로 후 계자를 지정하지 않은 채로 1603년 사망했다. 의회는 가장 가까운 친척을 찾았고 그가 바로 스코틀랜 드의 제임스 6세였다. 두 사람은 6촌간이었다. 제임 스 6세는 잉글랜드 의회의 선택에 따라 잉글랜드의 왕위에 올랐고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는 병합되었 으며, 그는 제임스 1세로 스튜어트 왕조를 열었다.
당시 잉글랜드의 국왕은 아일랜드의 왕을 겸하고 있었으므로, 제임스 1세의 잉글랜드 국왕 즉위는 스코틀랜드, 잉글랜드, 아일랜드 세 나라가 병합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잉글랜드 의회가 제임스 1세를 옹립하기는 했지만 왕의 종교마저 받아 들인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제임스 1세는 왕권 신수권자였으므로 의회와 국왕의 협치로 나라를 꾸려나가는 잉글랜드의 정치 체제와도 맞지 않았다. 이처럼 세 나라가 병합된 17세기 초 영국의 종교적 상황은 매우 복잡하고 다양했다. 헨리 8세의 종교개혁 이후 영국 국교회가 공식 종교가 되었지만, 개신교도로 청교도가 있었고, 탄압받기는 했지만 여전히 상당수의 가톨릭 신자들이 존재했다. 제임스 1세의 어머니가 가톨릭 신자였으므로 일부 가 톨릭 신자들은 제임스 1세에 대한 기대가 컸다. 그들의 기대에 걸맞게 즉위 초기 제임스 1세는 가톨릭 신자들에 대한 관용적인 정책을 펼쳤다.
이러한 제임스 1세의 가톨릭 관용 정책을 완전히 뒤바꾼 사건이 있었다. 바로 가이 포크스(Guy Fawkes)의 화약 음모단 사건이다. 가톨릭 신자였던 가이 포크스와 음모단은 제임스 1세를 제거하고 가톨릭 왕정을 복원하려 했 다. 하지만 이 음모는 미리 발각되었고, 음모단원들 은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가이 포크스는 주모자가 아니었지만, 이 음모의 대표적인 인물이 되었다. 불 행하게도, 그는 현장에서 적발되어 첫 번째로 체포 되었으며, 런던 타워로 이송된 후 가장 마지막으로 처형되었다. 이후 400년이 넘었지만 가이 포크스의 이미지는 여전히 반역의 상⑨으로 남아 있으며 전 세계자의 시위자들은 사진과 같은 가면을 쓰고 시위를 하곤 한다.
이 사건은 제임스 1세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자신을 향한 살해 음모는 왕권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었으며, 가톨릭 신자들에 대한 불신을 더욱 증 폭시켰다. 이는 이후 영국에서 가톨릭에 대한 탄압이 더욱 강화되는 계기 가 되었다. 이 사건을 통해 제임스 1세는 종교적 통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를 깨달았다. 그는 국교회를 강화하고 가톨릭을 탄압함으로써 종교적 통 일을 이루려고 노력했다. 한편으로 왕은 장로교와 청교도들을 ‘해충’이라 고 불렀고, 그들의 독립적인 입장을 증오했다. 왕권 신수권자로서 그는 왕 권을 강화하려 했고 결국 내전으로 이어지는 불씨가 되었다. 그가 영국 국 교회를 강화한 것은 국교회에서는 교회와 국가의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 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청교도는 교회를 국가로부터 분리하려고 했다.
한편으로 장로교는 교회의 권위를 장로회에 두고, 왕의 권위를 제한하려 는 경향으로 인해 절대 왕권 주장과 직접적으로 충돌했다. 장로 교인들은 교회 개혁을 요구하며 왕의 권위에 도전했다. 제임스 1세는 이들의 도전 을 권력에 대한 위협으로 인식했다. 제임스 1세는 이미 스코틀랜드에서 장 로교의 강력한 저항을 경험한 적이 있었다. 이 불편한 경험은 제임스 1세 에게 장로교에 대한 강한 반감을 심어주었다.
이처럼 종교적, 정치적으로 갈등이 고조되는 가운데, 1604년 1월 제임스 1세는 햄프턴 궁전에서 회의를 소집했다. 소집 당시 제임스 1세가 성경 번역을 하고자 했던 것은 아니다. 그가 내세운 안건은 교회 문제와 관련해 몇 가지 중요한 사항에 대한 개혁이었다. 이때 청교도 대표로 참석한 존 레이놀즈가 새로운 성경 번역을 제안했고 제임스 1세는 동의했다. 그는 자신의 지시로 영어 성경이 출판되면 백성의 충성심이 자신을 향하고 한 편으로 영적 지도자로서 이미지를 강화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다.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고자 했던 그의 의도에는 순수한 종교적 열정도 있었을 테지만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려는 의도가 강했던 것이다.
제임스 1세는 대규모의 번역위원회를 꾸렸다. 그는 54명을 임명했지만, 실질적으로 47명의 학자들이 성경 번역에 참가했다. 이들은 한 명을 제외 한 위원들이 모두 영국 국교회 성직자로서 옥스퍼드 대학과 캠브리지, 웨 스트민스터에 각각 두 개의 위원회를 꾸려 총 여섯 개의 위원회에서 일했 다. 또한 제임스 1세는 자신의 재위 기간 내에 새로운 영어 성경을 출판하 고 싶어 했다.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왕은 기존 번역본들을 참고하라는 명 령을 내렸다. 물론 단순한 시간 절약만이 이유는 아니었다. 왕이 따르라고 명시한 성경에는 ‘주교 성경’이 있었다. 이 주교 성경은 ‘대성경’을 따랐고 대성경은 커버데일(Coverdale)이 ‘매튜 성경’을 개정한 것이었고 매튜 성 경은 ‘틴데일 성경’을 포함하고 있었다. 달리 말해 왕은 기존의 번역본들 을 참고하라는 지침을 주었는데 이 성경들은 이미 오랜 시간 동안 검증되 고 수정되어 온 것들이었다.
더욱이 제임스 1세는 영국 국교회의 정체성을 강화하고 싶어했다. 기존의 번역본들을 참고하여 새로운 번역본을 만들면, 영국 교회의 역사와 전통을 계승하고, 교회의 권위를 강화하는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이미 많은 사람에게 알려진 기존 번역본의 표현을 사용하면 새로운 번역본을 더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이는 새로운 번역본의 저항을 줄이고, 성경의 대중화에 기여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다양한 번역본을 참고함으로써, 단순히 한 가지 해석만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해석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더 풍부한 번역을 만들 수 있었다.
즉, 제임스 1세가 기존 번역본을 참고하도록 한 것은 시간 절약과 영국교회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함이었다. 이러한 노력은 ‘제임스 왕 성경’이 오랫동안 영어권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성경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일은 그 역시 작가이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제임스 1세는 『악마론』(1597), 『자유 군주제의 참된 법률』(1598), 『왕권 에 대한 조언』(1599)과 같은 여러 작품을 저술하기도 했다. 그의 치하에서 잉글랜드는 번영하였는데, 윌리엄 셰익스피어( William Shakespeare), 존 던(John Donne), 벤 존슨(Ben Jonson), 프란시스 베이컨(Francis Bacon)과 같은 걸출한 작가들이 나타났던 것이다.
제임스 왕 성경 번역 위원회에는 47명의 학자들이 참여했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이 성경은 틴데일이 번역한 성경과 상당히 유사하다. 혹자는 약 70%를 가져왔다고 하는데, 이는 그만큼 틴데일의 번역이 제임스 왕 성경 에 미친 영향력이 크다는 의미다. 제임스 왕 성경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용되고 있는데 그것은 이 성경이 문학적으로 매우 아름다운 표현으로 번역되어 있기 때문이다. 셰익스피어를 비롯한 많은 영문학 작가들이 킹 제임스 성경의 문체를 인용하고 영감을 얻었다. 제임스 왕 성경이 영어권 세계에서 오랫동안 가장 권위 있는 성경으로 자리매김한 것은 이처럼 다양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2024. 12. 02.
출처: 교회성장연구소(portal.icg21.com/board/board.php?bbs_id=humanities&ptype=view&kbbs_doc_num=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