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윤국영/"예루살렘에서 다메섹 가는 길"/목회와 인문학


윤국영 박사(기독인문학연구원 상임연구위원)

예루살렘에서 다메섹 가는 길


종교의 활화산 예루살렘

오늘날 예루살렘은 세계 3대 유일신교에 매우 중요한 도시다. 유대교와 기독교의 최고 성지이자 이슬람의 3대 성지 중 하나인 예루살렘은 그 극 도의 종교적 열정이 긴장과 갈등으로 화하여 간헐적으로 용암을 내뿜는 활화산과 같다. 약 1천 년 전 그 화산은 거대한 대폭발을 일으켜 팔레스타 인은 2백여 년간 십자군 전쟁의 소용돌이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 여파는 이 지역의 지정학적, 문화적, 종교적 지형을 바꾸어놓았다.

그리고 그로부터 또 1천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 가면 로마 제국 통치 아래 놓인 팔레스타인의 풍경 이 나타난다. 화려한 성전, 드높은 종교적 자긍심, 지 중해 연안에 모래알같이 편만한 유대인 공동체, 그 리고 로마 제국의 철권 통치. 유대인 역사상 가장 찬 란하고도 암울했던 이때 유대인의 종교적 열정은 최고조에 달한다. 이 열정이 표출되는바, 유대 사가 요세푸스(Josephus)는 로 마가 통치하던 2차 성전 시대 말 유대교에 크게 3종파가 있었다고 전한다. 사두개인(Sadducees)은 성전을 중심으로 한 제사장 집단이다. 그 집단 의 실제 기원은 헬라 시대로부터 비롯되지만, 사두개인이라는 이름 자체는 다윗-솔로몬 시대 제사장 사독(Zadok)의 이름을 좇아 부른다. 모세오경의 제의와 율법 준수에 엄격하지만 동시에 헬라와 로마 문화에 열려 있 고 로마 통치에 동조적 입장이었다. 성전과 로마 제국을 등에 업고 예수 당대 정치적 사회적 최상위층을 형성했다. 이들은 예루살렘에서 엘리트 지역이었던 윗도시(Upper City)에 주로 거주했고 화려했던 이들의 생활 은 오늘날 유대인-아르메니안 구역 발굴을 통해 잘 드러나 있다.

반면 바리새인(Pharisees)은 일반 민중을 대상으로 포교 활동을 했다. 구전 율법을 모세 율법의 일부로 보아 중요시했고, 유대 일반 민중에게 율 법과 정결의 삶을 강조했다. 사두개인들은 성전 제의 의식에 치중했지만, 바리새인들은 학문과 토론에 치중하며 서민과 늘 접촉하는 삶을 살았기에 민중의 지지를 받았다. 예루살렘 지역에서는 제사장 계층의 강한 영향력 으로 바리새인들의 입지가 상대적으로 약했을 수도 있으나, 주 후 70년 성 전 파괴 이후 이들의 입지는 다른 종파들의 해체 수순과는 달리 유대 사회 에서 더욱 공고해지고 크게 발전하게 된다.

에세네파(Essenes)는 성전도 민중도 아닌, 자신들만의 수도자적 생활을 영위했던 집단이다. 가장 보수적으로 율법을 준수하며 임박한 종말을 준 비하였던 저들은 철저하게 공동체 지향적인 삶을 살았다. 인간 평등을 실 천하는 저들의 삶에서 이미 2천 년 전 노예제도가 부정되는 모습은 경탄 을 자아내게 한다. 유다 지역 곳곳에 있었다고 전해지는 저들의 집단 거주 지 풍경은 오늘날 키부츠 내 공동소유적 삶의 데자뷔일 듯하다. 그중에서 도 특히 쿰란, 엔게디 등 사해 서쪽 지역이 잘 알려져 있으며, 예루살렘 내 에도 에세네 집단 주거 구역이 따로 있었을 것이란 추측이 있다. 이 세 종교적 그룹 외에도 예수 당대 유대 사회의 영향력 있는 세력 중에 로마 저 항을 주요 목표로 삼는 열심당원(Zealot)이 있었다


종교적, 정치적, 민족적 열망이 뒤엉켜 있는 예수 당대의 유다 사회에서 그 구심점은 항상 예루살렘이었다. 하나님께 대한 열심이 서로 다른 모습 으로 타오르던 예수 당대 예루살렘. 왜 하나님의 아들은 이때 이 땅에 오 셨을까? 예수께서 하나님 아들의 권위로 자신을 드러내셨을 때 유대인의 반응은 요동쳤다. 수많은 기적과 전혀 새로운 지혜와 권위의 말씀으로 종 교 지도자들을 압도하는 예수. 그를 바라보는 각 종파와 세력의 시각은 어 떠했을까? 최고회의 산헤드린에서 사두개인, 바리새인 및 여타 유대 지도 자의 심문 가운데 예수께서 묵묵히 택하신 길은 십자가였다.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 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눅 13:33)


바리새인 사울

현대 이스라엘 국가 건설 시 팔레스타인 땅에는 수세대 이상을 그 땅에 살았던 토착 유대인과 이제 막 해외에서 이주해 온 해외파 유대인이 공존 했는데, 해외 출신 유대인 이민자는 오늘날까지도 꾸준히 이스라엘로 유 입되고 있다. 2천 년 전 예수 시대에도 예루살렘에는 오랜 토착 유대인들 외에 유대 지역 밖으로부터 이주한 많은 디아스포라계 유대인들이 있었 다. 다윗성 지역에서 발견된 ‘테오도토스 비문(Theodotos Inscription)’ 은 이러한 상황을 잘 드러낸다.

길리기아 다소(Tarsus) 출신 사울도 일찌감치 모세의 율법을 배우고자 예루살렘에 이주하여 가말리엘(Gamaliel the Elder)의 문하로 들어갔 다. 사울 당시 바리새파는 ‘힐렐 학파(House of Hillel)’와 ‘샴마이 학파 (House of Shammai)’라는 양대 산맥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가말리엘은 힐렐 학파의 창시자 ‘힐렐(Hillel the Elder)’의 혈통을 잇는 존경받는 지도자였다. 힐렐 학파는 라이벌이었던 샴마이 학파보다 더 유연하고 관용적인 태도를 지녔다고 한다.


이런 학풍 때문이었을까? 가말리엘은 산헤드린에서 베드로 및 사도들을 임의로 단죄하기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더 염두에 두는 신중함을 보인다 (행 5:34-40). 사울은 그러한 가말리엘 밑에서 젊은 시절을 보낸다. 일반 인들과 구별된 형제애적 그룹을 형성하고, 생계를 위한 직업 훈련을 연마 하면서 어쩌면 장차 서기관으로 일해 보겠노라고 꿈꾸었을지도 모르겠다. 예수와 그리 차이 나지 않는 연배이기에 어쩌면 예수께서 골고다로 향하 실 때 골목 어딘가에서 지켜보고 있지 않았을까?

젊은 바리새인 사울은 스승 가말리엘의 유연함보다는 직설적 성품을 지닌 듯한데, 이는 훗날 복음 사역자 바울의 모습에서도 잘 드러난다(행 15:36-41; 갈 2:11-14). 자유로운 토론을 중시했던 학풍 속에서 스승과 다 른 견해도 과감히 드러낸 것일까? 예수를 믿는 자에 대해 가하는 그의 박해 는 확실히 일반 정도를 능가하는 것이었다(행 22:4, 19-20; 갈 1:13-14).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대한 열심이 차고 넘치지만, 일의 방향은 상실되었 고 이를 깨닫지도 못한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는바, 예수 당대의 예루살렘 내 종교적 열정은 비본질이 본질을 압도하는 상황인 듯하다(막 7:6-9).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함이라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 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 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롬 10:1-4)


유대 땅 너머 디아스포라

갈릴리와 예루살렘을 잇는 주요 유대인 순례 길, 예수께서도 자주 오가셨던 여리고-벳산 계 곡 길을 따라 사나흘이면 갈릴리 호수 남단에 도착한다. 이곳에서 골란고원을 비스듬히 넘으 면 북동쪽으로 다메섹에 이른다. 이 루트를 따 라 사울은 당대 종교적, 정치적 실세인 대제사 장으로부터 ‘나사렛 당’ 체포를 명하는 공문을 받아 들고 동료들과 길을 떠난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지 몇 해 지나지 않았고, 해외파 유대인 스데반이 돌에 맞아 순 교한 지 불과 얼마 전이다. 핍박받아 순교한 선지자와 의인을 애도하며 그들을 기린다고 자처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을 향하여 바로 당신들이 그 핍박자라고 호통을 치시던 예수, 그리고 스데반(마 23:29-36; 행 7:51-53). 쌓아놓았던 모든 종교적 사회적 기강을 흔드는 이들 앞에서 예루살렘의 종 교 지도자들은 분노했고, 이 도를 발본하고자 디아스포라행을 자처하는 청년 사울의 분기는 저들의 눈에는 의분강개로 보였을 것이다.

예루살렘을 등지고 사해가 멀리 내려다보이는 광야 길로 접어들면서 사 울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 길을 따라 주요 절기마다 구름떼같이 모여드 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 수많은 질고 가운데도 지중해와 아시아, 그리고 아프리카 삼 대륙에서 꿋꿋하게 번창했던 디아스포라 유대인 공동체, 그 리고 그들을 하나로 묶는 자랑스러운 예루살렘 성전. 지역마다 언어가 다르고 생활관습은 달라도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자부심으로 지켜낸 각종 의례와 율법이 이제 그들을 이방으로부터 지켜내고 있었다. 바벨론 포수 이 래 수십 또는 수백 년을 먼 이국땅에서도 건재할 수 있었던 것은 성전과 그 성전을 보조하는 각 지역 회당 때문이었다.

오늘날 세계 유력한 유대인들이 이스라엘에 대해 그러하듯, 예수 당시에 도 매년 엄청난 금액의 헌금액과 순례 인구가 해외 각처에서 예루살렘과 성전으로 유입되었다. 각 지역 회당은 그 중간 안테나 역할을 하며 예배, 회합, 교육, 숙박 등 각 공동체의 정체성 유지에 필요한 다양한 기능을 수 행했다. 로마 당국도 주목하는바, 이러한 예루살렘 중심의 거대한 종교적 시스템은 사회경제적 시스템과 맞물려 당대 세계인들에게 경이로운 모습 을 연출했을 것이다. 공통 과거를 보존함으로 현재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자 하는 유대인의 열망은 모세의 율법을 끊임없이 해석하여 최적의 적용 점을 찾으려는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이러한 모습은 당대 비유대인들에게 는 때로는 동경의 대상으로, 또 때로는 혐오의 대상으로 비쳤다.

여리고를 지나며 오른편으로 바라다보이는 사해. 그 근방 메마른 계곡 사이에 에세네 집단이 거주한다는 마을이 있다. 예루살렘 성전의 기득권 을 독점하는 사두개파 무리가 싫어서 뛰쳐나왔을 테지만, 민중 속에 파고 들어 만민 제사장적 비전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려 하지 않고 자신들만의 교리에 파묻혀 살아간다고 생각하며 사울은 내심 심기가 불편했으리라.

이제 여리고 앞 요단강을 건너 요단 계곡 베레아 지역(Perea)에 접어들 면 율법의 가르침을 받는 수많은 유대 민중이 마을에서 회당에서 사울 일 행을 영접할 것이다. 율법을 지키기 때문에 유대인이고, 유대인이기 때문에 율법을 지킨다. 그런데 이제 이 ‘유대인다움’의 전통을 파괴하려는 전염병과도 같은 집단이 유대 공동체 속에 자리 잡으려 한다. 사울의 마음에는 율법을 무시하는 저들은 이미 유대인이 아니라고 단죄하고 있지 않을까?

유대인을 유대인답게 지켜내고자 하는 강한 열망. 그러기에 말씀을 맡아 보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같은 이유로 진리의 말씀이 심령을 파고들어 새 사람 만들기에 그리 힘들었던 것 아닐까?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냐 범사에 많으니 우 선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 (롬 3:1-2)


골란 너머

어느덧 벳산-스키토폴리스 인근을 지나 20여 km 북상하면 갈릴리 호수 남단에 이른다. 오른편으로 하부 요단강에 합류하는 야르묵 강(Yarmuk River)이 깊은 계곡 사이를 굽이치는데 이 지점이 골란고원의 시작점, 일 명 ‘골란의 문’(Sha’ar HaGolan)이다. 이곳에서 다메섹에 이르기 위해서 갈릴리 호수 변 동쪽을 따라 북상하여 훌라 호수 맞은편에서 북동쪽으로 올라가던지, 아예 헬몬산 기슭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동진할 수도 있다. 그 러나 살기등등한 사울은 갈릴리 호수 남단에서 곧바로 북동쪽으로 직진하 는 루트를 택하지 않았을까 싶다.

골란고원이 시작되는 갈릴리 호수 남동부에서 남쪽으로는 가다라 (Gadara), 더 북쪽으로 히포스(Hippos=Sussita)가 있다. 두 도시 모두 데 가볼리(Decapolis)를 구성하는 헬라식 도시다. 갈릴리 호수 동편 히포스 가 자리 잡고 있는 고원 위로 오르는 길은 상당히 가파르다. 가다라와 히 포스 지역 모두 갈릴리 호수 북서쪽 예수의 주요 사역지와는 대척점에 있 어 ‘호수 건너편’ 이방 지역이다(마 8:28; 막 5:1; 눅 8:26). 그러나 이 지역도 당대 여느 도시와 마찬가지로 유대인 인구가 거주하고 있었다. 사울이 바울이 되어 결국 순교 를 당할 즈음, 이 갈릴리 지역은 로마에 대한 반 란의 불길이 타오르게 되고 갈릴리 전역의 많은 유대인의 운명과 마찬가지로 히포스의 유대인은 학살당하게 된다. 


히포스 남쪽에 평평한 고원지대를 타고 북동 방향으로 지대는 조금씩 더 높아진다. 오른편에 깊고 메마른 라까드 협곡(Raqqad Valley)이 20여 km를 따라 이어지다가 사라지는 지점에 픽(Fiq)이라는 아랍 마을이 나온 다. 픽을 고대 아람과 이스라엘이 전쟁을 벌였던 아벡(Aphek)으로 추정하 기도 한다(왕상 26:26, 30; 왕하 13:17). 오늘날도 이 마을 인근으로 이스 라엘-시리아 국경이 지난다. 이곳에서 다메섹까지는 2~3일을 더 걸어야 한다.


다메섹

꽃피는 우기에는 이스라엘에서 최고의 아름다움을 뽐내지만, 건기에 접 어들면 고원 바람과 누렇게 마른 풀의 풍경에 황량하기 그지없는 골란고 원. 해발 800m를 상회하는 고원의 분수령을 지나면 지대는 조금씩 낮아 지면서 다메섹이 가까이 왔음을 예고한다. 골란고원을 오르며 들어섰던 헤롯 빌립보(Horod Philip)의 영지는 고원의 동쪽을 벗어나 반나절을 더 가면 다시 로마 직속령 시리아 지역으로 바뀐다.

이제 곧 도달하게 될 다메섹은 구약시대부터 이스라엘과는 끊을 수 없는 애증의 도시다. 다투기도 많이 다투었지만, 아브라함과 데라로 거슬러 올 라가는 혈연관계 때문인지 이스라엘과는 문화적으로 늘 끈끈했던 아람의 땅이다. 그러나 결국 아람도 북이스라엘 왕국도 서로 간 잦은 전쟁 끝에 앗수르에 둘 다 멸망한다. 그리고 그 악연은 오늘날에도 재현되고 있다.


신약시대 다메섹은 동서양의 여러 인종이 어 우러지고 유대 공동체도 든든히 서 있는 시리 아 내 로마 제국의 중심 도시 중 하나다. 오늘 날 다메섹 구도시를 동서로 관통하는 직가 거 리(Straight Street)는 로마 시대 다메섹 도성 의 흔적이다. 구도시 남쪽 부분은 2천여 년에 걸쳐 이어져 온 유대인 구역인데, 지난 20세 기 초까지도 많은 유대인이 거주했다고 한다. 전승에 의하면 사울이 회심 이후 광주리를 타고 다메섹을 빠져나왔던 장소(Bab Kisan)도 이 구역에 위치한다.


로마 당국은 소수 민족인 유대인에게 상당한 특권을 부여했다. 물론 유대인 인구 전체가 도시 밖으로 추방당하는 경우도 없지 않았지만, 많은 경 우 디아스포라 유대인은 로마 치하에서 종교 관습이나 법에 있어 자치권 과 관용적 조치를 부여받았다. 또한 유대인에게 허용된바, 로마 종교 참배 의무의 면제나 군대 복무 면제의 사례는 로마 제국이 유대인 공동체에 대 해 가지는 전략적 입장이 어떠했는지 보여준다.

유대사가 요세푸스(Josephus)에 의하면, 예수 시대 다메섹 회당에는 유 대교를 동경하여 입교를 원하는 이방인들이 꽤 있었다고 한다. 로마당국 과 비유대인 대중에게 무시 못 할 존재감으로 자리매김하는 디아스포라 유대 공동체. 본인이 그러한 디아스포라 출신이기도 한 사울은 다메섹에 점점 다가서며 자부심 속에 유대의 전통 수호에 더욱 착념하고자 다짐했을 것이다.

야트막한 언덕을 넘으면서 넓게 펼쳐지는 벌판 너머 다메섹 도성이 어렴 풋이 눈에 들어온다. 반나절 남짓만 더 가면 되겠다고 생각하는 중이었을 까? 갑자기 눈앞이 번쩍이며 주변이 눈부신 순백의 빛으로 가득하다.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 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 하는 예수라” (행 9:4-5)


이방인은 유대인에게로 이끌릴지라도 유대인과 그 율법은 요지부동의 진리라 믿었다. 유대인이 율법이요, 이 율법의 수호가 하나님을 섬기는 일 이라고. 그러나 이제 3일 동안 캄캄한 암흑의 시간이 왔다. 사울 안에 있던 모든 ‘기준’이 죽고 새로운 존재가 태어나는 시간이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 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 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 (갈 6:14-15) 

 

2025. 01. 02.


출처: 교회설장연구소(portal.icg21.com/board/board.php?bbs_id=humanities&ptype=view&kbbs_doc_num=1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