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불구하고 (나태주)
지금 사람들 너나없이
살기 힘들다, 지쳤다, 고달프다,
심지어 화가 난다고까지 말을 한다
그렇지만 이 대목에서도
우리가 마땅히 기댈 말과
부탁할 마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밥을 먹어야 하고
잠을 자야 하고 일을 해야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낌없이 사랑해야 하고
조금은 더 참아낼 줄 알아야 한다
무엇보다도 소망의 끈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기다림의 까치발을 내리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 날마다 아침이 오는 까닭이고
봄과 가을 사계절이 있는 까닭이고
어린것들이 우리와 함께하는 이유이다.
『너무 잘하려고 애쓰지 마라』 열림원 2022
어떤 시가 좋은 시일까요. 어떤 시는 읽는 즉시 그래 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반면 어떤 시는 여러 번 생각해야 그 뜻이 들어옵니다.
어떤 시는 가슴을 찡하게 하고 어떤 시는 낯익은 것을 새롭게 보도록 만들어줍니다. 어떤 시는 위안을 주고 어떤 시는 나를 돌아보도록 만듭니다.
시에 대한 정의가 다양하듯 좋은 시에 대한 정의도 각기 다양할 것입니다.
나태주 시인의 이 시는 거룩하거나 눈을 번쩍 뜨이게 하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시인은 나직하고 안정된 목소리로 낯익은 것을 흔들림 없이 노래하고 있지요. 그렇기에 절기를 알려주는 24절기와도 같습니다.
계절에 따라 해야 할 일을 말해주는 것처럼 이 시는 새해를 맞는 대목에서 가져야 할 마음가짐을 말해주지요. 새해를 맞는다는 것은 올해를 보낸다는 것과 동일합니다. 이전의 것에 새로운 것을 덧씌우는 일이기도 하고 익숙한 것에 낯선 것을 입힌다는 것과 같지요.
익숙하던 곳을 오랜만에 찾았을 때 느끼는 감정과 같습니다. 달라진 새 모습에 어리둥절해 하다가도 이내 예전 모습을 찾아내는 일과 같지요.
춥지만 겨울치고는 춥지 않은 날, 명동에 나갔습니다. 도대체 얼마 만에 간 곳인지요. 그들이나 저나 매일반, 사십여 년 만이었습니다. 그들도 저도 사십여 년 전에 그곳에 있는 건물에서 일을 했으니까요.
아주 익숙한 장소였는데 너무도 변했습니다. 건물들이 새로 지어졌고 여전히 사람들은 많지만 옛날과는 달리 중국어와 일본어가 들려오고 캐리어를 밀고 다니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우리는 앞뒤와 양옆, 그리고 바닥에도 거대한 그림이 펼쳐지는 새로운 형식의 전시를 구경하고 사십여 년 전에 유명했던 한 식당을 찾아서 점심을 먹었지요. 원래 가려던 곳에는 너무 손님이 많아 포기하고 역시 유명한 다른 곳을 찾아갔습니다. 저에게는 그곳이나 저곳이나 동일하게 낯선 곳이었으니 별다른 차이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역시 익숙하되 새로운 곳을 찾아 커피를 마셨습니다. 밖의 건물에 요즘 유명하다는 그 광고가 펼쳐지기를 기대하면서.
그 일은 수십 년 살아와 익숙한 몸에 새로운 시간을 덧씌우는 일과 같았습니다. 그 시간을 내 안으로 넣어 완전히 새롭되 낯익은 내 시간을 만들 듯. 내 안에 있는 새로움을 끄집어내기 위해 낯선 사람과 낯선 일과 음악과 그림을 만나듯, 그 시간들을 지나는 내 몸과 내 정신을 지탱하기 위해 새로운 열기를 넣듯. 낯익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나태주 시인의 시가 바로 그렇습니다. 잊고 있는 것들을 돌이키도록 하지요. 한해가 끝나고 새해를 맞이하는 이때, 괴로움으로 혹은 후회로, 간혹은 화조차 나 있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어휘로 무언가가 아직 남아 있다고 생각하도록 만듭니다.
지난해 많은 일을 했지만 손에 쥔 것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밥을 먹어야 하고 잠을 자야 하고 일을 해야 합니다. 생명은 새로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은 내가 지닌 이 몸에 새로운 기운이 들어오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 숨은 기운을 끌어내어 새로운 세계를 펼쳐나가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몸은 낡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침과 소망과 기다림을, 봄과 사계절을 겪어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고통과 비탄이 깔린 연말연시라 할지라도 어린 것들과 함께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살아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2025. 01. 08
출처 : 마음건강 길(https://www.mindgil.com/news/articleView.html?idxno=84409)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태주)
지금 사람들 너나없이
살기 힘들다, 지쳤다, 고달프다,
심지어 화가 난다고까지 말을 한다
그렇지만 이 대목에서도
우리가 마땅히 기댈 말과
부탁할 마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밥을 먹어야 하고
잠을 자야 하고 일을 해야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낌없이 사랑해야 하고
조금은 더 참아낼 줄 알아야 한다
무엇보다도 소망의 끈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기다림의 까치발을 내리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 날마다 아침이 오는 까닭이고
봄과 가을 사계절이 있는 까닭이고
어린것들이 우리와 함께하는 이유이다.
『너무 잘하려고 애쓰지 마라』 열림원 2022
어떤 시가 좋은 시일까요. 어떤 시는 읽는 즉시 그래 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반면 어떤 시는 여러 번 생각해야 그 뜻이 들어옵니다.
어떤 시는 가슴을 찡하게 하고 어떤 시는 낯익은 것을 새롭게 보도록 만들어줍니다. 어떤 시는 위안을 주고 어떤 시는 나를 돌아보도록 만듭니다.
시에 대한 정의가 다양하듯 좋은 시에 대한 정의도 각기 다양할 것입니다.
나태주 시인의 이 시는 거룩하거나 눈을 번쩍 뜨이게 하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시인은 나직하고 안정된 목소리로 낯익은 것을 흔들림 없이 노래하고 있지요. 그렇기에 절기를 알려주는 24절기와도 같습니다.
계절에 따라 해야 할 일을 말해주는 것처럼 이 시는 새해를 맞는 대목에서 가져야 할 마음가짐을 말해주지요. 새해를 맞는다는 것은 올해를 보낸다는 것과 동일합니다. 이전의 것에 새로운 것을 덧씌우는 일이기도 하고 익숙한 것에 낯선 것을 입힌다는 것과 같지요.
익숙하던 곳을 오랜만에 찾았을 때 느끼는 감정과 같습니다. 달라진 새 모습에 어리둥절해 하다가도 이내 예전 모습을 찾아내는 일과 같지요.
춥지만 겨울치고는 춥지 않은 날, 명동에 나갔습니다. 도대체 얼마 만에 간 곳인지요. 그들이나 저나 매일반, 사십여 년 만이었습니다. 그들도 저도 사십여 년 전에 그곳에 있는 건물에서 일을 했으니까요.
아주 익숙한 장소였는데 너무도 변했습니다. 건물들이 새로 지어졌고 여전히 사람들은 많지만 옛날과는 달리 중국어와 일본어가 들려오고 캐리어를 밀고 다니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우리는 앞뒤와 양옆, 그리고 바닥에도 거대한 그림이 펼쳐지는 새로운 형식의 전시를 구경하고 사십여 년 전에 유명했던 한 식당을 찾아서 점심을 먹었지요. 원래 가려던 곳에는 너무 손님이 많아 포기하고 역시 유명한 다른 곳을 찾아갔습니다. 저에게는 그곳이나 저곳이나 동일하게 낯선 곳이었으니 별다른 차이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역시 익숙하되 새로운 곳을 찾아 커피를 마셨습니다. 밖의 건물에 요즘 유명하다는 그 광고가 펼쳐지기를 기대하면서.
그 일은 수십 년 살아와 익숙한 몸에 새로운 시간을 덧씌우는 일과 같았습니다. 그 시간을 내 안으로 넣어 완전히 새롭되 낯익은 내 시간을 만들 듯. 내 안에 있는 새로움을 끄집어내기 위해 낯선 사람과 낯선 일과 음악과 그림을 만나듯, 그 시간들을 지나는 내 몸과 내 정신을 지탱하기 위해 새로운 열기를 넣듯. 낯익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나태주 시인의 시가 바로 그렇습니다. 잊고 있는 것들을 돌이키도록 하지요. 한해가 끝나고 새해를 맞이하는 이때, 괴로움으로 혹은 후회로, 간혹은 화조차 나 있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어휘로 무언가가 아직 남아 있다고 생각하도록 만듭니다.
지난해 많은 일을 했지만 손에 쥔 것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밥을 먹어야 하고 잠을 자야 하고 일을 해야 합니다. 생명은 새로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은 내가 지닌 이 몸에 새로운 기운이 들어오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 숨은 기운을 끌어내어 새로운 세계를 펼쳐나가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몸은 낡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침과 소망과 기다림을, 봄과 사계절을 겪어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고통과 비탄이 깔린 연말연시라 할지라도 어린 것들과 함께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살아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2025. 01. 08
출처 : 마음건강 길(https://www.mindgil.com/news/articleView.html?idxno=844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