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주원규/"가족이기에 새로울 수 있는"/주간기독교


 2024년 10월에 방영되어 잔잔한 주목을 이끌었던 JTBC 수요 드라마 《조립식 가족》은 제목에서 보여주듯 우리가 보편적으로 생각하는 가족보다는 조금은 색다른 가족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주목할 만한 건 색다른 가족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본 우리의 생각 내지는 편견을 시간이 흐른 뒤, 드라마를 모두 보고 나면 어느 정도 지워내는 효과를 발휘한다는 점이다.

드라마는 자그마한 칼국숫집을 운영하며 혼자 딸(정채연 역)을 키우는, 그것도 제법 다정하고 따뜻하게 대하는 아빠(최원영 역)가 우선적 소개한다. 엄마란 자리가 부재하지만, 아빠 윤정재는 이에 관한 공백이 느껴지지 않게 정성을 다한다. 이러한 윤정재 부녀에게 새 가족이 생긴다. 김산하(황인엽 역)와 그의 아버지 김대욱(최무성), 거기에 선을 봤다는 인연이라 하기엔 보잘것없어 보이지만, 인생에서 중요한 흔적으로 남은 강서현(백은혜 역)과 그의 아들 강해준(배현성 역)이 합류한다. 꽤 설득력 있게 세 가구가 한 가정을 꾸리게 되는 과정은 결국, 서로 성도 다르고, 자라온 환경도 다르지만, 서로를 바라보며, 그것만으로도 의지와 힘을 느끼며 살아갈 때, 가족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 내지는 필연성으로 인해 힘을 얻는다. 이 가족을 조립식 가족이라 부를 수 있는 배경은 결국 엄마 없이 아빠만 둘인 상황이기에 그렇다.

이 가족을 가족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근원엔 윤정재가 보여준 연민을 넘어선 강한 의지가 뒷받침된다. 윤정재의 집으로 이사 온 산하네 가족은 동생의 상실을 겪은 뒤, 가족으로서의 정서적 따뜻함까지 동시에 상실해버렸다. 혈연을 잃는 아픔을 견디지 못했던 엄마가 결국, 딸의 죽음과 관련된 트라우마를 견디지 못하고 가족의 곁을 떠나야 했던 것 역시 상실의 아픔이 이끌고 온 비극이었다. 윤정재는 상실의 상실을 겪은, 엄마마저 자신이 여동생을 지키지 못했다는 탓을 하며 떠났기에 이중의 괴로움을 겪는 산하를 자기 아들처럼 돌보게 되었고, 그 돌봄의 정서적 연대가 산하의 아버지 김대욱에게도 전파되어 두 아빠가 마치 부부처럼 역할을 나눠 가족을 이루는 관계가 형성되었다.

여기에 강해준이 새로운 가족으로 편입된다. 엄마 강서현이 돈을 벌어오겠다며 집을 떠난 뒤 소식이 끊어져 버리는 비극 역시 상실의 살풍경일 것인데, 윤정재는 이 어린 해준마저 품게 된다. 그가 무슨 이유로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해준을 받아들이는지는 알 수 없다. 어쩌면 현실적 판단과 효율성을 따진다면 윤정재의 가족 만들기 선택에 아무것도 동의할 수 없을지 모른다. 적절하게 설명 가능한 이론이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오히려 드라마는 설득을 넘어선 설득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가족이란 이름은 어쩌면 혈연이기에 가족이 아니라 상실의 비극 앞에서 사람과 사람의 연대, 외로운 고통의 극한을 서로 위무하고 조금 더 나아지는 삶의 모습을 향한 절박한 몸부림이어서가 아닐까.

《조립식 가족》은 중국의 드라마 《이가인지명》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이 원작 드라마는 이미 국내에도 적절한 마니아층을 보유하고 있는데, 아마도 이색적 가족 구성원이 서로의 이질감을 극복하고 하나가 되어 가는 과정에서 찾아오는 설명하기 힘든 감동을 담보하기 때문일 것이다. 아울러 《조립식 가족》은 아무리 봐도 이색적이라 할 수 있는 가족 이야기의 틀에 로맨스 코드를 결합하는 시도를 보여주는데, 이 시도와 결합이 기존에 보여준 혈연의 뒤얽힘으로 인한 소위 막장이나 신파 코드에 쉽게 기대지 않는다는 점에서 인상적인 여운을 남긴다.

이렇듯 《조립식 가족》은 출생의 비밀과 진짜 부모라고 나타날 사건이나 에피소드를 이야기의 중심을 뒤흔들 메인 플롯으로 배치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의 양상을 띈다. 친부모의 등장으로 인해 결국 혈연을 쫓게 된다는 스테레오 타입을 답습하지 않고, 서로를 배려하고 각자의 선택권을 존중하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진정한 배려를 보여주려는 시도가 이야기 곳곳에 진정성 있게 그려지고 있다. 상처받고 상처 주는 이야기를 통해 단죄 혹은 파국으로 치닫는 상처의 위무를 다루지 않는 지점에서 《조립식 가족》은 그 자체로 색다른 감동 코드를 제시하고 있다. 여기에 겉으로는 오빠, 동생이지만, 피가 섞이지 않은 관계의 특별함 위에 나타나게 될 해준과 산하의 로맨스 코드 또한 새로운 시청 포인트를 제공한다. 여동생과 오빠의 관계를 넘어선 청춘이 가진 설렘과 애틋함, 안타까움과 감동의 변곡점이 효과적으로 펼쳐지는, 한 편의 삶의 서사를 다채롭게 그리고 있다.

드라마를 시작부터 끝까지 다 보고 나면 한 가지 질문이 남는다.

“과연 가족이란 무엇일까?”

여전히 한국의 가족제도는 혈연중심이다. 드라마에서 보여주는 가족의 모습을 보며 대안적 가족 모델의 하나로 바라보는 시선 역시 혈연중심적 시각에서 가질 수 있는 정의란 사실을 감안하면 역설적으로 우리 사회가 혈연중심의 가족에 얼마나 깊은 의미부여를 하는지 알 수 있게 된다.

혈연을 가족과 동일시하는 시대는 사실상 지났다. 모두가 공동체 의식을 가지고 공동의 연대를 위해 의논하고 의견을 교류하면서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모두가 노력하는 자체가 가족애이며, 결국 거기에 가족의 확장성, 더 나아가 인류애의 확장성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함께 살아내고 어려움을 극복하는 경험 공유가 진짜 가족을 만들어내는 밑거름임을 잊지 말자. 새로움을 두려워하지 않는, 아니 새로울 수 있기에 가족이다. 갈수록 정서적으로 황폐해지는 시대, 가족에 관한 근본적 의미를 환기하는 조립식 가족의 정주행을 권한다.

2025. 01. 27


출처 : 주간기독교(http://www.cnews.or.kr/news/articleView.html?idxno=32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