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소수민족 언어 번역 성경, 알곤퀸어 성경"
이강선 교수(기독인문학연구원 연구위원, 성균관대 번역대학원)
경전 번역은 번역이 필요한 가장 큰 이유에 속한다. 경전 번역은 선교를 위한 것이지만 그 과정에서 전파되는 것이 종교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경전이 품은 배경 문화와 사고방식, 그리고 교육이 뒤따른다. 따라서 어떤 언어건 그 언어로 된 성경이 존재하기까지 지난한 역경이 따르기 마련이다. 현대에 사는 우리로서는 상상조차 못할 힘든 과정이 있었던 것인데 거 기에는 다양한 연유가 기인한다. 새로운 경전에 대한 정치적인 이유는 물론, 낯선 종교 혹은 사상에 대한 거부감이 거의 전 영역에서 생겨났던 것이다.
현재도 위클리프 선교회는 성경을 세계 각국의 언어로 번역 중이다. 지난 2020년 성경 번역 단체 위클리프 성경 번역 선교회(Wycliffe Bible Translations)는 성경이 700번째 언어로 번역되었다고 밝혔다. 700번째 언 어는 멕시코의 토착 부족인 후이콜족(Huichol)을 위한 『위샤리타(Wixáritari) 성경』을 비롯해 말라위에서 출시된 『엘롬위(Ellomwe) 성경』이다. 『위샤리타 성경』과 『엘롬위 성경』은 성경 전권이 번역된 경우로, 성경 일부를 번역 한 경우를 포함하면 훨씬 더 많아진다. 현재 위클리프 홈페이지에서 밝히고 있는 성경 전권(신약과 구약)이 번역된 언어의 개수는 756개다.
지난 회까지 다룬 성경 번역은 유럽에서 일어난 일들이었다. 유럽은 오랫동안 세계의 중심이었고 지금도 그러하다. 그러나 실제로 역사는 유럽 만의 것이 아니다. 유럽과 미국 이외에도 역사는 존재하되 관심의 초점에 서 비켜나 있을 뿐이다. 오랜 세월 동안, 16세기에 이르기까지 성경은 다 양한 언어로 번역되었다. 히브리어에서 희랍어로 번역된 셉투아진트에서 시작해 라틴어, 영어, 그리고 독일어 성경을 다루었고, 4세기의 고트어 성경을 다루었다. 고트어는 현재는 사라진 동 게르만 언어이지만 역시 유럽의 언어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성경은 소수민족의 언어로 번역되기 시작했을까? 최초의 소수민족 언어 성경은 북아메리카 대륙의 알곤퀸 인디언의 『나티크 어 번역 성경』이다. 알곤퀸족은 북미 원주민 중 가장 인구가 많고 널리 퍼져 있는 부족에 속한다. 한편으로 가장 덜 호전적인 부족이기도 했다. 16세기, 북미에 최초의 유럽인 정착지가 생겼을 당시, 알곤퀸족은 현재의 캐나다 로키산맥 동부, 뉴잉글랜드, 뉴저지, 뉴욕 남동부, 대서양 연안, 그리고 그레이트 호수 주변에 살고 있었다. 유럽인과 접촉하기 전, 대부분의 알곤퀸 부족들은 사냥과 낚시로 생활했다. 유럽인이 도착했을 당시, 이들은 이웃인 이로쿼이 부족과 정기적으로 전쟁을 하던 상태였다.
이들이 사용하는 알곤퀸어는 세계에서 가장 어려운 언어에 속하며 라틴어, 그리스어, 히브리어보다 어려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성경을 알곤 퀸어로 번역한 사람은 청교도 목사인 존 엘리엇(John Eliot 1604-1690)이였다. 이 성경은 번역자의 이름을 따서 『엘리엇 인디언 성경(Eliot Indian Bible)』이라고도 불리는데 이 성경은 아메리카에서 최초로 인쇄된 성경이 기도했다.
엘리엇은 영국 국교회의 목사로, 영국의 네이징에서 노르만 족 출신인 향사 농부 베네트와 레티에 사이에 일곱 자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아버지 베 네트 엘리엇은 근면하고, 가정적이며, 검소하게 살 아가는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소명이 세상 일을 부지런히 하여 가족을 지지하는 것이라고 여겼고 오락과 쾌락을 싫어했다. 그의 가족은 영국 국교도 였지만, 청교도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1622년 엘리엇은 캠브리지에 있는 지저스 칼리지를 졸업하고 성공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의식과 정책에 불만을 품고, 문법학교 의 교사가 되었다. 그에게 큰 영향을 주었던 토마스 후커(Thomas Hooker)가 청교도 신앙을 따라 아메리카 대륙의 자유를 찾아 떠났고, 엘리엇 역시 이 모험을 선택했다. 새 인생을 시작한 것이었다. 1631년, 엘리엇은 매 사추세츠 주의 베이 콜로니에 도착했다. 오늘날 ‘필그림 파더스’라고 불리 는 영국의 청교도들이 종교 박해를 피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현재의 매 사추세츠 플리머스에 도착한 후 식민지를 세운 해가 1620년이었으므로, 엘리엇이 미국에 도착한 1631년은 식민지 설립 후 불과 11년 밖에 지나 지 않은 시기였다. 27세에 플리머스에 도착한 그는 보스턴에서 담임목사 의 부재로 인해 대리 목사로 1년간 설교했고 이후 신도들이 잔류해달라고 요청했음에도 불구하고 록스베리로 옮겨갔다.
40세가 되었을 때 인디언 선교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식민지가 세워진 이래, 어려움을 무릅쓰고 원주민에게 전도하려는 목사는 거의 없었다. 더욱이 인디언들이 사용하는 알곤퀸어는 글자가 존재하지 않았다. 인디언들에게 전도를 하려면 알곤퀸어를 배우고, 이 언어를 쓰는 방법을 고안하고, 성경을 번역하고, 그리고 인디언들에게 읽는 법을 가르쳐야 했다. 엘리엇 은 자신의 설교를 돕고 알곤퀸족의 나티크 방언을 가르쳐줄 통역사를 찾 았다. 그는 포로로 잡힌 젊은 인디언 코케노우의 도움을 받아 2년에 걸쳐 언어를 배웠다. 그가 인디언어로 설교를 시작한 것은 1646년이었다.
그의 설교는 회개와 구원에 집중된 메시지였 고 이후 인디언들의 개종 숫자가 점차 늘어났다. 선교가 순조롭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알곤퀸족 은 인디언 부족 중에 가장 평화로운 인디언이었 지만 영국인들이 미국에 도착해 식민지를 세운 이후 갈등이 생겨났던 것이다. 처음에 유럽인들 은 자신들이 인디언의 땅에 왔음을 인정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인디언들에게 물건과 현금이나 총 혹은 독주를 주고서 그 땅을 샀다. 문화와 사 고방식의 차이로 인디언들과의 사이에 당연히 분쟁이 생겨났다. 인디언들은 부족 지도자인 사켐의 지시를 따랐고 이들은 그들의 전통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던 것 이다. 영국인들은 식민지 법정에서 인디언들을 재판했고 태형에서 족쇄에 이르는 형벌을 선고했다.
엘리엇의 능력은 영적인 문제뿐 아니라 세속적인 문제에서도 발휘되었 다. 그는 뉴잉글랜드 회사와 더불어 인디언과 영국인 사이의 토지 분쟁과 돈 문제를 해결했다. 한편으로 나티크와 다른 인디언 마을의 인디언들 을 고용해서 그들의 생계를 해결하고자 했다. 교육에도 관심을 기울여 무엇보다 먼저 학교를 세우도록 했다. 교육은 이들 청교도가 목사들을 배출하기 위한 방안 이었다. 이들은 식민지를 약 속받은 나라, 선민의 나라로 만들고 싶어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교육이 최우선이었던 것이다. 그 사실은 1650년 『하버드대학교 헌장』 초안을 보면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 헌장에는 ‘이 나라의 영국인 젊은 이와 인디언 젊은이들을 지식과 경건으로 교육하는데 이바지 한다.’라고 적혀있는 것이다.
1653년, 엘리엇은 뉴잉글랜드 복음 전파 협회를 위한 첫 번째 텍스트를 알곤퀸어로 제작했고, 1권짜리 교과서, 교리문답서로 만들어 샘 뮤엘 그 린에게 인쇄를 맡겼다. 1655-1656년에는 마태복음, 창세기, 시편을 알곤 퀸 인디언 언어로 번역하여 인쇄했다. 이것은 런던의 법인에게 완성된 『알 곤퀸 성경』을 보여주기 위한 샘플이었다.
1660년 나티크에 인디언 독립교회 공동체가 세워졌다. 이 공동체에서 약 1,100여명의 인디언이 기독교 복음을 받아들였고, 그중 24명이 자신의 부족에게 설교할 전도자로 훈련을 받았다. 이런 과정을 거쳐 1661년에 신 약성경이, 1663년에 구약성경이 번역되었다. 그가 사용한 성경은 『제네바 성경』으로 전권, 66권을 번역하기까지는 14년 이상 걸렸다. 『영어성경』이 미국에서 최초로 출간된 것은 1782년으로, 『인디언 성경』은 무려 120년 빨리 출간되었다. 엘리엇이 인디언 선교에 큰 업적을 남긴 것은 인디언 성경번역이다. 이전에는 누구도 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존 엘리엇의 인디언 선교에 헌신으로 ‘인디언 사도’라는 칭호를 받았다. 미국 대통령 토마스 제퍼슨(Thomas Jefferson)이 그가 출판한 『예수의 도덕』에서 미국 원주민이 가장 개종 시키기 어려운 부족에 속한다는 점을 인식했다는 것은 엘리엇의 헌신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1687년에 엘리엇의 부인이 죽었고, 1690년에 엘리엇도 8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현재 보스턴 주 의사당의 깃발 홀에 존 엘리엇의 벽화가 있고, 국회 도서관 문서창고에는 존 엘리엇이 인디언에게 말하는 모습이 대리석에 새겨져 있다. 오늘날에는 소수 민족 언어로 성경을 번역한다는 것이 낯설지 않다. 위클리프 선교회는 매년 20개의 언어로 성경을 새로 번역한다. 그러나 17세기, 소수 민족의 언어로 성경을 번역한다는 것은 다양한 장애를 의미했다. 각자가 지닌 전통 문화, 사상뿐 아니라 그들이 갖고 있는 실질적인 어려움과 교육을 해결해야 했던 것이다. 엘리엇의 알곤퀸어 번 역은 그 어려움을 이겨낸 대표적 사례로 볼 수 있다. 그가 행했던 일은 영육의 강건뿐 아니라 지상에서 하찮거나 열등한 인간은 없다는 사실을 다시 깨닫게 해주었던 것이다.
2025. 02. 03.
출처: 교회설장연구소(portal.icg21.com/board/board.php?bbs_id=humanities&ptype=view&kbbs_doc_num=108)
"최초의 소수민족 언어 번역 성경, 알곤퀸어 성경"
이강선 교수(기독인문학연구원 연구위원, 성균관대 번역대학원)
경전 번역은 번역이 필요한 가장 큰 이유에 속한다. 경전 번역은 선교를 위한 것이지만 그 과정에서 전파되는 것이 종교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경전이 품은 배경 문화와 사고방식, 그리고 교육이 뒤따른다. 따라서 어떤 언어건 그 언어로 된 성경이 존재하기까지 지난한 역경이 따르기 마련이다. 현대에 사는 우리로서는 상상조차 못할 힘든 과정이 있었던 것인데 거 기에는 다양한 연유가 기인한다. 새로운 경전에 대한 정치적인 이유는 물론, 낯선 종교 혹은 사상에 대한 거부감이 거의 전 영역에서 생겨났던 것이다.
현재도 위클리프 선교회는 성경을 세계 각국의 언어로 번역 중이다. 지난 2020년 성경 번역 단체 위클리프 성경 번역 선교회(Wycliffe Bible Translations)는 성경이 700번째 언어로 번역되었다고 밝혔다. 700번째 언 어는 멕시코의 토착 부족인 후이콜족(Huichol)을 위한 『위샤리타(Wixáritari) 성경』을 비롯해 말라위에서 출시된 『엘롬위(Ellomwe) 성경』이다. 『위샤리타 성경』과 『엘롬위 성경』은 성경 전권이 번역된 경우로, 성경 일부를 번역 한 경우를 포함하면 훨씬 더 많아진다. 현재 위클리프 홈페이지에서 밝히고 있는 성경 전권(신약과 구약)이 번역된 언어의 개수는 756개다.
지난 회까지 다룬 성경 번역은 유럽에서 일어난 일들이었다. 유럽은 오랫동안 세계의 중심이었고 지금도 그러하다. 그러나 실제로 역사는 유럽 만의 것이 아니다. 유럽과 미국 이외에도 역사는 존재하되 관심의 초점에 서 비켜나 있을 뿐이다. 오랜 세월 동안, 16세기에 이르기까지 성경은 다 양한 언어로 번역되었다. 히브리어에서 희랍어로 번역된 셉투아진트에서 시작해 라틴어, 영어, 그리고 독일어 성경을 다루었고, 4세기의 고트어 성경을 다루었다. 고트어는 현재는 사라진 동 게르만 언어이지만 역시 유럽의 언어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성경은 소수민족의 언어로 번역되기 시작했을까? 최초의 소수민족 언어 성경은 북아메리카 대륙의 알곤퀸 인디언의 『나티크 어 번역 성경』이다. 알곤퀸족은 북미 원주민 중 가장 인구가 많고 널리 퍼져 있는 부족에 속한다. 한편으로 가장 덜 호전적인 부족이기도 했다. 16세기, 북미에 최초의 유럽인 정착지가 생겼을 당시, 알곤퀸족은 현재의 캐나다 로키산맥 동부, 뉴잉글랜드, 뉴저지, 뉴욕 남동부, 대서양 연안, 그리고 그레이트 호수 주변에 살고 있었다. 유럽인과 접촉하기 전, 대부분의 알곤퀸 부족들은 사냥과 낚시로 생활했다. 유럽인이 도착했을 당시, 이들은 이웃인 이로쿼이 부족과 정기적으로 전쟁을 하던 상태였다.
이들이 사용하는 알곤퀸어는 세계에서 가장 어려운 언어에 속하며 라틴어, 그리스어, 히브리어보다 어려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성경을 알곤 퀸어로 번역한 사람은 청교도 목사인 존 엘리엇(John Eliot 1604-1690)이였다. 이 성경은 번역자의 이름을 따서 『엘리엇 인디언 성경(Eliot Indian Bible)』이라고도 불리는데 이 성경은 아메리카에서 최초로 인쇄된 성경이 기도했다.
엘리엇은 영국 국교회의 목사로, 영국의 네이징에서 노르만 족 출신인 향사 농부 베네트와 레티에 사이에 일곱 자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아버지 베 네트 엘리엇은 근면하고, 가정적이며, 검소하게 살 아가는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소명이 세상 일을 부지런히 하여 가족을 지지하는 것이라고 여겼고 오락과 쾌락을 싫어했다. 그의 가족은 영국 국교도 였지만, 청교도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1622년 엘리엇은 캠브리지에 있는 지저스 칼리지를 졸업하고 성공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의식과 정책에 불만을 품고, 문법학교 의 교사가 되었다. 그에게 큰 영향을 주었던 토마스 후커(Thomas Hooker)가 청교도 신앙을 따라 아메리카 대륙의 자유를 찾아 떠났고, 엘리엇 역시 이 모험을 선택했다. 새 인생을 시작한 것이었다. 1631년, 엘리엇은 매 사추세츠 주의 베이 콜로니에 도착했다. 오늘날 ‘필그림 파더스’라고 불리 는 영국의 청교도들이 종교 박해를 피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현재의 매 사추세츠 플리머스에 도착한 후 식민지를 세운 해가 1620년이었으므로, 엘리엇이 미국에 도착한 1631년은 식민지 설립 후 불과 11년 밖에 지나 지 않은 시기였다. 27세에 플리머스에 도착한 그는 보스턴에서 담임목사 의 부재로 인해 대리 목사로 1년간 설교했고 이후 신도들이 잔류해달라고 요청했음에도 불구하고 록스베리로 옮겨갔다.
40세가 되었을 때 인디언 선교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식민지가 세워진 이래, 어려움을 무릅쓰고 원주민에게 전도하려는 목사는 거의 없었다. 더욱이 인디언들이 사용하는 알곤퀸어는 글자가 존재하지 않았다. 인디언들에게 전도를 하려면 알곤퀸어를 배우고, 이 언어를 쓰는 방법을 고안하고, 성경을 번역하고, 그리고 인디언들에게 읽는 법을 가르쳐야 했다. 엘리엇 은 자신의 설교를 돕고 알곤퀸족의 나티크 방언을 가르쳐줄 통역사를 찾 았다. 그는 포로로 잡힌 젊은 인디언 코케노우의 도움을 받아 2년에 걸쳐 언어를 배웠다. 그가 인디언어로 설교를 시작한 것은 1646년이었다.
그의 설교는 회개와 구원에 집중된 메시지였 고 이후 인디언들의 개종 숫자가 점차 늘어났다. 선교가 순조롭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알곤퀸족 은 인디언 부족 중에 가장 평화로운 인디언이었 지만 영국인들이 미국에 도착해 식민지를 세운 이후 갈등이 생겨났던 것이다. 처음에 유럽인들 은 자신들이 인디언의 땅에 왔음을 인정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인디언들에게 물건과 현금이나 총 혹은 독주를 주고서 그 땅을 샀다. 문화와 사 고방식의 차이로 인디언들과의 사이에 당연히 분쟁이 생겨났다. 인디언들은 부족 지도자인 사켐의 지시를 따랐고 이들은 그들의 전통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던 것 이다. 영국인들은 식민지 법정에서 인디언들을 재판했고 태형에서 족쇄에 이르는 형벌을 선고했다.
엘리엇의 능력은 영적인 문제뿐 아니라 세속적인 문제에서도 발휘되었 다. 그는 뉴잉글랜드 회사와 더불어 인디언과 영국인 사이의 토지 분쟁과 돈 문제를 해결했다. 한편으로 나티크와 다른 인디언 마을의 인디언들 을 고용해서 그들의 생계를 해결하고자 했다. 교육에도 관심을 기울여 무엇보다 먼저 학교를 세우도록 했다. 교육은 이들 청교도가 목사들을 배출하기 위한 방안 이었다. 이들은 식민지를 약 속받은 나라, 선민의 나라로 만들고 싶어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교육이 최우선이었던 것이다. 그 사실은 1650년 『하버드대학교 헌장』 초안을 보면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 헌장에는 ‘이 나라의 영국인 젊은 이와 인디언 젊은이들을 지식과 경건으로 교육하는데 이바지 한다.’라고 적혀있는 것이다.
1653년, 엘리엇은 뉴잉글랜드 복음 전파 협회를 위한 첫 번째 텍스트를 알곤퀸어로 제작했고, 1권짜리 교과서, 교리문답서로 만들어 샘 뮤엘 그 린에게 인쇄를 맡겼다. 1655-1656년에는 마태복음, 창세기, 시편을 알곤 퀸 인디언 언어로 번역하여 인쇄했다. 이것은 런던의 법인에게 완성된 『알 곤퀸 성경』을 보여주기 위한 샘플이었다.
1660년 나티크에 인디언 독립교회 공동체가 세워졌다. 이 공동체에서 약 1,100여명의 인디언이 기독교 복음을 받아들였고, 그중 24명이 자신의 부족에게 설교할 전도자로 훈련을 받았다. 이런 과정을 거쳐 1661년에 신 약성경이, 1663년에 구약성경이 번역되었다. 그가 사용한 성경은 『제네바 성경』으로 전권, 66권을 번역하기까지는 14년 이상 걸렸다. 『영어성경』이 미국에서 최초로 출간된 것은 1782년으로, 『인디언 성경』은 무려 120년 빨리 출간되었다. 엘리엇이 인디언 선교에 큰 업적을 남긴 것은 인디언 성경번역이다. 이전에는 누구도 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존 엘리엇의 인디언 선교에 헌신으로 ‘인디언 사도’라는 칭호를 받았다. 미국 대통령 토마스 제퍼슨(Thomas Jefferson)이 그가 출판한 『예수의 도덕』에서 미국 원주민이 가장 개종 시키기 어려운 부족에 속한다는 점을 인식했다는 것은 엘리엇의 헌신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1687년에 엘리엇의 부인이 죽었고, 1690년에 엘리엇도 8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현재 보스턴 주 의사당의 깃발 홀에 존 엘리엇의 벽화가 있고, 국회 도서관 문서창고에는 존 엘리엇이 인디언에게 말하는 모습이 대리석에 새겨져 있다. 오늘날에는 소수 민족 언어로 성경을 번역한다는 것이 낯설지 않다. 위클리프 선교회는 매년 20개의 언어로 성경을 새로 번역한다. 그러나 17세기, 소수 민족의 언어로 성경을 번역한다는 것은 다양한 장애를 의미했다. 각자가 지닌 전통 문화, 사상뿐 아니라 그들이 갖고 있는 실질적인 어려움과 교육을 해결해야 했던 것이다. 엘리엇의 알곤퀸어 번 역은 그 어려움을 이겨낸 대표적 사례로 볼 수 있다. 그가 행했던 일은 영육의 강건뿐 아니라 지상에서 하찮거나 열등한 인간은 없다는 사실을 다시 깨닫게 해주었던 것이다.
2025. 02. 03.
출처: 교회설장연구소(portal.icg21.com/board/board.php?bbs_id=humanities&ptype=view&kbbs_doc_num=1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