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주원규/"일그러진 사회, 그 몰락을 해부하는 이야기"/주간기독교


일그러진 사회, 그 몰락을 해부하는 이야기


흔히 할리우드 시스템이란 말이 있다. 영화, 드라마의 선진화를 도모하고 작품성을 존중해 뛰어나면서도 일정한 질의 콘텐츠 창작물을 생산하고 소개하는 시스템을 말함이다. 대체로 할리우드 시스템 하면 대규모 자본과 인력, 스타 배우의 투입을 핵심으로 한 물량 공세를 떠올리는 편이지만, 그 행간에 웰메이드의 가능성으로 지속하는 시스템이란 표현이 어울릴 것이다. 사대주의의 시선을 놓고 봤을 때, 미국 드라마의 강점을 꼽자면 이런 요소의 적절한 배합이 있을 수 있겠다. 이러한 메이드 인 할리우드 드라마가 웰메이드로 평가받는 데 있어서 거의 독보적 위상의 드라마가 있는데, 바로 2008년에서 2013년까지 방영된 《브레이킹 배드》다.

《브레이킹 배드》의 아이디어를 고안하고 창작의 전 과정에 참여한 빈스 빌리건은 이 드라마의 주제를 인과응보 ‘모든 행위에는 책임이 따른다’라는 것으로 꼽았다. 주인공 화학교사인 월터(브라이언 크랜스턴 역), 외 많은 등장인물에겐 그들 나름의 피치 못할 사정으로 도덕적 해이를 넘어선 불법의 길, 마약 제조, 판매의 길에 빠져들었다. 창작자는 이들이 아무리 논리적으로 보호받아 마땅한, 이른바 악행에 관한 나름의 동기적 면죄부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모두 스스로 저지른 악행에 관한 전혀 부족하지 않은 대가를 치르는 과정을 섬뜩하리만치 극사실적으로 묘사한다는 점에서 참으로 미국적이다, 아울러 한국 드라마가 전달하는 속칭 등장인물에게 과몰입하는 접근법을 사용하지 않고 지나칠 만큼 주인공에게 감정 이입하거나 몰입하지 않도록 하는 ‘소격 효과’를 견지하는 대본과 연출 작법이 흔히 미국 사회를 대표하는 프로테스탄트 윤리를 대표하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정당성을 떠올리게 한다.



시리즈물이 대세인 《브레이킹 배드》는 시즌 5까지 제작되었는데, 전체 줄거리의 주요 포인트를 간략하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주인공 월터 화이트는 뉴멕시코 앨버커키에서 임신한 아내, 어렸을 적 뇌성마비에 걸려 다리가 불편한 아들 월터 주니어와 함께 살아가는 소심하고 전형적인 미국 중년 남성이다. 하지만, 소심하다고 말할 수 있는 지점과 다르게 그의 화학 분야에 관한 재능은 엄청나다. 칼텍 화학 박사 출신인 그는 현재 수십조 단위의 사업을 운영하는 친구의 공동창업자이지만, 젊었을 때, 미래에 관한 불안과 소시민적 마인드(물론 이 마인드를 소시민적이라 일컫는 것 자체가 편견일 것이지만) 때문에 공동창업자인 친구와 결별하게 되고, 이후 지역 학교의 고등학교 화학교사로 재직 중이다. 늘 넉넉하지 못한 경제 상황에 허덕거려야 했던 그는 퇴근 후 세차장에서 아르바이트하며 가족을 부양하는 데 애쓰려고 발버둥 치는 미국 사회, 더 나아가 2024년을 살아가는 세계 중산층의 표본과 같은 존재다. 이대로만 간다면 그래도 평범한 삶의 한 궤도에 안착할 수 있었겠지만, 그의 인생은 마치 예견된 것처럼 일그러진다. 월터의 50세 생일에 발견한 폐암 3기 진단, 그는 자신에게 임박한 죽음의 그림자가 걱정이기보다는 남들에게 조롱과 멸시를 받으며 살아가게 될 장애인 아들과 아내에 관한 미래 걱정에 잠이 들 수가 없다.

그래서 결국, 선택하게 된 광기의 출사표는 월터가 자신의 화학 지식을 십분 살려 마약을 제조해 거액의 유산을 자신이 죽은 이후에 남기려는 계획한 것이다. 처음 드라마를 보면 이게 과연 가능한 일인가, 너무 황당한 비약이 아닌가 싶지만, 이야기는 묘하게 강렬한 개연성을 품고 휘몰아친다. 마약국에 근무하던 동서와 동행해 마약 단속 현장을 사전 답사하고 밤의 세계에서 메스암페타민을 제조하는 이들의 허술함을 보며 자신감을 얻은 뒤, 예전 학교의 말썽꾸러기 제자이자 자기 자신을 스스로 삼류 마약상이라 취급하는 제시 핑크맨을 만나 양질의 마약을 제작하고 판매하는 지경까지 이르는 악의 진화를 보여준다.


문제라고 해야 할지 설득력의 차원이라 해야 할지 모르지만, 안타깝게도 화학을 사랑하고 화학을 순전히 학문적 차원에서만 다루던 화학교사의 모범적 준법정신이 급격히 허물어지는 과정이 제법 담담하면서도 설득력 있게 전개된다. 심지어 미국 사회가 백인 남성인 월터를 바라보는 시선의 냉정함은 모든 인간을 자본의 노예로만 판단하는 이들의 차가움과 맞물리면서 드라마의 농도를 피해 갈 수 없는 몰입의 경지로 끌고 올라간다.

이 몰입의 경지는 시즌이 계속되면서 치열하고 가파르게 올라간다. 월터는 자신이 원래 원하던 나름 소박했던 중산층 시민으로서의 작은 열망, 자신이 죽은 이후에 아내와 아들에게 남겨줄 나름 넉넉한 유산 마련만 되면 손을 뗄 셈이었다. 하지만, 범죄의 늪은 월터를 본격적인 마약왕의 반열로 올려세웠고, 그 사실을 알게 된 아내가 이혼을 요구하고 별거에 들어가는 등, 본래 목적했던 소박한 꿈은 붕괴한다. 양심과 범법의 경계선 위에서 점점 월터는 부정적 방향으로 진화하는데, 이를 통해 드라마 《브레이킹 배드》는 오늘의 미국 사회가 직면한 그야말로 드라마 같은 몰락상을 극사실적으로 보여준다.


《브레이킹 배드》가 말하는 평범한 화학교사의 마약 제조는 더는 황당한 무용담이나 판타지가 아니었다. 성공은 고사하고 자유라는 명분 아래 모든 걸 자본주의의 무한 경쟁으로 몰아넣은, 소위 말하는 중산층이라 불리기 원하는 선진국 시민의 필연적 발작과 그 징후를 그 어떤 것보다 적실하게 묘파해 낸 메타포로 기능하는 것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 발작과 징후를 톺아보는 날카로운 시선이 사뭇 중요해지는 요즘이다.

2025. 03. 10.


출처 : 주간기독교(http://www.cnews.or.kr/news/articleView.html?idxno=32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