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국영 박사(기독인문학연구원 상임연구위원)
욥바에서 가이사랴 가는 길
룻다
예루살렘에서 유대 산지를 타고 서북쪽으로 내려오면 아이얄론 평지 가 펼쳐지면서 엠마오의 후보지 중 하나인 엠마오 니코폴리스(Emmaus- Nicopolis)에 이른다. 이곳에서 직선 거리로 약 15km를 더 가면 로드 (Lod)라는 도시가 나오는데, 이곳이 고대에 룻다(Lydda)라는 성읍이다. 이 성읍은 예나 지금이나 뛰어난 지정학적 위치에 있다. 유대 산지와 해안 지역의 중앙에 위치하여 사방으로 뻗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룻다는 아랍 인구가 많아 오늘날 유대인과 아랍인이 공존하는 대표적 도시다. 이천 년 전 룻다는 보수적 유대인의 색채가 강한 유대 중심 성읍이었다. 유대 역사 가 요세푸스(Josephus)에 의하면, 주 후 66년 유대인 1차 반란 당시 이 성 읍을 공격하려던 로마군은 성이 텅 비어 있음을 발견했다고 한다. 주민 대 부분이 장막절을 맞아 제사 드리러 예루살렘에 올라갔기 때문이다. 이러한 종교성 깊은 유대 도시 룻다에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있었다(행 9:32). 예수께서 승천하시고 몇 해 후,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초기 기독교 인은 모두 유대인이었다. 베드로가 룻다에서 애니아의 중풍병을 고쳐주었 을 때, 이들을 둘러싼 성도들은 모두 유대인이었을 것이다.
“베드로가 이르되 애니아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네 자 리를 정돈하라 한대 곧 일어나니 룻다와 사론에 사는 사람들이 다 그를 보고 주 께로 돌아오니라” (행 9:34-35)
예수가 누구신가 고백하는 부분에서 초기 유대 기독 공동체는 분명 일반 유대인과는 확연히 달랐다. 그러나 바벨론 포수 이후 육백여 년 동안 갈급 했던 메시아에 대한 열망 때문이었을까? 예수의 죽으심, 부활, 승천, 그리 고 죄 사함의 회개와 성령의 강력한 임재를 경험한 초기 유대 기독교인들 조차도 예수는 유대인의 메시아로 이 땅에 오셨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 었다(행 1:6). 예수께서는 유대인뿐 아니라 온 세상의 구세주로 이 땅에 오 셨고, 이미 공생애 동안에 이러한 하나님의 계획을 드러내셨다(마 28:19; 눅 13:29, 24:47; 요 8:11-12, 10:16; 행 1:8). 그런데도 많은 초기 유
대 기독교인들 머릿속에 예수의 구원은 유대인답게 할례 등 각종 모세의 율법 준수에 충실한 것이 전제 조건이라는 생각이 뿌리 박혀 있었다(행 15:1, 5; 21:20; 갈 2:11; 골 2:16). 이러한 이유로 당대 이방인의 눈에 초 기 기독교는 종종 유대교와 같은 범주로 취급되곤 했다.
피장 시몬의 집
룻다에서 욥바(Jaffa)로 가려면 북서쪽 방향 직선 거리로 18km 정도를 걸어야 한다. 베드로가 다비다의 죽음에 급박하게 부름을 받아 왔어도 반 나절 이상은 걸어야 하는 거리다. 오늘날 욥바에서 도르가(=다비다)의 집 이 어디에 있었는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해변 언덕 위에 서 있는 성 베드 로 교회는 죽은 다비다를 일으킨 사건을 기념한다. 고대 욥바 성의 북서쪽 가장자리에 자리 잡은 이 언덕 위에 서면, 발 아래 욥바 항구는 물론 이스 라엘 최대 도시 텔아비브의 길게 뻗은 해변을 볼 수 있다.
이 부근 어딘가에서 2,000년 전 풍경이 그려진다. 조밀하게 지어진 한
돌집의 이층 지붕 아래서 다시 살아난 도르가. 그리고 그 옆에 서서 예수 의 부활하심과 회개 촉구를 외치는 베드로. 이들을 보며 많은 욥바 사람이 주께로 돌아왔다(행 9:41-42). 욥바도 로마 시대 여느 해안 도시와 같이 여러 인종이 거주했겠지만, 유대인 1차 반란 초기 유대인 8,000명이 몰살 당했다는 기록에서 보듯 유대인 비중이 상당했던 도시다. 욥바 거주 유대 인 중에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있었고, 베드로는 신자였을 피장 시몬의 집 에 며칠을 유숙하게 된다. 사도행전에 의하면 피장 시몬의 집은 해변에 있 었다고 한다(행 10:6). 오늘날 항구로 내려가는 계단 초입에 ‘피장 시몬의 집’(House of Simon, the Tanner)이라는 팻말이 붙은 모스크가 있으나 그 명확한 근거를 찾기는 어렵다. 시몬의 집 지붕에서 베드로는 정오 시간 에 맞춰 기도하게 된다. 가죽을 가공하는 역한 냄새와 지중해 해변의 따가 운 열기가 느껴지는 듯하다. 그리고 그는 환상을 보게 된다.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웠더라 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종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더라 또 소리가 있으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어라 하거늘” (행: 10:11-13)
베드로가 이 환상의 의미에 대해 골몰하고 있을 무렵, 집 앞에는 가이사 랴에서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당도했다. 당시에는 유대교에 귀의하거 나 고넬료처럼 호의를 가지는 이방인들이 꽤 있었다. 이방인 백부장이었 던 고넬료는 하나님을 경외했지만, 유대인과 똑같은 법적 권리를 가진 ‘완 전 개종자’(righteous proselyte)는 아니었다. 이방에 관한 부정적 개념은 원래 구약 시대에 이방신을 섬기는 풍습을 경계하는 데서 비롯되었다(레 18:24-30; 스 9:1-2; 느 13:23-27). 그러나 신약 시대에는 이 개념이 일상 을 지배하는 정결 규례로 확대되었고, 유대인과 이방인 간 교제도 금지되 는 상황이었다. 구원이 유대인에게만 있다고 생각하는 초기 유대 기독 공 동체의 관념. 그리고 유대인은 유대인의 법을 지켜야 한다는 강박. 이러한 상황은 비록 베드로라 할지라도 이방인 고넬료를 만나는 것을 주저케 했을 것이다(행 10:28). 그러나 이 보여주신 환상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욥바 항구
이튿날 아침, 베드로는 모든 의문을 덮어두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좇아 유대인 형제 및 고넬료의 사람들과 함께 가이사랴로 길을 나서기로 한다. 욥바 항구를 뒤로하며 바라보는 팔레스타인의 지중해 해안선은 무척이 나 단조롭다. 이러한 단조로움으로 인해 팔레스타인의 해변은 전체적으로 항구 입지가 열악한 편이다. 이러한 이유로 돌출 언덕이 커브를 형성하는 욥바 앞바다에는 이미 중기 청동기 시대부터 항구 도시가 형성되었고, 가
나안과 이스라엘 시대에 팔레스타인 해상 무역과 운송 의 주요 역할을 담당했다. 약 3,000년 전 두로의 배들이 이 앞바다를 통해 예루살렘 으로 갈 백향목을 운반했고 (대하 2:16), 그로부터 수백 년 후 요나는 이 앞바다를 떠 나 다시스로 향하는 배 밑바 닥에서 안도와 불안이 교차 하며 잠을 뒤척였을 것이다 (욘 1:3) 욥바향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항구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지만, 오늘날 항구의 모습은 아담한 어촌 풍경이다. 수천 년 전 두 꺼운 성벽을 두르고 지중해 전역과 교류하던 고대 성읍의 모습은 오늘날 현대 주거지에 파묻혀 그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다. 집 더미로 덮인 욥바 언덕 아래에 4,000여 년의 거주 층위들이 고스란히 쌓여 있다. 가나안, 블 레셋, 이스라엘, 페니키아, 헬라, 로마, 아랍. 그리고 그 사이 어딘가에 도 르가와 피장 시몬의 집도 잠자고 있을 것이다.
욥바를 떠나는 발걸음 내내 베드로 머릿속을 맴도는 부정한 음식에 대 한 환상. 왜 먹으라고 하셨을까? 공생애 중 예수께서 하셨던 말씀 중에 힌 트는 없었을까? 베드로의 머릿속은 여전히 혼란스럽지만,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곳으로 이끄시겠다는 주님의 말씀을 떠올렸는지도 모른다(요 21:1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도 이렇게 깨달음이 없느냐 무엇이든지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함을 알지 못하느냐 이는 마음으로 들어 가지 아니하고 배로 들어가 뒤로 나감이라 이러므로 모든 음식물을 깨끗하다 하시니라 또 이르시되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막 7:18-20)
동지중해 해변길
로마 제국이 팔레스타인을 점령하면서 그 해안 지역에는 지정학적 변화 가 생긴다. 주전 22년부터 로마의 꼭두각시 헤롯 대왕이 그리스-로마 지 역과의 연결을 긴밀하게 하고자 가이사랴에 대규모 인공 항구를 건설했 고, 이후 가이사랴 항구는 욥바를 대신하여 600여 년간 이 지역 최고의 항 구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그리고 가이사랴 항구가 부상하면서 욥바항은 이 일대 핵심 항구로서의 지위를 상실하게 된다.
가이사랴와 욥바는 60km 정도 거리다. 로마 시대에는 가이사랴와 욥바 를 잇는 두 주요 루트가 있었다. 먼저, 해안선을 따르는 일명 ‘해변길’이 있 었는데, 이 길은 시리아의 행정 수도 안디옥에서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에 이르는 긴 해안 도로의 일부를 형성했다. 또 다른 하나는 고대 근동의 대표적 국제 도로인 ‘바닷길(Via Maris)’을 따라 사마리아 산지의 서쪽 산 기슭을 타고 안티파트리스(=아벡)를 거쳤다. 로마인 입장에서는 더 안전 하고 잘 정비된 후자의 길을 선호할 수 있지만, 바닷길 루트는 해변길보다 약 10km를 더 가야 한다. 도보로 이동하는 베드로 일행 입장에서는 해변 길이 더 좋은 선택이었을 것이다.
해변길을 따라 북상하는 길은 단조롭지만 상쾌하다. 왼편으로는 지중 해 바다 풍경이 있고 오른편으로는 수목이 울창하다. 길 주위로 이따금 습 지도 보인다. 야트막한 붉은 모래 언덕과 관목이 뒤섞인 해변 사이로 걸음을 옮기는 베드로 일행을 보는 듯하다. 자동차 해안 도로의 서쪽 을 달리는 이 고대 로마의 해변길 흔적은 오늘날 현대 도시에 파묻혀 거의 사라졌다. 그러나 이 해변을 따라 로마 시대 작은 항구의 흔적이나 요새는 이따금 발견되고, 그중에는 아폴로니아(Apollonia-Arsuf)와 같이 제법 번 성했던 항구 성읍도 있다. 아폴로니아 너머 어딘가에 베드로 일행이 하룻 밤 묵어갈 마을도 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샤론 평원
욥바에서 약 5~6km 정도 이동하면, 야르콘 강(Yarkon River)을 마주 대한다. 야르콘 강은 강폭이 평균 10~30m인데, 건조한 팔레스타인 지역
으로서는 상당한 규모다. 동쪽으로 강의 상류를 따라 약 27km를 가면 이
강의 수원지이자 고대 교통의 요충지인 안티파트리스(Antipatris)에 이른 다. 안티파트리스는 구약 시대에 아벡(Aphek)이라 불렸다. 바로 동편 인 근에 에벤에셀(Ebenezer)의 추정지가 있어 블레셋에 법궤를 빼앗겼던 현 장임을 알려준다. 안티파트리스는 헤롯 대왕이 건립한 로마식 도시로, 로 마 시대에 예루살렘과 가이사랴를 연결하는 중간 기착지였다. 사도 바울 도 예루살렘에서 이곳을 거쳐 가이사랴로 호송되었다(행 23:31).
안티파트리스에서 지중해로 흘러드는 야르콘 강줄기는 샤론 평원의 남 쪽 경계를 형성한다. 샤론 평원(Plain of Sharon)은 팔레스타인의 중서부 해안평야 지역이다. 북쪽으로 갈멜산, 서쪽으로 지중해에 이르고 동쪽은 사마리아 산지 서쪽 기슭에 접해 있다. 성경에는 이 평원을 ‘사론’이라고 부른다. 복잡한 역사적 배경을 지닌 이곳은 로마 시대에 여러 인종이 거주하는 지역이었고, 사마리아 산지가 가까우므로 사마리아인의 수도 상당했을 것이다.
오늘날 샤론 평원 일대는 이스라엘에서 가장 인구 밀도가 높고 도시가 발달한 지역이다. 고대에 샤론 평원은 아름다운 땅이었지만(아 2:1; 사 35:2), 지형상 배수가 잘되지 않아 습지가 많고, 떡갈나무나 상수리 등이 빽빽하여 주로 가축을 방목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다고 한다(대상 27:29; 사 65:10). 샤론 평원의 양 떼를 바라보며, 양을 비유로 자주 이야기하시 던 예수의 한말씀이 문득 떠오른다.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요 10:16)
샤론 평원은 무엇보다도 전략적 요충 지대다. 고대로부터 이집트와 시 리아-메소포타미아 사이를 지나는 바닷길(Via Maris)이 이 평원을 지났 다. 평화 시에는 상인이 오가고 문물이 교류되었지만, 전쟁 시에는 군대가 이동했다. 평원에서 북상하여 바닷길을 따라 갈멜산 동편을 돌면 지구 최 후의 전장이라 일컬어지는 므깃도, 곧 아마겟돈에 이른다. 이러한 샤론 평 원의 전략적 이점을 극대화해 개발한 이가 헤롯 대왕이다. 헤롯의 여러 토 목 사업 중에서도 특히 가이사랴 건설은 그 인접 지역인 샤론의 판도는 물 론, 팔레스타인 전역의 지정학적 틀을 바꾸는 중대한 사건이었다. 가이사 랴 항구를 통해 로마의 팔레스타인 직접 상륙이 용이해지면서, 팔레스타 인 모든 지역에 대해 뛰어난 접근성을 가진 샤론 평원을 거쳐 지역 전체를 통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훗날 유대인 1차 반란을 진압하러 온 로마 사 령관 베스파시아누스(Vespasian)도 가이사랴를 중심 기지로 삼아 팔레스 타인 전역을 공략하게 된다.
가이사랴
주 후 6년부터 로마가 팔레스타인 지역을 직접 통치하게 되면서 가이사 랴는 수백 년간 이 지역의 행정 수도 역할을 하게 된다. 가이사랴의 외형 은 전형적인 로마 도시의 형식을 좇았다. 남북 방향 대로(Cardo)와 동서 방향 간선로(Decumanus)를 중심으로 연극장, 마차 경기장, 신전, 포럼, 수로 등 로마식 건축 요소들이 자리 잡았고, 바둑판 모양으로 구획된 공간 에는 거주 지역이 사회, 경제적 신분에 따라 배치되었다. 12만 명이 넘는 것으로 추정되는 가이사랴 인구 중에는 로마인과 헬라인 뿐 아니라 유대 인을 비롯한 다른 인종들도 포함되어 있어 복합적 성격을 띠었다.
이틀을 꼬박 걸어온 베드 로 일행은 거대 도시 가이사 랴의 남쪽 성문을 통과하여 어느덧 성문 광장에 다다르 게 된다. 여기서 1km 남짓 남북으로 곧게 뻗은 카르도 를 마주 대한다. 서쪽으로는 연극장(Theatre)과 그 너머 집무센터(Praetorium)와 총 독 관저가 있다. 행정센터 옆 에는 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원형경기장(Amphitheatre) 이 있어 이 일대 원근 각지의 로마인, 헬라인, 페니키아인들이 볼거리를 좇아 몰려들었을 것이다. 원형경기장 너머 북쪽에는 거대한 항구의 등대 불빛이 커지고, 항구 선착장 중앙에는 로마 제국의 안녕을 기원하는 거대한 신전이 세 워져 있다. 석회암과 사암으로 이루어진 이 거대 도시 풍경에서 고넬료의 집이 어디인지 명확히 알 수는 없다. 그러나 로마군 백부장이라는 신분으 로 추정컨대, 총독의 집무센터(Praetorium)가 있는 도시 남서쪽의 궁전 지역이나 항구 인근 거주 구역인 북서쪽일 가능성도 없지 않다.
행정 수도이자 상업 도시인 가이사랴에 거주하던 유대인은 상업, 무역, 행정, 법률 등 다양한 직종에 종사했을 것이다. 또한 비록 이방인과 한 도 시에서 함께 살았지만, 회당을 중심으로 유대적 정체성과 규례를 지키고 자 했을 것이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가이사랴에 거주하는 헬 라인과 유대인은 앙숙 관계였다. 이들 간의 분쟁은 주 후 66년 유대인 1차 반란 발생에 중요한 단초를 제공했는데, 그 분쟁의 시발점은 유대 회당 옆 에서 이방 제물을 드리는 행위를 통해 ‘이방’과 ‘부정함’에 민감한 유대인 의 노를 격발했기 때문이다.
어느덧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 이르렀을 때, 고넬료를 비롯한 많은 이 방인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방인과 교제한다는 소문은 베드로에게 난감한 일이었다(행 10:28; 갈 2:11-14). 그러나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 하여, 산 자와 죽은 자의 심판자가 누구인지, 또 예수의 이름을 힘입는 죄 사함이 무엇인지 저들에게 전하기 시작한다(행 10:42-43). 그리고 놀랍게 도, 말씀을 듣는 이 이방인 무리에게도 유대 기독교인과 동일한 성령 부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목도하게 된다. 구원의 말씀, 생명 얻는 회개, 그 리고 성령의 선물은 유대인만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해주시는 ‘충격적인’ 순간이었다(행 11:14-18). 이는 곧 유대인 신분의 상⑨인 할례 와 모세의 규례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하는 것이었다(행 15:7-11).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 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 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롬 1:16-17)
하나님의 언약, 백성,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2,000년 전 고대 팔레스타 인 땅에 유대 민족의 혈통으로 오신 예수께서 오늘날 먼 동쪽 한반도에 살 고 있는 한국 기독교인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 다시금 깨닫는 순간이기도 하다.
“호세아의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하지 아 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그들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롬 9:25-26)
2025. 04. 02.
출처: 교회설장연구소(portal.icg21.com/board/board.php?bbs_id=humanities&ptype=view&kbbs_doc_num=109)
윤국영 박사(기독인문학연구원 상임연구위원)
욥바에서 가이사랴 가는 길
룻다
예루살렘에서 유대 산지를 타고 서북쪽으로 내려오면 아이얄론 평지 가 펼쳐지면서 엠마오의 후보지 중 하나인 엠마오 니코폴리스(Emmaus- Nicopolis)에 이른다. 이곳에서 직선 거리로 약 15km를 더 가면 로드 (Lod)라는 도시가 나오는데, 이곳이 고대에 룻다(Lydda)라는 성읍이다. 이 성읍은 예나 지금이나 뛰어난 지정학적 위치에 있다. 유대 산지와 해안 지역의 중앙에 위치하여 사방으로 뻗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룻다는 아랍 인구가 많아 오늘날 유대인과 아랍인이 공존하는 대표적 도시다. 이천 년 전 룻다는 보수적 유대인의 색채가 강한 유대 중심 성읍이었다. 유대 역사 가 요세푸스(Josephus)에 의하면, 주 후 66년 유대인 1차 반란 당시 이 성 읍을 공격하려던 로마군은 성이 텅 비어 있음을 발견했다고 한다. 주민 대 부분이 장막절을 맞아 제사 드리러 예루살렘에 올라갔기 때문이다. 이러한 종교성 깊은 유대 도시 룻다에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있었다(행 9:32). 예수께서 승천하시고 몇 해 후,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초기 기독교 인은 모두 유대인이었다. 베드로가 룻다에서 애니아의 중풍병을 고쳐주었 을 때, 이들을 둘러싼 성도들은 모두 유대인이었을 것이다.
“베드로가 이르되 애니아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네 자 리를 정돈하라 한대 곧 일어나니 룻다와 사론에 사는 사람들이 다 그를 보고 주 께로 돌아오니라” (행 9:34-35)
예수가 누구신가 고백하는 부분에서 초기 유대 기독 공동체는 분명 일반 유대인과는 확연히 달랐다. 그러나 바벨론 포수 이후 육백여 년 동안 갈급 했던 메시아에 대한 열망 때문이었을까? 예수의 죽으심, 부활, 승천, 그리 고 죄 사함의 회개와 성령의 강력한 임재를 경험한 초기 유대 기독교인들 조차도 예수는 유대인의 메시아로 이 땅에 오셨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 었다(행 1:6). 예수께서는 유대인뿐 아니라 온 세상의 구세주로 이 땅에 오 셨고, 이미 공생애 동안에 이러한 하나님의 계획을 드러내셨다(마 28:19; 눅 13:29, 24:47; 요 8:11-12, 10:16; 행 1:8). 그런데도 많은 초기 유
대 기독교인들 머릿속에 예수의 구원은 유대인답게 할례 등 각종 모세의 율법 준수에 충실한 것이 전제 조건이라는 생각이 뿌리 박혀 있었다(행 15:1, 5; 21:20; 갈 2:11; 골 2:16). 이러한 이유로 당대 이방인의 눈에 초 기 기독교는 종종 유대교와 같은 범주로 취급되곤 했다.
피장 시몬의 집
룻다에서 욥바(Jaffa)로 가려면 북서쪽 방향 직선 거리로 18km 정도를 걸어야 한다. 베드로가 다비다의 죽음에 급박하게 부름을 받아 왔어도 반 나절 이상은 걸어야 하는 거리다. 오늘날 욥바에서 도르가(=다비다)의 집 이 어디에 있었는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해변 언덕 위에 서 있는 성 베드 로 교회는 죽은 다비다를 일으킨 사건을 기념한다. 고대 욥바 성의 북서쪽 가장자리에 자리 잡은 이 언덕 위에 서면, 발 아래 욥바 항구는 물론 이스 라엘 최대 도시 텔아비브의 길게 뻗은 해변을 볼 수 있다.
이 부근 어딘가에서 2,000년 전 풍경이 그려진다. 조밀하게 지어진 한
돌집의 이층 지붕 아래서 다시 살아난 도르가. 그리고 그 옆에 서서 예수 의 부활하심과 회개 촉구를 외치는 베드로. 이들을 보며 많은 욥바 사람이 주께로 돌아왔다(행 9:41-42). 욥바도 로마 시대 여느 해안 도시와 같이 여러 인종이 거주했겠지만, 유대인 1차 반란 초기 유대인 8,000명이 몰살 당했다는 기록에서 보듯 유대인 비중이 상당했던 도시다. 욥바 거주 유대 인 중에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있었고, 베드로는 신자였을 피장 시몬의 집 에 며칠을 유숙하게 된다. 사도행전에 의하면 피장 시몬의 집은 해변에 있 었다고 한다(행 10:6). 오늘날 항구로 내려가는 계단 초입에 ‘피장 시몬의 집’(House of Simon, the Tanner)이라는 팻말이 붙은 모스크가 있으나 그 명확한 근거를 찾기는 어렵다. 시몬의 집 지붕에서 베드로는 정오 시간 에 맞춰 기도하게 된다. 가죽을 가공하는 역한 냄새와 지중해 해변의 따가 운 열기가 느껴지는 듯하다. 그리고 그는 환상을 보게 된다.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웠더라 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종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더라 또 소리가 있으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어라 하거늘” (행: 10:11-13)
베드로가 이 환상의 의미에 대해 골몰하고 있을 무렵, 집 앞에는 가이사 랴에서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당도했다. 당시에는 유대교에 귀의하거 나 고넬료처럼 호의를 가지는 이방인들이 꽤 있었다. 이방인 백부장이었 던 고넬료는 하나님을 경외했지만, 유대인과 똑같은 법적 권리를 가진 ‘완 전 개종자’(righteous proselyte)는 아니었다. 이방에 관한 부정적 개념은 원래 구약 시대에 이방신을 섬기는 풍습을 경계하는 데서 비롯되었다(레 18:24-30; 스 9:1-2; 느 13:23-27). 그러나 신약 시대에는 이 개념이 일상 을 지배하는 정결 규례로 확대되었고, 유대인과 이방인 간 교제도 금지되 는 상황이었다. 구원이 유대인에게만 있다고 생각하는 초기 유대 기독 공 동체의 관념. 그리고 유대인은 유대인의 법을 지켜야 한다는 강박. 이러한 상황은 비록 베드로라 할지라도 이방인 고넬료를 만나는 것을 주저케 했을 것이다(행 10:28). 그러나 이 보여주신 환상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욥바 항구
이튿날 아침, 베드로는 모든 의문을 덮어두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좇아 유대인 형제 및 고넬료의 사람들과 함께 가이사랴로 길을 나서기로 한다. 욥바 항구를 뒤로하며 바라보는 팔레스타인의 지중해 해안선은 무척이 나 단조롭다. 이러한 단조로움으로 인해 팔레스타인의 해변은 전체적으로 항구 입지가 열악한 편이다. 이러한 이유로 돌출 언덕이 커브를 형성하는 욥바 앞바다에는 이미 중기 청동기 시대부터 항구 도시가 형성되었고, 가
나안과 이스라엘 시대에 팔레스타인 해상 무역과 운송 의 주요 역할을 담당했다. 약 3,000년 전 두로의 배들이 이 앞바다를 통해 예루살렘 으로 갈 백향목을 운반했고 (대하 2:16), 그로부터 수백 년 후 요나는 이 앞바다를 떠 나 다시스로 향하는 배 밑바 닥에서 안도와 불안이 교차 하며 잠을 뒤척였을 것이다 (욘 1:3) 욥바향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항구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지만, 오늘날 항구의 모습은 아담한 어촌 풍경이다. 수천 년 전 두 꺼운 성벽을 두르고 지중해 전역과 교류하던 고대 성읍의 모습은 오늘날 현대 주거지에 파묻혀 그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다. 집 더미로 덮인 욥바 언덕 아래에 4,000여 년의 거주 층위들이 고스란히 쌓여 있다. 가나안, 블 레셋, 이스라엘, 페니키아, 헬라, 로마, 아랍. 그리고 그 사이 어딘가에 도 르가와 피장 시몬의 집도 잠자고 있을 것이다.
욥바를 떠나는 발걸음 내내 베드로 머릿속을 맴도는 부정한 음식에 대 한 환상. 왜 먹으라고 하셨을까? 공생애 중 예수께서 하셨던 말씀 중에 힌 트는 없었을까? 베드로의 머릿속은 여전히 혼란스럽지만,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곳으로 이끄시겠다는 주님의 말씀을 떠올렸는지도 모른다(요 21:1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도 이렇게 깨달음이 없느냐 무엇이든지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함을 알지 못하느냐 이는 마음으로 들어 가지 아니하고 배로 들어가 뒤로 나감이라 이러므로 모든 음식물을 깨끗하다 하시니라 또 이르시되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막 7:18-20)
동지중해 해변길
로마 제국이 팔레스타인을 점령하면서 그 해안 지역에는 지정학적 변화 가 생긴다. 주전 22년부터 로마의 꼭두각시 헤롯 대왕이 그리스-로마 지 역과의 연결을 긴밀하게 하고자 가이사랴에 대규모 인공 항구를 건설했 고, 이후 가이사랴 항구는 욥바를 대신하여 600여 년간 이 지역 최고의 항 구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그리고 가이사랴 항구가 부상하면서 욥바항은 이 일대 핵심 항구로서의 지위를 상실하게 된다.
가이사랴와 욥바는 60km 정도 거리다. 로마 시대에는 가이사랴와 욥바 를 잇는 두 주요 루트가 있었다. 먼저, 해안선을 따르는 일명 ‘해변길’이 있 었는데, 이 길은 시리아의 행정 수도 안디옥에서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에 이르는 긴 해안 도로의 일부를 형성했다. 또 다른 하나는 고대 근동의 대표적 국제 도로인 ‘바닷길(Via Maris)’을 따라 사마리아 산지의 서쪽 산 기슭을 타고 안티파트리스(=아벡)를 거쳤다. 로마인 입장에서는 더 안전 하고 잘 정비된 후자의 길을 선호할 수 있지만, 바닷길 루트는 해변길보다 약 10km를 더 가야 한다. 도보로 이동하는 베드로 일행 입장에서는 해변 길이 더 좋은 선택이었을 것이다.
해변길을 따라 북상하는 길은 단조롭지만 상쾌하다. 왼편으로는 지중 해 바다 풍경이 있고 오른편으로는 수목이 울창하다. 길 주위로 이따금 습 지도 보인다. 야트막한 붉은 모래 언덕과 관목이 뒤섞인 해변 사이로 걸음을 옮기는 베드로 일행을 보는 듯하다. 자동차 해안 도로의 서쪽 을 달리는 이 고대 로마의 해변길 흔적은 오늘날 현대 도시에 파묻혀 거의 사라졌다. 그러나 이 해변을 따라 로마 시대 작은 항구의 흔적이나 요새는 이따금 발견되고, 그중에는 아폴로니아(Apollonia-Arsuf)와 같이 제법 번 성했던 항구 성읍도 있다. 아폴로니아 너머 어딘가에 베드로 일행이 하룻 밤 묵어갈 마을도 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샤론 평원
욥바에서 약 5~6km 정도 이동하면, 야르콘 강(Yarkon River)을 마주 대한다. 야르콘 강은 강폭이 평균 10~30m인데, 건조한 팔레스타인 지역
으로서는 상당한 규모다. 동쪽으로 강의 상류를 따라 약 27km를 가면 이
강의 수원지이자 고대 교통의 요충지인 안티파트리스(Antipatris)에 이른 다. 안티파트리스는 구약 시대에 아벡(Aphek)이라 불렸다. 바로 동편 인 근에 에벤에셀(Ebenezer)의 추정지가 있어 블레셋에 법궤를 빼앗겼던 현 장임을 알려준다. 안티파트리스는 헤롯 대왕이 건립한 로마식 도시로, 로 마 시대에 예루살렘과 가이사랴를 연결하는 중간 기착지였다. 사도 바울 도 예루살렘에서 이곳을 거쳐 가이사랴로 호송되었다(행 23:31).
안티파트리스에서 지중해로 흘러드는 야르콘 강줄기는 샤론 평원의 남 쪽 경계를 형성한다. 샤론 평원(Plain of Sharon)은 팔레스타인의 중서부 해안평야 지역이다. 북쪽으로 갈멜산, 서쪽으로 지중해에 이르고 동쪽은 사마리아 산지 서쪽 기슭에 접해 있다. 성경에는 이 평원을 ‘사론’이라고 부른다. 복잡한 역사적 배경을 지닌 이곳은 로마 시대에 여러 인종이 거주하는 지역이었고, 사마리아 산지가 가까우므로 사마리아인의 수도 상당했을 것이다.
오늘날 샤론 평원 일대는 이스라엘에서 가장 인구 밀도가 높고 도시가 발달한 지역이다. 고대에 샤론 평원은 아름다운 땅이었지만(아 2:1; 사 35:2), 지형상 배수가 잘되지 않아 습지가 많고, 떡갈나무나 상수리 등이 빽빽하여 주로 가축을 방목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다고 한다(대상 27:29; 사 65:10). 샤론 평원의 양 떼를 바라보며, 양을 비유로 자주 이야기하시 던 예수의 한말씀이 문득 떠오른다.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요 10:16)
샤론 평원은 무엇보다도 전략적 요충 지대다. 고대로부터 이집트와 시 리아-메소포타미아 사이를 지나는 바닷길(Via Maris)이 이 평원을 지났 다. 평화 시에는 상인이 오가고 문물이 교류되었지만, 전쟁 시에는 군대가 이동했다. 평원에서 북상하여 바닷길을 따라 갈멜산 동편을 돌면 지구 최 후의 전장이라 일컬어지는 므깃도, 곧 아마겟돈에 이른다. 이러한 샤론 평 원의 전략적 이점을 극대화해 개발한 이가 헤롯 대왕이다. 헤롯의 여러 토 목 사업 중에서도 특히 가이사랴 건설은 그 인접 지역인 샤론의 판도는 물 론, 팔레스타인 전역의 지정학적 틀을 바꾸는 중대한 사건이었다. 가이사 랴 항구를 통해 로마의 팔레스타인 직접 상륙이 용이해지면서, 팔레스타 인 모든 지역에 대해 뛰어난 접근성을 가진 샤론 평원을 거쳐 지역 전체를 통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훗날 유대인 1차 반란을 진압하러 온 로마 사 령관 베스파시아누스(Vespasian)도 가이사랴를 중심 기지로 삼아 팔레스 타인 전역을 공략하게 된다.
가이사랴
주 후 6년부터 로마가 팔레스타인 지역을 직접 통치하게 되면서 가이사 랴는 수백 년간 이 지역의 행정 수도 역할을 하게 된다. 가이사랴의 외형 은 전형적인 로마 도시의 형식을 좇았다. 남북 방향 대로(Cardo)와 동서 방향 간선로(Decumanus)를 중심으로 연극장, 마차 경기장, 신전, 포럼, 수로 등 로마식 건축 요소들이 자리 잡았고, 바둑판 모양으로 구획된 공간 에는 거주 지역이 사회, 경제적 신분에 따라 배치되었다. 12만 명이 넘는 것으로 추정되는 가이사랴 인구 중에는 로마인과 헬라인 뿐 아니라 유대 인을 비롯한 다른 인종들도 포함되어 있어 복합적 성격을 띠었다.
이틀을 꼬박 걸어온 베드 로 일행은 거대 도시 가이사 랴의 남쪽 성문을 통과하여 어느덧 성문 광장에 다다르 게 된다. 여기서 1km 남짓 남북으로 곧게 뻗은 카르도 를 마주 대한다. 서쪽으로는 연극장(Theatre)과 그 너머 집무센터(Praetorium)와 총 독 관저가 있다. 행정센터 옆 에는 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원형경기장(Amphitheatre) 이 있어 이 일대 원근 각지의 로마인, 헬라인, 페니키아인들이 볼거리를 좇아 몰려들었을 것이다. 원형경기장 너머 북쪽에는 거대한 항구의 등대 불빛이 커지고, 항구 선착장 중앙에는 로마 제국의 안녕을 기원하는 거대한 신전이 세 워져 있다. 석회암과 사암으로 이루어진 이 거대 도시 풍경에서 고넬료의 집이 어디인지 명확히 알 수는 없다. 그러나 로마군 백부장이라는 신분으 로 추정컨대, 총독의 집무센터(Praetorium)가 있는 도시 남서쪽의 궁전 지역이나 항구 인근 거주 구역인 북서쪽일 가능성도 없지 않다.
행정 수도이자 상업 도시인 가이사랴에 거주하던 유대인은 상업, 무역, 행정, 법률 등 다양한 직종에 종사했을 것이다. 또한 비록 이방인과 한 도 시에서 함께 살았지만, 회당을 중심으로 유대적 정체성과 규례를 지키고 자 했을 것이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가이사랴에 거주하는 헬 라인과 유대인은 앙숙 관계였다. 이들 간의 분쟁은 주 후 66년 유대인 1차 반란 발생에 중요한 단초를 제공했는데, 그 분쟁의 시발점은 유대 회당 옆 에서 이방 제물을 드리는 행위를 통해 ‘이방’과 ‘부정함’에 민감한 유대인 의 노를 격발했기 때문이다.
어느덧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 이르렀을 때, 고넬료를 비롯한 많은 이 방인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방인과 교제한다는 소문은 베드로에게 난감한 일이었다(행 10:28; 갈 2:11-14). 그러나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 하여, 산 자와 죽은 자의 심판자가 누구인지, 또 예수의 이름을 힘입는 죄 사함이 무엇인지 저들에게 전하기 시작한다(행 10:42-43). 그리고 놀랍게 도, 말씀을 듣는 이 이방인 무리에게도 유대 기독교인과 동일한 성령 부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목도하게 된다. 구원의 말씀, 생명 얻는 회개, 그 리고 성령의 선물은 유대인만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해주시는 ‘충격적인’ 순간이었다(행 11:14-18). 이는 곧 유대인 신분의 상⑨인 할례 와 모세의 규례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하는 것이었다(행 15:7-11).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 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 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롬 1:16-17)
하나님의 언약, 백성,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2,000년 전 고대 팔레스타 인 땅에 유대 민족의 혈통으로 오신 예수께서 오늘날 먼 동쪽 한반도에 살 고 있는 한국 기독교인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 다시금 깨닫는 순간이기도 하다.
“호세아의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하지 아 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그들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롬 9:25-26)
2025. 04. 02.
출처: 교회설장연구소(portal.icg21.com/board/board.php?bbs_id=humanities&ptype=view&kbbs_doc_num=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