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증오 그 사이 사랑
조영호 교수(안양대학교겸임교수,기독인문학연구원상임연구위원)
우리는 종종 사랑이 증오로 변하는 것을 경험한다. 예를 들어 아이돌 연예인을 좋아하는 ‘사생팬’이 가장 격렬한 ‘안티팬’으로 변한다는 것 등이다.
사랑이 대상자를 아끼며 잘되기를 바라는 관심이라면, 증오는 상대에게 위해를 가하며 잘되지 않기를 바라는 관심이다. 그래서 막스 셀러(Max Scheler)는 “사랑과 미움은 서로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존재나 사건이 파괴되거나 사라지는 것에 대한 사랑이 곧 미움이다”라고 했는지 모르겠다. 이처럼 사랑과 증오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관계를 맺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사랑은 왜 쉽게 증오로 변하는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해 프로이드(Sigmund Freud)는 ‘리비도(libido)’로 설명했다. 리비도는 대상에 대한 충동적 사랑을 말한다. 충동적 사랑은 대상을 향해 승화되거나 억제해야 한다. 목표를 잃은 리비도는 대상은 물론 자신까지 파괴하기 때문이다. 이 충동적 사랑이 조절되지 않을 때 문제가 발생한다.
에밀리 브론테(Emily Jane Bronte)의 『폭풍의 언덕』은 사랑과 증오가 함께 춤추는 모습을 통해 사랑이 왜 종종 실패하고 상대에 대한 증오로 이어지는지 잘 보여준다.
1. 폭풍우 치는 요크셔
주인공 언쇼는 리버풀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한 소년을 데려온다.
이 고아 소년에게 ‘히스클리프’라는 죽은 아들의 이름을 붙여주고 위더링 하이츠에서 함께 살도록 한다. 언쇼와 그의 딸 캐서린은 히스클리프에게 호감을 느끼지만, 아들 힌들리는 히스클리프를 질투하며 미워한다. 그리고 캐서린은 히스클리프를 사랑하며 “히스클리프는 나와 같아”라고 말한다.
프로이드는 대상을 향한 성애적 충동 즉, 리비도는 자신을 사랑하는 경향을 띤다고 말했다. 이상형은 결국 내가 만들어 낸 것이지 대상으로부터 기인한 것은 아니다. 나의 이상형은 이상적인 자아의 또 다른 모습이다. 언쇼가 죽은 이후 캐서린과 히스클리프의 사랑은 캐서린이 상실한 그 무엇을 되찾는 과정이었다. 오빠 힌들리의 가부장적 속박에서 벗어나 죽은 아버지를 되찾고 싶은 욕망이 히스클리프에 대한 사랑으로 드러났다. 힌들리가 히스클리프를 학대할수록 캐서린은 히스클리프를 사랑했다. 이들의 사랑에는 장애가 없는 듯 보였다.
그러던 어느 날, 캐서린은 린튼가에서 개에게 물리는 사고를 당하고 린튼가에 머무르며 치료받게 된다. 린튼가에 머무르는 동안 우아한 상류층 생활에 익숙해진 캐서린, 다시 만난 히스클리프의 더러운 모습을 보자 타박을 한다. 이에 히스클리프는 “더러운 건 내 맘이야. 나는 더러운 게 좋아!”라고 대답한다.
캐서린에게 호감이 생긴 린튼은 청혼을 하고, 히스클리프는 캐서린이 자신에 대해 넬리에게 하는 이야기를 엿듣게 된다. “지금 히스클리프와 결혼한다면 격이 떨어져.” 자신과 결혼하면 천해질 것이라는 캐서린의 말에 히스클리프는 상심하여 자리를 뜨고, 이내 언쇼가를 떠난다. 그 때문에 캐서린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진짜 마음을 표현한 뒷이야기를 듣지 못한다.
“지금 히스클리프와 결혼한다면 격이 떨어져. 그래서 내가 얼마나 사랑
하는지 그에게 알릴 수가 없어. 히스클리프가 잘생겼기 때문이 아니야. 넬
리, 그가 나보다도 더 나 자신과 같기 때문이야. 우리의 영혼이 무엇으로
되어 있든 그의 영혼과 내 영혼은 같은 것이고, 린튼의 영혼은 달빛과 번
개 그리고 서리와 불같이 전혀 다른 거야.”
히스클리프는 자신을 천하게 대우한 힌들리와 비참하게 자신을 버린 캐서린에게 증오를 품고, 캐서린은 아무런 말도 없이 떠난 히스클리프를 그리워하며 힘들어한다. 오빠 힌들리의 학대를 오롯이 홀로 견뎌내던 캐서린은 지속적으로 구애하는 린튼과 결혼한다.
3년 후, 자수성가한 사업가가 되어 돌아온 히스클리프. 그의 매력에 빠져든 린튼의 여동생 이사벨라는 히스클리프를 사랑하게 되고, 캐서린은 그런 이사벨라를 질투하며 히스클리프를 원망한다. 이사벨라와 결혼한 히스클리프는 언쇼가의 저택 워더링 하이츠에서 생활한다. 자신을 학대하던
힌들리에게 일부러 돈을 빌려주며 도박에 빠지게 한 뒤 파멸시킨 히스클리프는 결국 워더링 하이츠를 차지한다. 캐서린은 히스클리프에 대한 연민으로 괴로워하다가 딸 캐시를 낳고 숨진다. 히스클리프의 아내 이사벨라 역시 남편의 학대를 견디지 못해 집을 나가고, 아들을 낳아 기르다가 세상을 떠난다.
히스클리프와 캐서린 사이의 어긋난 사랑은 린튼, 언쇼 두 가문의 몰락으로 마무리된다.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목숨까지 걸었던 냉혹한 한 인간
의 애증과 야심 때문에 두 가문이 몰락까지 하게 된 것이다. 이 소설에서 우리가 눈여겨볼 점은 캐서린과 히스클리프의 비극적인 연애 대신 ‘서로를 향한 통제되지 않은 사랑’이다.
『폭풍의 언덕』은 사랑의 열망이 어떻게 비정상적인 복수심이 되는지를 잘 보여준다. 여기서 ‘비정상적’이라는 표현은 히스클리프가 단순히 자신의 사랑을 방해한 자들뿐 아니라 그들의 자손들, 더 나아가 자기 자손들까지 완전히 파멸시키려 하는 것을 포함한다. 히스클리프의 사랑은 과거에 시작하여 여전히 완성되지 못한 채, 비틀거리며 주변을 파괴하는 복수극으로 이어진다. 프로이드는 “사랑은 마치 부메랑과 같아서 그 도달 대상을 잃어버릴 경우, 그 힘은 자기 자신에게 부정적으로 돌아온다”고 말한다.
2. 사랑과 증오 사이에 선 인간
히스클리프는 악인인가?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주요 인물의 비정상적인 모습이 아니라 그들의 비결정성에 집중해야 한다. 비정상은 단지 정상의 범위를 벗어났다는 뜻이지만, 비결정성은 A도 아니고 B도 아닌, 양자 사이를 오가면서 무질서하게 방황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앞에서 보았듯이 『폭풍의 언덕』은 캐서린과 히스클리프의 격정적인 삶이 이야기의 핵심부를 이룬다. 여기에 다양한 사건들을 겹친 서술구조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서술구조는 이야기에 빈틈을 만들고, 이 빈틈 사이에서 방황하는 주요 인물들의 비결정성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비결정성은 히스클리프가 보여 주는 사랑과 증오의 감정을 이해하도록 돕는다. 복수를 다짐한 히스클리프의 감정은 사랑에서 증오로, 그리고 다시 증오에서 사랑으로 부단히 변화한다. 그는 아내 이사벨라에게 칼을 던지거나 그녀의 애완견을 목매달아 죽일 정도로 폭력적인 인물이면서 동시에 캐서린에게는 한없이 부드러운 인물이다. 건장하고 남성적인 마초와 순수한 로맨스의 신사, 이 두 가지 면이 히스클리프 안에 모두 있다.
“전에는 아주 남자답게 생겼구나 싶던 것이 그땐 몹시 독살스러워 보였어. 그의
이마에는 침울한 그림자가 서려 있었고, 뱀 같은 두 눈도 잠을 못 자고 거의 빛을
잃었어.”
- 이사벨라의 독백 中 -
다면적 성격을 가진 캐릭터는 스스로 살아 움직인다. 작가의 통제를 벗어나 스스로 좌절하고 분노하고 외로움에 떨게 된다. 히스클리프가 누구인가? 하는 것은 그가 ‘어떤’ 인물인가? 라는 것을 묻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사랑과 증오 사이를 방황하는 결정 불가능한 인간이 될 수 있었는가?
라는 것을 묻게 한다. 히스클리프는 자기 연민과 인정 욕망으로 가득한 고독한 현대인들의 군상과 같다. 히스클리프 뿐 아니라 캐서린 역시 결정 불가능한 욕망을 지닌 인물의 양면성을 보여준다. 그녀는 “난 히스클리프다”라고 주장할 정도로 그를 사랑하지만, 동시에 귀족인 에드가 린튼과 결혼해서 귀부인이 되고 싶은 욕구도 있다. 캐서린은 인간의 모순을 상징하는 인물로 나타난다. 또한 그녀의 모순은 불안정하고 유동적인 자아의 역동성을 상징한다. 히스클리프가 야만과 문명 사이를 오갔듯이 캐서린도 문명(린튼)과 야만(히스클리프)을 동시에 추구한다. 그녀는 지배계급에 속한 귀부인인 동시에 불법자이며 악마적인 존재와 놀아나는 야생아다.
“당신이 돌아왔을 때 화를 냈던 에드가도 불편한 심기가 가라앉았고, 나도 안정되
고 조용한 생활을 시작하고 있는데, 당신은 우리가 평화로운 것을 보고 안절부절
못해서 싸움을 일으킬 결심을 한 거야.”
- 캐서린이 히스클리프에게 -
“지금 당신의 손이 닿고 있는 내 몸은 당신 것일지 몰라도, 당신이 다시 내게 손을
대기 전에 내 영혼은 저 언덕 꼭대기에 가 있을 거예요. 당신은 소용없어요. 에드
가, 당신이 필요한 때는 지났어요.”
- 캐서린이 에드가에게 -
캐서린은 히스클리프를 그리워하기도 하고 에드가와의 안정적인 결혼생활에 만족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녀는 야만과 문명의 경계에 서 있다. 히스클리프의 결정 불가능성은 그를 이중적으로 보이게 한다. 또한 캐서린을 우유부단하다고 힐난할 수 있게 한다. 이러한 복잡 미묘한 캐릭터는
우리(독자들)에게 혼란을 준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 보면 이러한 인물의 성격은 우리의 삶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삶은 생각과 달리 통제되지 않고, 사람의 마음은 언제나 양가감정을 느끼며, 우유부단하기 쉽기 때문이다.
이러한 등장인물들의 모습은 사랑과 증오의 관계를 보여주면서 사랑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한다. 『폭풍의 언덕』 속에 나타나는 사랑에서 증오로, 다시 증오에서 사랑으로 돌아가는 여정은 사랑이란, 충만한 완성을 향하는 점진적인 운동이 아니라 사랑과 증오 사이를 요동치는 진자 운동이며, 그 사이 어딘가에 있는 사랑을 찾아가는 몸부림임을 보여준다. 사랑은 끝없이 요동치며, 계속해서 세상을 적시고, 흘러넘치는 것이 아닐까?
3. 지금 여기를 넘어
『폭풍의 언덕』에서는 사랑과 증오가 끊임없이 이어지며 동일한 사람이, 동일한 대상에게 나타나고 있다. 이 같은 사랑과 증오는 우연히 같은 곳에서 발현되는 것일까? 어떻게 상반된 감정이 같이 일어날 수 있는지 궁금증이 든다. 아니면 사랑과 증오는 서로 다른 모습을 하고 있을 뿐 사실은 거의 유사한 감정인 것일까? 진정한 사랑은 언제나 힘으로 가득 차 있고, 이 힘은 종종 통제를 벗어나 파괴적 경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점에서 증오와 유사하다. 그렇다면 사랑과 증오를 구분하는 것 자체가 의미가 있는지 생각해 본다.
에밀리 브론테는 『폭풍의 언덕』을 통해 ‘사랑은 무엇인가?’를 묻고 있다.
사랑은 단순히 남녀가 서로를 좋아하는 감정을 나누는 일만은 아니다. 때때로 닥치는 어려움이나 난관을 맞서 그것을 뛰어넘어야 좋은 결과를 얻을 때가 있다. 그래서 사랑은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게 하는 힘이다. 상대를 사랑한다는 것은 한계를 뛰어넘어서라도 이루고자 하는 가장 기본적인 욕망이기 때문이다. 이는 ‘사랑은 상대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기꺼이 상대가 되고 싶은 일임’을 말한다. 그러므로 사랑과 증오가 함께하는 아이러니에 대해 우리는 대상에 대한 친절함을 사랑으로 여기거나, 적개심을 증오로 이해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랑은 통제되기 어려울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자기 사랑을 방해하는 모든 것에 적개심을 가질 수 있음을 받아들이도록 한다. 반대로 자기 사랑에 방해가 된다면 자신을 증오하는 방식으로까지도 발전할 수 있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이다.
시인 옥타비오 파스(Octavio Paz Lozano)는 “사랑한다는 것은 생명력이다. 너를 사랑하는 것은내가 죽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이 말은 사랑이라면 모름지기 어떤 한계를 넘어서려는 노력이 포함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힘이 발휘될 대상을 잃어버리거나 적당히 통제되지 못했을 때, 주변뿐 아니라 자기 자신까지 파괴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히스클리프는 사랑으로 넘쳤고, 그 사랑이 결국엔 제어할 수 없는 상황까지 이른 것이다. 프로이드의 말과 같이 통제되지 않을 때의 사랑은 파괴적인 경향 즉, 증오로 귀결된다.
“사랑과 증오는 인간의 심장에 샴쌍둥이처럼 등과 등을 맞대고 있다. 당신이 사랑
하기에 또한 증오했고 당신이 증오했기에 또한 사랑했다. 당신이 사랑했던 것은
당신이 사랑했던 것과 관련해서 당신이 무엇을 증오해야 하는지를 결정했다. 당
-신이 증오했던 것은 당신이 증오했던 것과 관련해서 당신이 사랑할 수 있는 것의
가능성을 결정했다.”
- Ngũgĩ wa Thiong’o, Petal Petals of Blood. (1977, 335) -
케냐 작가인 응구기(Ngũgĩ wa Thiong’o)의 말과 같이 사랑할 수 있기 때문에 증오할 수 있고, 그 반대로 증오했다는 것은 곧 사랑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증오는 사랑할 수 있는 가능성이다. 이 점에서 히스클리프의 증오는 사랑의 반대편이 아니라 연장이며 바로 사랑이다. 이러한 사랑과 증오의 아이러니는 하나님의 사랑과 증오(질투)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 성경은 하나님을 ‘질투하시는 분’이라고 고백한다.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오,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라” (신 4:24)
하나님의 질투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아이히로트(Walther Eichrodt)의 말과 같이 완악한 죄인에게 나타나는 하나님의 질투는 그분의 사랑이다(출20:5; 민 25:11). 질투는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능동적인 관심이다. 여기서 사랑과 질투의 관계를 볼 수 있다. 하나님은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사랑하시고, 계약을 지키시고, 그의 종들에게 끊임없는 사랑을 보여 주신다(느 1:5; 미 7:18; 신 7:9, 12; 왕상 8:23). 사랑하는 자를 하나님은 열심(질투)히 만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열심(질투)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다.
2023. 08 01
사랑과 증오 그 사이 사랑
조영호 교수(안양대학교겸임교수,기독인문학연구원상임연구위원)
우리는 종종 사랑이 증오로 변하는 것을 경험한다. 예를 들어 아이돌 연예인을 좋아하는 ‘사생팬’이 가장 격렬한 ‘안티팬’으로 변한다는 것 등이다.
사랑이 대상자를 아끼며 잘되기를 바라는 관심이라면, 증오는 상대에게 위해를 가하며 잘되지 않기를 바라는 관심이다. 그래서 막스 셀러(Max Scheler)는 “사랑과 미움은 서로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존재나 사건이 파괴되거나 사라지는 것에 대한 사랑이 곧 미움이다”라고 했는지 모르겠다. 이처럼 사랑과 증오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관계를 맺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사랑은 왜 쉽게 증오로 변하는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해 프로이드(Sigmund Freud)는 ‘리비도(libido)’로 설명했다. 리비도는 대상에 대한 충동적 사랑을 말한다. 충동적 사랑은 대상을 향해 승화되거나 억제해야 한다. 목표를 잃은 리비도는 대상은 물론 자신까지 파괴하기 때문이다. 이 충동적 사랑이 조절되지 않을 때 문제가 발생한다.
에밀리 브론테(Emily Jane Bronte)의 『폭풍의 언덕』은 사랑과 증오가 함께 춤추는 모습을 통해 사랑이 왜 종종 실패하고 상대에 대한 증오로 이어지는지 잘 보여준다.
1. 폭풍우 치는 요크셔
주인공 언쇼는 리버풀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한 소년을 데려온다.
이 고아 소년에게 ‘히스클리프’라는 죽은 아들의 이름을 붙여주고 위더링 하이츠에서 함께 살도록 한다. 언쇼와 그의 딸 캐서린은 히스클리프에게 호감을 느끼지만, 아들 힌들리는 히스클리프를 질투하며 미워한다. 그리고 캐서린은 히스클리프를 사랑하며 “히스클리프는 나와 같아”라고 말한다.
프로이드는 대상을 향한 성애적 충동 즉, 리비도는 자신을 사랑하는 경향을 띤다고 말했다. 이상형은 결국 내가 만들어 낸 것이지 대상으로부터 기인한 것은 아니다. 나의 이상형은 이상적인 자아의 또 다른 모습이다. 언쇼가 죽은 이후 캐서린과 히스클리프의 사랑은 캐서린이 상실한 그 무엇을 되찾는 과정이었다. 오빠 힌들리의 가부장적 속박에서 벗어나 죽은 아버지를 되찾고 싶은 욕망이 히스클리프에 대한 사랑으로 드러났다. 힌들리가 히스클리프를 학대할수록 캐서린은 히스클리프를 사랑했다. 이들의 사랑에는 장애가 없는 듯 보였다.
그러던 어느 날, 캐서린은 린튼가에서 개에게 물리는 사고를 당하고 린튼가에 머무르며 치료받게 된다. 린튼가에 머무르는 동안 우아한 상류층 생활에 익숙해진 캐서린, 다시 만난 히스클리프의 더러운 모습을 보자 타박을 한다. 이에 히스클리프는 “더러운 건 내 맘이야. 나는 더러운 게 좋아!”라고 대답한다.
캐서린에게 호감이 생긴 린튼은 청혼을 하고, 히스클리프는 캐서린이 자신에 대해 넬리에게 하는 이야기를 엿듣게 된다. “지금 히스클리프와 결혼한다면 격이 떨어져.” 자신과 결혼하면 천해질 것이라는 캐서린의 말에 히스클리프는 상심하여 자리를 뜨고, 이내 언쇼가를 떠난다. 그 때문에 캐서린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진짜 마음을 표현한 뒷이야기를 듣지 못한다.
“지금 히스클리프와 결혼한다면 격이 떨어져. 그래서 내가 얼마나 사랑
하는지 그에게 알릴 수가 없어. 히스클리프가 잘생겼기 때문이 아니야. 넬
리, 그가 나보다도 더 나 자신과 같기 때문이야. 우리의 영혼이 무엇으로
되어 있든 그의 영혼과 내 영혼은 같은 것이고, 린튼의 영혼은 달빛과 번
개 그리고 서리와 불같이 전혀 다른 거야.”
히스클리프는 자신을 천하게 대우한 힌들리와 비참하게 자신을 버린 캐서린에게 증오를 품고, 캐서린은 아무런 말도 없이 떠난 히스클리프를 그리워하며 힘들어한다. 오빠 힌들리의 학대를 오롯이 홀로 견뎌내던 캐서린은 지속적으로 구애하는 린튼과 결혼한다.
3년 후, 자수성가한 사업가가 되어 돌아온 히스클리프. 그의 매력에 빠져든 린튼의 여동생 이사벨라는 히스클리프를 사랑하게 되고, 캐서린은 그런 이사벨라를 질투하며 히스클리프를 원망한다. 이사벨라와 결혼한 히스클리프는 언쇼가의 저택 워더링 하이츠에서 생활한다. 자신을 학대하던
힌들리에게 일부러 돈을 빌려주며 도박에 빠지게 한 뒤 파멸시킨 히스클리프는 결국 워더링 하이츠를 차지한다. 캐서린은 히스클리프에 대한 연민으로 괴로워하다가 딸 캐시를 낳고 숨진다. 히스클리프의 아내 이사벨라 역시 남편의 학대를 견디지 못해 집을 나가고, 아들을 낳아 기르다가 세상을 떠난다.
히스클리프와 캐서린 사이의 어긋난 사랑은 린튼, 언쇼 두 가문의 몰락으로 마무리된다.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목숨까지 걸었던 냉혹한 한 인간
의 애증과 야심 때문에 두 가문이 몰락까지 하게 된 것이다. 이 소설에서 우리가 눈여겨볼 점은 캐서린과 히스클리프의 비극적인 연애 대신 ‘서로를 향한 통제되지 않은 사랑’이다.
『폭풍의 언덕』은 사랑의 열망이 어떻게 비정상적인 복수심이 되는지를 잘 보여준다. 여기서 ‘비정상적’이라는 표현은 히스클리프가 단순히 자신의 사랑을 방해한 자들뿐 아니라 그들의 자손들, 더 나아가 자기 자손들까지 완전히 파멸시키려 하는 것을 포함한다. 히스클리프의 사랑은 과거에 시작하여 여전히 완성되지 못한 채, 비틀거리며 주변을 파괴하는 복수극으로 이어진다. 프로이드는 “사랑은 마치 부메랑과 같아서 그 도달 대상을 잃어버릴 경우, 그 힘은 자기 자신에게 부정적으로 돌아온다”고 말한다.
2. 사랑과 증오 사이에 선 인간
히스클리프는 악인인가?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주요 인물의 비정상적인 모습이 아니라 그들의 비결정성에 집중해야 한다. 비정상은 단지 정상의 범위를 벗어났다는 뜻이지만, 비결정성은 A도 아니고 B도 아닌, 양자 사이를 오가면서 무질서하게 방황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앞에서 보았듯이 『폭풍의 언덕』은 캐서린과 히스클리프의 격정적인 삶이 이야기의 핵심부를 이룬다. 여기에 다양한 사건들을 겹친 서술구조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서술구조는 이야기에 빈틈을 만들고, 이 빈틈 사이에서 방황하는 주요 인물들의 비결정성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비결정성은 히스클리프가 보여 주는 사랑과 증오의 감정을 이해하도록 돕는다. 복수를 다짐한 히스클리프의 감정은 사랑에서 증오로, 그리고 다시 증오에서 사랑으로 부단히 변화한다. 그는 아내 이사벨라에게 칼을 던지거나 그녀의 애완견을 목매달아 죽일 정도로 폭력적인 인물이면서 동시에 캐서린에게는 한없이 부드러운 인물이다. 건장하고 남성적인 마초와 순수한 로맨스의 신사, 이 두 가지 면이 히스클리프 안에 모두 있다.
“전에는 아주 남자답게 생겼구나 싶던 것이 그땐 몹시 독살스러워 보였어. 그의
이마에는 침울한 그림자가 서려 있었고, 뱀 같은 두 눈도 잠을 못 자고 거의 빛을
잃었어.”
- 이사벨라의 독백 中 -
다면적 성격을 가진 캐릭터는 스스로 살아 움직인다. 작가의 통제를 벗어나 스스로 좌절하고 분노하고 외로움에 떨게 된다. 히스클리프가 누구인가? 하는 것은 그가 ‘어떤’ 인물인가? 라는 것을 묻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사랑과 증오 사이를 방황하는 결정 불가능한 인간이 될 수 있었는가?
라는 것을 묻게 한다. 히스클리프는 자기 연민과 인정 욕망으로 가득한 고독한 현대인들의 군상과 같다. 히스클리프 뿐 아니라 캐서린 역시 결정 불가능한 욕망을 지닌 인물의 양면성을 보여준다. 그녀는 “난 히스클리프다”라고 주장할 정도로 그를 사랑하지만, 동시에 귀족인 에드가 린튼과 결혼해서 귀부인이 되고 싶은 욕구도 있다. 캐서린은 인간의 모순을 상징하는 인물로 나타난다. 또한 그녀의 모순은 불안정하고 유동적인 자아의 역동성을 상징한다. 히스클리프가 야만과 문명 사이를 오갔듯이 캐서린도 문명(린튼)과 야만(히스클리프)을 동시에 추구한다. 그녀는 지배계급에 속한 귀부인인 동시에 불법자이며 악마적인 존재와 놀아나는 야생아다.
“당신이 돌아왔을 때 화를 냈던 에드가도 불편한 심기가 가라앉았고, 나도 안정되
고 조용한 생활을 시작하고 있는데, 당신은 우리가 평화로운 것을 보고 안절부절
못해서 싸움을 일으킬 결심을 한 거야.”
- 캐서린이 히스클리프에게 -
“지금 당신의 손이 닿고 있는 내 몸은 당신 것일지 몰라도, 당신이 다시 내게 손을
대기 전에 내 영혼은 저 언덕 꼭대기에 가 있을 거예요. 당신은 소용없어요. 에드
가, 당신이 필요한 때는 지났어요.”
- 캐서린이 에드가에게 -
캐서린은 히스클리프를 그리워하기도 하고 에드가와의 안정적인 결혼생활에 만족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녀는 야만과 문명의 경계에 서 있다. 히스클리프의 결정 불가능성은 그를 이중적으로 보이게 한다. 또한 캐서린을 우유부단하다고 힐난할 수 있게 한다. 이러한 복잡 미묘한 캐릭터는
우리(독자들)에게 혼란을 준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 보면 이러한 인물의 성격은 우리의 삶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삶은 생각과 달리 통제되지 않고, 사람의 마음은 언제나 양가감정을 느끼며, 우유부단하기 쉽기 때문이다.
이러한 등장인물들의 모습은 사랑과 증오의 관계를 보여주면서 사랑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한다. 『폭풍의 언덕』 속에 나타나는 사랑에서 증오로, 다시 증오에서 사랑으로 돌아가는 여정은 사랑이란, 충만한 완성을 향하는 점진적인 운동이 아니라 사랑과 증오 사이를 요동치는 진자 운동이며, 그 사이 어딘가에 있는 사랑을 찾아가는 몸부림임을 보여준다. 사랑은 끝없이 요동치며, 계속해서 세상을 적시고, 흘러넘치는 것이 아닐까?
3. 지금 여기를 넘어
『폭풍의 언덕』에서는 사랑과 증오가 끊임없이 이어지며 동일한 사람이, 동일한 대상에게 나타나고 있다. 이 같은 사랑과 증오는 우연히 같은 곳에서 발현되는 것일까? 어떻게 상반된 감정이 같이 일어날 수 있는지 궁금증이 든다. 아니면 사랑과 증오는 서로 다른 모습을 하고 있을 뿐 사실은 거의 유사한 감정인 것일까? 진정한 사랑은 언제나 힘으로 가득 차 있고, 이 힘은 종종 통제를 벗어나 파괴적 경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점에서 증오와 유사하다. 그렇다면 사랑과 증오를 구분하는 것 자체가 의미가 있는지 생각해 본다.
에밀리 브론테는 『폭풍의 언덕』을 통해 ‘사랑은 무엇인가?’를 묻고 있다.
사랑은 단순히 남녀가 서로를 좋아하는 감정을 나누는 일만은 아니다. 때때로 닥치는 어려움이나 난관을 맞서 그것을 뛰어넘어야 좋은 결과를 얻을 때가 있다. 그래서 사랑은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게 하는 힘이다. 상대를 사랑한다는 것은 한계를 뛰어넘어서라도 이루고자 하는 가장 기본적인 욕망이기 때문이다. 이는 ‘사랑은 상대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기꺼이 상대가 되고 싶은 일임’을 말한다. 그러므로 사랑과 증오가 함께하는 아이러니에 대해 우리는 대상에 대한 친절함을 사랑으로 여기거나, 적개심을 증오로 이해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랑은 통제되기 어려울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자기 사랑을 방해하는 모든 것에 적개심을 가질 수 있음을 받아들이도록 한다. 반대로 자기 사랑에 방해가 된다면 자신을 증오하는 방식으로까지도 발전할 수 있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이다.
시인 옥타비오 파스(Octavio Paz Lozano)는 “사랑한다는 것은 생명력이다. 너를 사랑하는 것은내가 죽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이 말은 사랑이라면 모름지기 어떤 한계를 넘어서려는 노력이 포함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힘이 발휘될 대상을 잃어버리거나 적당히 통제되지 못했을 때, 주변뿐 아니라 자기 자신까지 파괴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히스클리프는 사랑으로 넘쳤고, 그 사랑이 결국엔 제어할 수 없는 상황까지 이른 것이다. 프로이드의 말과 같이 통제되지 않을 때의 사랑은 파괴적인 경향 즉, 증오로 귀결된다.
“사랑과 증오는 인간의 심장에 샴쌍둥이처럼 등과 등을 맞대고 있다. 당신이 사랑
하기에 또한 증오했고 당신이 증오했기에 또한 사랑했다. 당신이 사랑했던 것은
당신이 사랑했던 것과 관련해서 당신이 무엇을 증오해야 하는지를 결정했다. 당
-신이 증오했던 것은 당신이 증오했던 것과 관련해서 당신이 사랑할 수 있는 것의
가능성을 결정했다.”
- Ngũgĩ wa Thiong’o, Petal Petals of Blood. (1977, 335) -
케냐 작가인 응구기(Ngũgĩ wa Thiong’o)의 말과 같이 사랑할 수 있기 때문에 증오할 수 있고, 그 반대로 증오했다는 것은 곧 사랑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증오는 사랑할 수 있는 가능성이다. 이 점에서 히스클리프의 증오는 사랑의 반대편이 아니라 연장이며 바로 사랑이다. 이러한 사랑과 증오의 아이러니는 하나님의 사랑과 증오(질투)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 성경은 하나님을 ‘질투하시는 분’이라고 고백한다.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오,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라” (신 4:24)
하나님의 질투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아이히로트(Walther Eichrodt)의 말과 같이 완악한 죄인에게 나타나는 하나님의 질투는 그분의 사랑이다(출20:5; 민 25:11). 질투는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능동적인 관심이다. 여기서 사랑과 질투의 관계를 볼 수 있다. 하나님은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사랑하시고, 계약을 지키시고, 그의 종들에게 끊임없는 사랑을 보여 주신다(느 1:5; 미 7:18; 신 7:9, 12; 왕상 8:23). 사랑하는 자를 하나님은 열심(질투)히 만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열심(질투)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다.
2023. 08 01
출처: 교회성장연구소 (portal.icg21.com/board/board.php?bbs_id=humanities&ptype=view&kbbs_doc_num=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