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을 맞이한 세 부류의 사람들
금빛내렴 교수(홍익대 예술학과 초빙교수)
성탄’, 곧 ‘구주 탄생’이라는 사건은 어느 날 갑자기 짠 하고 한 위대한 성인군자가 나타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근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친히 성육신하셔서 인간의 몸으로 세상에 오신 사건이 곧 성탄인 것 이다. 놀라운 성탄 소식을 전하고 있는 성경의 복음서들은 구주의 탄생을 맞이한 다양한 군상들을 소개하고 있는데, 이들이 인간으로 오신 아기 예수와 어떻게 관계를 맺는지 다양한 모습으로 묘사하고 있다.
더러는 자기 일에 몰두하는 중에 예기치 않게 아기 예수를 만난 이들도 있었고, ‘유대인의 왕’으로 오시는 아기를 만나기 위해 오래전부터 계획하고 예비한 이들도 있었고, 치밀한 계산 끝에 그 아기를 만나기는커녕 음모 를 꾸미는 이도 있었다. 성탄 사건과 마주한 이들의 다양한 면모를 살펴보는 일은 성탄과 연관된 또 다른 의미를 찾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9. 뜻밖의 경배자
한밤중, 야외의 밤은 더 춥다. 그래도 그들은 “밤에 들에서 지내며 그들 의 양 떼를 지키고 있었다”(눅 2:8 새번역. 이하 역본 표기 생략). 그들은 자신들의 직무를 충실히 수행하고 있었다. 하지만 양들을 돌보기 위해 지새우는 밤은 더 길 수도 있다. 외로움과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동료들이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된다. 그리고 피곤하여 졸음에 빠지고 잠에 취할 무렵, 그때 느닷없는 광경이 펼쳐진다. 놀라운 이적이 일어났다. 한 천사가 그들에게 나타나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전하여 준 것 이다(눅 2:10). 그와 아울러 “많은 하늘 군대가 나타나서”(눅 2:13), “영광” 과 “평화”의 합창을 외쳐 부르다니!(눅 2:14) 목자들은 그대로 있을 수 없었다. 서로 “베들레헴으로 가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신 바, 일어난 그 일을 봅시다”라고 말하였다(눅 2:15).
“그리고 그들은 급히 달려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 를 찾아냈다”(눅 2:16). 그 후 “그들은 이것을 보고 나서, 이 아기에 관하여 자기들이 들은 말을 사람들에게 알려 주었다”(눅 2:17). 목자들은 구주 탄 생의 소식을 알린 최초의 복음 선포자가 된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곳에 그대로 머무르지 않았다. 다시금 자기 일을 하러 갔다. 자신의 일터로, 소속으로 돌아갔다. 그들은 “돌아가면서 ”그들의 삶 가운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그를 찬미하였다”(눅 2:20).
목자들은 전혀 예기치 않은 상황에 서 놀라운 일을 만났다. 구주 탄생이 라는 엄청난 사건과 맞닥뜨린 것이 다. 우리는 목자들과 관련된 이야기 를 통해, 성탄을 경험하고 삶 속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그분을 기쁘게 하는 삶이 곧 성탄의 감격을 지속하 는 삶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는데, 화가들 또한 누가복음서에 기록된 것을 근거로(눅 2:8-20) ‘예수 탄생 의 소식을 들은 목자들’에 관한 이야기를 화폭에 다양하게 담았다.
누가복음서에 나타난 천사들이 목자들에게 성탄 소식을 전하는 장면의 전통적인 도상학적 묘사는 수많은 대상들이 등장하는, 곧 천사들과 목자들 과 양들이 어우러진 세부 장면들을 연출하는 양식인데, 특이하게도 티파니 스튜디오가 제작한 <목자들이 밤에 양떼를 돌보는 동안>은 아주 단출하다. 딱 세 사람만 등장한다. 하지만 이 그림은 목자들이 경험한 놀라움을 한껏 드러내고 있다. 왼쪽은 어두운 배경으로 처리를 한 반면, 오른쪽은 환한 빛 으로 가득 채우고 있다. 화면 속 장치라고는 밤 추위를 견디기 위해 지폈을 모닥불뿐이지만, 모닥불 건너편 화면 밖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누가 복음서의 천사 및 천군들의 등장과 합창 이야기를 잘 알고 있는 독자들이 라면 충분히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불꽃의 광휘와 움직임이 더 극적인 서사를 연상케 한다. 그 기적의 순간을 단순하지만 아주 극적으로 처리하 고 있는 그림 속 목자들의 눈길은 오른쪽 위 사선으로 향하고 있으며, 우리 도 그들을 따라 화면 밖의 놀라운 광경을 상상하게 된다.
한편 이 그림은 표현 기법 면에서 독특한데, 회화가 아닌 단지 색유리그 림(스테인드글라스)이라는 점만은 아니다. 실상 전통적인 색유리그림 기 법이 아니기에 이 그림이 주는 생생함은 더욱 돋보이는데, 여기에는 그럴 만한 또 다른 색유리그림의 기술적 진보가 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티파니 스튜디오를 설립한 루이스 컴포트 티파니(Louis Comfort Tiffany, 1848-1933)는 미국 아르누보 양식의 인테리어 디자이너로서 실 내 장식과 색유리 그림 제작에도 관심을 기울였는데, 자신이 원하는 유리 유형을 찾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직접 동료들과 협업하여 스튜디오를 차리고 유리 주조 공장을 설립하였다.
그는 유리 자체의 질감과 풍부한 색상을 전달하는 퍼브릴 글라스를 개발 하였고, 재료의 생산자로서 그의 독창성은 명성을 얻었다. 그의 독창적 기 법을 따라 이와 같은 색채와 농담의 색유리그림을 제작할 수 있게 되었는 데, 이 그림은 여느 색유리 그림과는 달리 화려하고 풍부한 색조를 구사함 으로써 오른쪽 화면 밖에 있을 법한 놀라운 광경을 더 잘 유추할 수 있게끔 이끈다.
빛과 어두움의 대가로서 네덜란드의 최고 화가로서 명성을 날린 렘브란트 하르 먼손 판 레인(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의 부식 동판화 <등불이 있는 목 자들의 경배>는 단순한 선묘 속에서도 정교한 구도를 통 해 각 인물들을 탁월하게 묘사하고 있다. 가운데 등불이 중심 광원을 이루어 주변을 비추고 있으며, 등불 바로 아 래 주인공인 아기 예수가 자리한다. 화면은 중앙의 구유에 있는 아기와 어 머니 마리아를 중심으로 오른쪽과 왼쪽으로 나뉜다. 오른쪽엔 모자(母子) 를 돌보며 방문객들을 맞이하는 요셉이 손을 벌려 환영하고 있고, 그의 옆 에는 두 마리의 가축이 우리에서 머리를 내밀며 벌어진 상황을 멀뚱히 바라보고 있다.
왼쪽에는 이제 막 도착하여 아기를 지켜보는 목자들이 천사의 말을 떠올 리며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고 있다. 중앙의 아기와 모친 부분만 동심 원 상태로 밝게 처리하고 그 외 주위를 어둡게 처리하였기에 주변의 인물 들을 파악하기가 힘들다. 특히 왼쪽의 외양간 나무 울짱 밖에 서 있는 내 방객들이 몇 명인지 헤아리기가 까다로운데, 오히려 이러한 장치가 유명 하지 않은 보통 사람들인 목자들의 익명성을 강조하는 데 일조하는 듯하 다. 렘브란트는 같은 주제로 유화도 그렸는데, 오히려 이 단색판화가 채색 화보다 화려하지 않고 소박함을 잘 드러냄으로써 여느 작품에서 맛볼 수 없는 기쁨과 평안의 정취를 느끼게 한다.
10. 준비된 경배자
누가복음서에선 낮은 지위에 있는 목자들의 경배가 다루어졌다면, 마태복음서에선 고위직인 현인(賢人)들의 경배가 다루어졌다는 점에서 대조적 이다. 더욱이 그들이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으로서, 동쪽으로부터 온 박사 들이었다는 점에서 더욱 대비가 된다. 그런데 도대체 이들은 어떤 사람들 이었던가?
흔히 우리가 “동방 박사 세 사람”이라고 지칭하며 노래까지 부르고 있지 만, 마태복음서에는 동방 박사가 몇 명인지, 그들의 나이와 인종이 어떠한 지 전혀 언급이 없고, 오직 ‘박사들’, 곧 헬라어로 ‘마고이(μάγοι)’라고 ‘마 고스(μάγος)’의 복수형만 표기되어 있다. 흔히 라틴어 ‘마기(magi)’라고 도 불리는 이 말은 고대 바빌로니아인(갈대아인), 메대인, 페르시아인 및 기타 사람들이 박사·교사·제사장·의사·점성술사·선견자·해몽가·점술 가·마술사 등을 지칭하는 말이었으며, 한마디로 ‘현인’, 곧 ‘지혜로운 사람’들을 통칭하는 용어였다.
특수 지위에 있는 이들, 현인들이 별을 발견한 후 꾸준히 관찰하고, 멀리 떨어진 거리를 감안해 여행 일정을 짜고, 수행원들을 꾸리고, 식량과 예물 을 준비하는 일 등에서 얼마나 꼼꼼히 계획하고 상세히 준비하여 실행했 을지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터이다.
한편 동방 박사들이 아기 예수께 바친 선물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자. 그 선물들이 의미하는 바가 확실하지는 않지만 많은 이들이 상징적인 의미 를 부여하고 있는데, 흔히 황금은 왕권을 상징하고, 유향은 제사장직을 상 징하고, 몰약은 죽어서 무덤에 들어갈 인간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스콜라 철학 이전의 마지막 교부 신학자라고 일컬어지는 성 베르나르도 (Saint Bernard)는 이 세 가지 선물에 대해 더욱 실제적인 해석을 선호하 였는데, 곧 황금은 가난한 요셉과 마리아를 구하기 위한 것이고, 유향은 마굿간에 향기를 내기 위한 것이고, 몰약은 약제로서 아기의 건강을 위한 것이라는 해석이다.
아울러 학자들은 이 선물들이 성가족이 이집트로 도피하여 생활할 때 생 계에 많은 도움을 주었을 것이라고도 한다. 어찌 되었건 이 선물들은 그 상징적 의미로든 실질적인 의미로든 적절한 것으로서 정성껏 준비하여 최고의 예우를 갖추어 드린 선물임은 틀림없는 것이다. 서양 기독교 미술사의 초기 묘사에서는 동방 박 사들이 페르시아풍의 의 복을 한 채로 선물을 내 밀고 걸음을 내딛는 모습 으로 표현되는데, 동방박사와 관련된 가장 오래된 묘사는 4세기의 카타콤 그림과 석관 돋을새김 (부조(浮彫))에서 볼 수 있다. 지금 여기서 보는 <아기 예수를 경배하는 세 명의 현인 곧 동방 박사>는 당시 도상의 전형적인 모습을 잘 드러내고 있 는 작품이다. 후대의 묘사보다는 단순하지만 오히려 이 돋을새김은 마태 가 서술한 ‘동방 박사들의 경배’를 성경 그대로 핵심만 표현하고 있다.
맨 왼쪽엔 마리아와 그녀에게 안긴 어린 예수가 있으며, 그 두 사람 위에 별을 새겨 넣음으로써 “동방에서 본 그 별이… 아기가 있는 곳에 이르러 서, 그 위에 멈추었다”(마 2:9)는 사실을 직관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리 고 맨 앞의 동방 박사가 오른손으로 그 별을 가리킴으로써 “그들은 그 별 이 멈춘 것을 보고”(마 2:10),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경배하였다. 그 리고 그들의 보물 상자를 열어서, 아기에게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마 2:11)는 사실을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박사와 낙타, 박사와 낙타, 박사와 낙타 순으로 ‘황금과 유향과 몰약’이라는 각각의 예물에 대응하여 세 명의 동방 박사를 묘사하 긴 했으나 이 돋을새김에선 박사들 세 명의 모습이 모두 동일하게 나타나 고 있다는 점이다. 몸짓과 걸음걸이마저 똑같게 묘사함으로써 인물들 간 의 세부적인 차이보다는 경배의 사실 자체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서양 미술사의 전통 도상학에서는 동방 박사들의 숫 자와 나이와 인종 등이 굳어져 갔다. 때로는 전승에 따라, 이들 각각을 노 인의 모습을 한 페르시아의 왕 멜키오르, 중년의 모습을 한 인디아의 왕 발타사르, 청년의 모습을 한 아라비아의 왕 카스파르로 설정하기도 하였 는데, 이들을 왕으로 상정한 것은 구약성경을 근거로 다른 나라의 임금들로 간주하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이다(참고. 시 72:10-11; 사 49:7, 23; 60:3, 5-6. 다만 여기서 해당 구절과 동방 박사의 상관성 및 적절성 여부 는 논외로 함.) 더러 이름과 나이가 바뀌기도 하였다. 나아가 14세기 이후 엔 이들 세 명을 노아의 후손에 맞게 각기 다른 인종, 다른 나이, 다른 대륙 출신으로 그리기도 하였다. 하여튼 후대 사람들의 상상력 추가에 따른 동 방 박사들의 모습이 어떠하든지 간에, 중요한 점은 이들이 이방인 최초로 그리스도를 경배한 이들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는 것이다. 후대의 묘사에서는 박사들 의 인종이나 나이 등에도 변화 를 주어 묘사하고 있으며 많은 수행원들과 동물도 등장시키고 있는데, 더욱 극적이고 다양한 모습으로 연출되는 예들 중 하 나로 피터 판 린트(Pieter van Lint)의 <동방 박사의 경배>를 살펴보자. 17세기 플랑드르 화가이자 태피스트리 디자이너였던 린트의 이 그림은 앞서 보았던 돋을새김과는 반대로 오른쪽에 아기 예 수와 마리아와 요셉을 배치하고 왼쪽엔 동방 박사들과 함께 한 일단의 수행원들을 배치하고 있다.
그는 다양한 인물들을 화면에 채웠는데, 꿇어앉아 선물을 드리는 나이 많은 동방 박사 뒤로 인종과 나이를 달리한 동방 박사 둘이 연이어 서 있 고, 그들 주위로 병사와 시종 등 수행원들을 배치하고 있다. 수많은 인원 들 중에는 남녀노소가 섞여 있고, 왼쪽 위쪽에 말 탄 기병들이 있으며, 동
물로는 말 외에도 왼쪽 아래에 개 한 마리가 있는 것도 인상적이다. 화가 는 이렇게 꽉 찬 등장인물들을 통해 베들레헴의 한 누추한 집을 성대한 의 식이 펼쳐지는 장대한 공간으로 만들고 있는데, 그 가운데 화면 중앙 여백 에는 이들 일행의 방문의 단초가 된 별이 뚜렷하게 보인다.
‘목자들의 경배’와 ‘동방 박사들의 경배’의 닮음꼴
두 주제의 그림들은 실상 화면 속 인물들만 다를 뿐이지 도상학적으로는 동일한 구도를 취한다고 볼 수 있다. 한쪽에 아기를 중심으로 성가족이 일 군을 이루고 또 한쪽에는 경배하러 온 목자들이나 박사들이 위치한다. 때때로 화가들이 굳이 차이를 두는 것이라면, 화면 속에 별을 설정하느냐의 여부이다. 목자들은 천사들에게서 직접 듣고 온 것이지만 박사들은 별을 보고 별의 인도에 따라 방문하였기 때문이다. 물론 화가들은 별을 그리지 않고 박사들을 묘사하기도 한다. 그런데 최초의 성탄 뉴스가 1세기 팔레스타인 사회에서 가장 낮은 계층에 있던 목자들에게 주어졌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목자들은 당시 하층민에 속했던 익명의 집단이지만, 박사들은 학식과 지위를 겸비한 권세 있고 유명한 집단이었다는 점은 분명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 관련이 없을 것 같은 두 집단이 그리스도를 매개로 하여 하나로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은 성탄만이 이룰 수 있는 기적이다. 그렇기에 신분 및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은 가히 혁명적인 성탄 사건이라 할 수 있다. (하긴,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 성육신하셨다는 자체가 혁명적이지 않은가!) 지위가 낮은 이들은 아기 예수와 함께 함으로 써 영광의 자리에 함께 할 수 있었고, 지위가 높은 이들은 자신을 낮추어 아기 예수와 함께 함으로써 존귀의 자리에 함께 할 수 있었다. 결국 주님 앞에선 비천과 존귀가 하나 되어 동일하게 경배의 자리에 함께 나아갈 수 있다는 얘기이다. 이렇게 유대인으로 간주되는 목자들과 (세 명의) 이방인 동방 박사들이 결합하여 세계 모든 민족에게 기독교 메시지가 최초로 선포되고 있는 모습은 참으로 경이롭다.
11. 치밀한 학살자
해피엔딩으로 끝날 것 같은 성탄의 이야기는 마태가 복음서에 세 구절을 추가함으로써(마 2:16-18) ‘기쁜 성탄’ 이면에 비탄과 애도가 있었음을 전하고 있는데, 이 비극의 원인 제공자는 당대의 통치자 헤롯이었다.
‘헤롯 대왕’은 표면적으로 ‘대왕’에 걸맞은 업적들을 쌓았다. 궁전과 요 새와 경기장과 극장 등의 도시 건설에 힘을 쏟았고, 예루살렘 성전이라는 대공사를 착공하여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두매인이었다. 유대인 통치자이면서도 이방인으로서 자기 정체성의 한계를 느꼈다. 그래서 그는 단호하게, 때로는 무자비한 정치를 펼쳤다. 불안과 의심으로 아내와 자식과 친척들을 살해하기까지 하였다. 그리고 그런 잔인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소식을 듣고는 모두 다 성탄을 축하하는 행렬에 스스로를 제외시킨다. 가진 것을 내려놓지 못했기에, 더 많은 것을 누리고 싶었기에.
그는 동방 박사들처럼 자신의 권위를 내려놓음으로써 위대한 겸손을 표현하는 데 동참할 수도 있었건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아니, 말로는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할 생각이오”(마 2:8)라고 했지만, 그는 세상의 권위와 하늘의 권위를 분별하지 못했다. 치밀하게 계산하여 “박사들에게 알아 본 때를 기준으로… 두 살짜리로부터 그 아래의 사내아이를 모조리 죽였다”
(마 2:16). 혹시나 하여 범위를 “베들레헴과 그 가까운 온 지역”으로까지 넓혀 젖먹이들을 잔혹하게 “모조리” 학살하였다(마 2:16). 그런데 헤롯은 영유아 학살 후 자신의 목적을 온전히 이뤘을까, 온전한 평안을 누렸을까? 헤롯은 대왕으로 일컬음을 받았으나 ‘헤롯’의 뜻인 ‘영웅의 아들’이란 이름답게 그대로 살지는 못했다. 그는 세속적 권위와는 달리 진정으로 영웅 이 되지는 못하였다. 15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가인 마테오 디 조반니 (Matteo di Giovanni)가 그린 <베들레헴에서 있은 영아 학살>은 정사각형의 화면에 서 위와 아래를 양분하여 권 력자의 힘과 무고한 이들의 희생을 비교하고 있다. 위쪽 의 건물 묘사는 화려한 고대 로마 건축 양식대로 돋을새김 이 가득한 돌림띠와 기둥머리 장식과 아치를 특징으로 하고 있는데, 이러한 배경은 헤롯이 가진 권력을 가장 잘 드러낸다. 마태복음서 는 헤롯의 명령에 따라 보냄을 받은 사람들이 해당 지역의 아이들을 학살 하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화가는 명령과 실행을 한 공간에서 처리함으로써 독자들에게 모든 벌어진 상황을 한 눈에 파악하게 하고 있다.
실제 비례보다 과장되고 크게 그린 권력자 헤롯은 오른쪽 높은 곳에 앉아서 오른손의 검지를 뻗어 지시를 내리고 있고, 아래쪽엔 여러 사람이 충격과 공포가 혼재된 상태로 그려져 있는데, 쫓거나 죽이는 잔인한 병사들 과 두려움에 싸여 아기를 안고 도망가는 어머니들을 묘사하고 있다. 맨 아래에는 죽은 아기들이 누워 있고, 몇몇 어머니들은 그 아기들을 끌어안고 울부짖는 상황이다. 그 와중에 화가는 중앙 아치 현관의 위쪽에 몰래 숨어 있는 가족을 그려 넣었는데, 이를 보고 독자들은 속으로 생각하게 된다. ‘과연 이들은 무사했을까?’ 플랑드르 바로크 전통의 가장 영향력 있는 예술가인 페테르 파 울루벤스(Peter Paul Rubens) 의 작품은 고전과 기독교 역사 의 박학다식한 면을 잘 드러내 고 있는데, 그의 그림 <영아 학 살>은 사람들의 움직임, 색상 및 관능을 강조함으로써 성서 속 베들레헴의 학살 사건을 더욱 극적으로 처리하고 있다. 루벤스는 이 주제로 두 개의 그림을 그렸는데, 이것은 그의 첫 번째 그림이다.
이 그림과 관련하여 시대적 배경을 알아볼 필요가 있다. 동일한 주제에 관한 첫 번째 그림 당시 벨기에 플랑드르 지방의 도시 안트베르펜은 불과 몇 년 전에 전쟁을 겪었으며 1609년 휴전으로 일시 중단되었는데, 한 해 동안에만 가톨릭교도와 칼뱅주의자들 시민 사이에 살육전이 벌어져 수천 명의 시민이 살해된 적이 있었다. 네덜란드를 통치하는 스페인 군대는 개신교 군대를 격퇴하려 하였고, 그에 따라 안트베르펜은 네덜란드 국민에 대한 스페인의 잔혹학살의 현장이 되었다.
전쟁에서 가장 피해를 입는 이들이 어린이들과 여인들임을 감안할 때, 당시의 종교 전쟁이자 독립 전쟁이 한창이었던 상황에서 성경의 주제를 다룬 이 그림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남다른 생각을 불러일으켰으리라. 이 그림은 먼 옛날의 얘기가 아닌 당대 현실을 증언하는 그림이 되었을 것이 다. 가만, 그런데 이 주제의 그림은 복음서의 기록 시대나 화가가 살던 시대에만 유효한 의미가 있는 것일까?
아기 예수의 탄생 소식과 그로 인해 죽임을 당한 영아들에 관한 이야기 는 참으로 착잡함을 금할 수 없게 만든다. 하지만 이 사건은 잘못된 통치 자와 무고한 죽음의 역사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보통 헤롯의 영유아 대학살을 영어로 “the Massacre of the Innocents(더 매서커 오 브 디 이너슨트)”라고 표기하는데, 영어 ‘innocent(이너슨트)’는 특히나 어린아이를 일컫지만 어린이뿐만 아니라 범죄·전쟁 등에 직접 관계가 없으면서 희생을 당하는 ‘아무 잘못이 없는, 무고한, 순진한’ 이들 모두에게 도 해당하는 일이지 않는가!
사실 이 학살 이야기는 우리로 하여금 성탄절을 마냥 기뻐하고 즐기려는 마음을 저어하게 한다. 마음이 편치 않다. 혼란한 마음의 상태에 있는 우리에게, 현대의 저명한 신학자이자 기독교 평화주의자인 스탠리 하우어워스(Stanley Hauerwas)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마도 복음서에서 이 아이들의 죽음보다 더 결정적으로 크리스마스의 감상적 묘 사에 도전하는 사건은 없을 것이다. 헤롯과 같은 폭군의 권력을 보호하기 위해 어린이들이 죽임을 당하고, 계속해서 죽임을 당하는 세상에 예수님이 태어나셨다.”
이천 년 전에도 하나님이 어디에 계시냐고 울부짖는 이들이 있었다. 그 리고 그러한 역사는 반복된다. 오늘날에도 폭정으로, 잘못된 정치적 결정으로 전쟁의 참화 속에서 희생당하는 무고한 이들이 있다는 사실을 목도 하면서 여전히 하나님이 어디에 계시냐고 묻게 된다. 예수의 탄생 당시나, 현재나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상황 가운데서도 믿을 수밖에 없다. 아기 예수님은 절망 속에서도 새로운 희망으로 오셨음을. 어둠과 참혹함 가운데서도 실낱같은 빛에서 더욱 강한 참된 생명의 빛으로 오셨음을. 그 아기 예수님이 이 험난한 인간 세상에 임마누엘로 오 셨음을. 그리고 그분이 우리에게 약속한 바를 믿는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마 28:20)라고 한 그 말씀을.
그리하여 전쟁과 파괴와 폭력으로 고통을 겪는 가운데서도, 우리는 그분을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리며 맞이할 수밖에 없다, 성탄의 주인공인 그분 만이 진정한 평화의 왕이시기에.
그래서 역설적으로 우리는 이번 성탄절에도 외친다. 나를 향해, 그리고 세계 시민 모두를 향해.
“기쁜 성탄!” “메리 크리스마스!”
2023. 12. 01
출처: 교회성장연구소(portal.icg21.com/board/board.php?bbs_id=humanities&ptype=view&kbbs_doc_num=95)
성탄을 맞이한 세 부류의 사람들
금빛내렴 교수(홍익대 예술학과 초빙교수)
성탄’, 곧 ‘구주 탄생’이라는 사건은 어느 날 갑자기 짠 하고 한 위대한 성인군자가 나타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근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친히 성육신하셔서 인간의 몸으로 세상에 오신 사건이 곧 성탄인 것 이다. 놀라운 성탄 소식을 전하고 있는 성경의 복음서들은 구주의 탄생을 맞이한 다양한 군상들을 소개하고 있는데, 이들이 인간으로 오신 아기 예수와 어떻게 관계를 맺는지 다양한 모습으로 묘사하고 있다.
더러는 자기 일에 몰두하는 중에 예기치 않게 아기 예수를 만난 이들도 있었고, ‘유대인의 왕’으로 오시는 아기를 만나기 위해 오래전부터 계획하고 예비한 이들도 있었고, 치밀한 계산 끝에 그 아기를 만나기는커녕 음모 를 꾸미는 이도 있었다. 성탄 사건과 마주한 이들의 다양한 면모를 살펴보는 일은 성탄과 연관된 또 다른 의미를 찾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9. 뜻밖의 경배자
한밤중, 야외의 밤은 더 춥다. 그래도 그들은 “밤에 들에서 지내며 그들 의 양 떼를 지키고 있었다”(눅 2:8 새번역. 이하 역본 표기 생략). 그들은 자신들의 직무를 충실히 수행하고 있었다. 하지만 양들을 돌보기 위해 지새우는 밤은 더 길 수도 있다. 외로움과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동료들이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된다. 그리고 피곤하여 졸음에 빠지고 잠에 취할 무렵, 그때 느닷없는 광경이 펼쳐진다. 놀라운 이적이 일어났다. 한 천사가 그들에게 나타나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전하여 준 것 이다(눅 2:10). 그와 아울러 “많은 하늘 군대가 나타나서”(눅 2:13), “영광” 과 “평화”의 합창을 외쳐 부르다니!(눅 2:14) 목자들은 그대로 있을 수 없었다. 서로 “베들레헴으로 가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신 바, 일어난 그 일을 봅시다”라고 말하였다(눅 2:15).
“그리고 그들은 급히 달려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 를 찾아냈다”(눅 2:16). 그 후 “그들은 이것을 보고 나서, 이 아기에 관하여 자기들이 들은 말을 사람들에게 알려 주었다”(눅 2:17). 목자들은 구주 탄 생의 소식을 알린 최초의 복음 선포자가 된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곳에 그대로 머무르지 않았다. 다시금 자기 일을 하러 갔다. 자신의 일터로, 소속으로 돌아갔다. 그들은 “돌아가면서 ”그들의 삶 가운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그를 찬미하였다”(눅 2:20).
목자들은 전혀 예기치 않은 상황에 서 놀라운 일을 만났다. 구주 탄생이 라는 엄청난 사건과 맞닥뜨린 것이 다. 우리는 목자들과 관련된 이야기 를 통해, 성탄을 경험하고 삶 속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그분을 기쁘게 하는 삶이 곧 성탄의 감격을 지속하 는 삶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는데, 화가들 또한 누가복음서에 기록된 것을 근거로(눅 2:8-20) ‘예수 탄생 의 소식을 들은 목자들’에 관한 이야기를 화폭에 다양하게 담았다.
누가복음서에 나타난 천사들이 목자들에게 성탄 소식을 전하는 장면의 전통적인 도상학적 묘사는 수많은 대상들이 등장하는, 곧 천사들과 목자들 과 양들이 어우러진 세부 장면들을 연출하는 양식인데, 특이하게도 티파니 스튜디오가 제작한 <목자들이 밤에 양떼를 돌보는 동안>은 아주 단출하다. 딱 세 사람만 등장한다. 하지만 이 그림은 목자들이 경험한 놀라움을 한껏 드러내고 있다. 왼쪽은 어두운 배경으로 처리를 한 반면, 오른쪽은 환한 빛 으로 가득 채우고 있다. 화면 속 장치라고는 밤 추위를 견디기 위해 지폈을 모닥불뿐이지만, 모닥불 건너편 화면 밖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누가 복음서의 천사 및 천군들의 등장과 합창 이야기를 잘 알고 있는 독자들이 라면 충분히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불꽃의 광휘와 움직임이 더 극적인 서사를 연상케 한다. 그 기적의 순간을 단순하지만 아주 극적으로 처리하 고 있는 그림 속 목자들의 눈길은 오른쪽 위 사선으로 향하고 있으며, 우리 도 그들을 따라 화면 밖의 놀라운 광경을 상상하게 된다.
한편 이 그림은 표현 기법 면에서 독특한데, 회화가 아닌 단지 색유리그 림(스테인드글라스)이라는 점만은 아니다. 실상 전통적인 색유리그림 기 법이 아니기에 이 그림이 주는 생생함은 더욱 돋보이는데, 여기에는 그럴 만한 또 다른 색유리그림의 기술적 진보가 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티파니 스튜디오를 설립한 루이스 컴포트 티파니(Louis Comfort Tiffany, 1848-1933)는 미국 아르누보 양식의 인테리어 디자이너로서 실 내 장식과 색유리 그림 제작에도 관심을 기울였는데, 자신이 원하는 유리 유형을 찾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직접 동료들과 협업하여 스튜디오를 차리고 유리 주조 공장을 설립하였다.
그는 유리 자체의 질감과 풍부한 색상을 전달하는 퍼브릴 글라스를 개발 하였고, 재료의 생산자로서 그의 독창성은 명성을 얻었다. 그의 독창적 기 법을 따라 이와 같은 색채와 농담의 색유리그림을 제작할 수 있게 되었는 데, 이 그림은 여느 색유리 그림과는 달리 화려하고 풍부한 색조를 구사함 으로써 오른쪽 화면 밖에 있을 법한 놀라운 광경을 더 잘 유추할 수 있게끔 이끈다.
빛과 어두움의 대가로서 네덜란드의 최고 화가로서 명성을 날린 렘브란트 하르 먼손 판 레인(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의 부식 동판화 <등불이 있는 목 자들의 경배>는 단순한 선묘 속에서도 정교한 구도를 통 해 각 인물들을 탁월하게 묘사하고 있다. 가운데 등불이 중심 광원을 이루어 주변을 비추고 있으며, 등불 바로 아 래 주인공인 아기 예수가 자리한다. 화면은 중앙의 구유에 있는 아기와 어 머니 마리아를 중심으로 오른쪽과 왼쪽으로 나뉜다. 오른쪽엔 모자(母子) 를 돌보며 방문객들을 맞이하는 요셉이 손을 벌려 환영하고 있고, 그의 옆 에는 두 마리의 가축이 우리에서 머리를 내밀며 벌어진 상황을 멀뚱히 바라보고 있다.
왼쪽에는 이제 막 도착하여 아기를 지켜보는 목자들이 천사의 말을 떠올 리며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고 있다. 중앙의 아기와 모친 부분만 동심 원 상태로 밝게 처리하고 그 외 주위를 어둡게 처리하였기에 주변의 인물 들을 파악하기가 힘들다. 특히 왼쪽의 외양간 나무 울짱 밖에 서 있는 내 방객들이 몇 명인지 헤아리기가 까다로운데, 오히려 이러한 장치가 유명 하지 않은 보통 사람들인 목자들의 익명성을 강조하는 데 일조하는 듯하 다. 렘브란트는 같은 주제로 유화도 그렸는데, 오히려 이 단색판화가 채색 화보다 화려하지 않고 소박함을 잘 드러냄으로써 여느 작품에서 맛볼 수 없는 기쁨과 평안의 정취를 느끼게 한다.
10. 준비된 경배자
누가복음서에선 낮은 지위에 있는 목자들의 경배가 다루어졌다면, 마태복음서에선 고위직인 현인(賢人)들의 경배가 다루어졌다는 점에서 대조적 이다. 더욱이 그들이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으로서, 동쪽으로부터 온 박사 들이었다는 점에서 더욱 대비가 된다. 그런데 도대체 이들은 어떤 사람들 이었던가?
흔히 우리가 “동방 박사 세 사람”이라고 지칭하며 노래까지 부르고 있지 만, 마태복음서에는 동방 박사가 몇 명인지, 그들의 나이와 인종이 어떠한 지 전혀 언급이 없고, 오직 ‘박사들’, 곧 헬라어로 ‘마고이(μάγοι)’라고 ‘마 고스(μάγος)’의 복수형만 표기되어 있다. 흔히 라틴어 ‘마기(magi)’라고 도 불리는 이 말은 고대 바빌로니아인(갈대아인), 메대인, 페르시아인 및 기타 사람들이 박사·교사·제사장·의사·점성술사·선견자·해몽가·점술 가·마술사 등을 지칭하는 말이었으며, 한마디로 ‘현인’, 곧 ‘지혜로운 사람’들을 통칭하는 용어였다.
특수 지위에 있는 이들, 현인들이 별을 발견한 후 꾸준히 관찰하고, 멀리 떨어진 거리를 감안해 여행 일정을 짜고, 수행원들을 꾸리고, 식량과 예물 을 준비하는 일 등에서 얼마나 꼼꼼히 계획하고 상세히 준비하여 실행했 을지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터이다.
한편 동방 박사들이 아기 예수께 바친 선물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자. 그 선물들이 의미하는 바가 확실하지는 않지만 많은 이들이 상징적인 의미 를 부여하고 있는데, 흔히 황금은 왕권을 상징하고, 유향은 제사장직을 상 징하고, 몰약은 죽어서 무덤에 들어갈 인간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스콜라 철학 이전의 마지막 교부 신학자라고 일컬어지는 성 베르나르도 (Saint Bernard)는 이 세 가지 선물에 대해 더욱 실제적인 해석을 선호하 였는데, 곧 황금은 가난한 요셉과 마리아를 구하기 위한 것이고, 유향은 마굿간에 향기를 내기 위한 것이고, 몰약은 약제로서 아기의 건강을 위한 것이라는 해석이다.
아울러 학자들은 이 선물들이 성가족이 이집트로 도피하여 생활할 때 생 계에 많은 도움을 주었을 것이라고도 한다. 어찌 되었건 이 선물들은 그 상징적 의미로든 실질적인 의미로든 적절한 것으로서 정성껏 준비하여 최고의 예우를 갖추어 드린 선물임은 틀림없는 것이다. 서양 기독교 미술사의 초기 묘사에서는 동방 박 사들이 페르시아풍의 의 복을 한 채로 선물을 내 밀고 걸음을 내딛는 모습 으로 표현되는데, 동방박사와 관련된 가장 오래된 묘사는 4세기의 카타콤 그림과 석관 돋을새김 (부조(浮彫))에서 볼 수 있다. 지금 여기서 보는 <아기 예수를 경배하는 세 명의 현인 곧 동방 박사>는 당시 도상의 전형적인 모습을 잘 드러내고 있 는 작품이다. 후대의 묘사보다는 단순하지만 오히려 이 돋을새김은 마태 가 서술한 ‘동방 박사들의 경배’를 성경 그대로 핵심만 표현하고 있다.
맨 왼쪽엔 마리아와 그녀에게 안긴 어린 예수가 있으며, 그 두 사람 위에 별을 새겨 넣음으로써 “동방에서 본 그 별이… 아기가 있는 곳에 이르러 서, 그 위에 멈추었다”(마 2:9)는 사실을 직관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리 고 맨 앞의 동방 박사가 오른손으로 그 별을 가리킴으로써 “그들은 그 별 이 멈춘 것을 보고”(마 2:10),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경배하였다. 그 리고 그들의 보물 상자를 열어서, 아기에게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마 2:11)는 사실을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박사와 낙타, 박사와 낙타, 박사와 낙타 순으로 ‘황금과 유향과 몰약’이라는 각각의 예물에 대응하여 세 명의 동방 박사를 묘사하 긴 했으나 이 돋을새김에선 박사들 세 명의 모습이 모두 동일하게 나타나 고 있다는 점이다. 몸짓과 걸음걸이마저 똑같게 묘사함으로써 인물들 간 의 세부적인 차이보다는 경배의 사실 자체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서양 미술사의 전통 도상학에서는 동방 박사들의 숫 자와 나이와 인종 등이 굳어져 갔다. 때로는 전승에 따라, 이들 각각을 노 인의 모습을 한 페르시아의 왕 멜키오르, 중년의 모습을 한 인디아의 왕 발타사르, 청년의 모습을 한 아라비아의 왕 카스파르로 설정하기도 하였 는데, 이들을 왕으로 상정한 것은 구약성경을 근거로 다른 나라의 임금들로 간주하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이다(참고. 시 72:10-11; 사 49:7, 23; 60:3, 5-6. 다만 여기서 해당 구절과 동방 박사의 상관성 및 적절성 여부 는 논외로 함.) 더러 이름과 나이가 바뀌기도 하였다. 나아가 14세기 이후 엔 이들 세 명을 노아의 후손에 맞게 각기 다른 인종, 다른 나이, 다른 대륙 출신으로 그리기도 하였다. 하여튼 후대 사람들의 상상력 추가에 따른 동 방 박사들의 모습이 어떠하든지 간에, 중요한 점은 이들이 이방인 최초로 그리스도를 경배한 이들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는 것이다. 후대의 묘사에서는 박사들 의 인종이나 나이 등에도 변화 를 주어 묘사하고 있으며 많은 수행원들과 동물도 등장시키고 있는데, 더욱 극적이고 다양한 모습으로 연출되는 예들 중 하 나로 피터 판 린트(Pieter van Lint)의 <동방 박사의 경배>를 살펴보자. 17세기 플랑드르 화가이자 태피스트리 디자이너였던 린트의 이 그림은 앞서 보았던 돋을새김과는 반대로 오른쪽에 아기 예 수와 마리아와 요셉을 배치하고 왼쪽엔 동방 박사들과 함께 한 일단의 수행원들을 배치하고 있다.
그는 다양한 인물들을 화면에 채웠는데, 꿇어앉아 선물을 드리는 나이 많은 동방 박사 뒤로 인종과 나이를 달리한 동방 박사 둘이 연이어 서 있 고, 그들 주위로 병사와 시종 등 수행원들을 배치하고 있다. 수많은 인원 들 중에는 남녀노소가 섞여 있고, 왼쪽 위쪽에 말 탄 기병들이 있으며, 동
물로는 말 외에도 왼쪽 아래에 개 한 마리가 있는 것도 인상적이다. 화가 는 이렇게 꽉 찬 등장인물들을 통해 베들레헴의 한 누추한 집을 성대한 의 식이 펼쳐지는 장대한 공간으로 만들고 있는데, 그 가운데 화면 중앙 여백 에는 이들 일행의 방문의 단초가 된 별이 뚜렷하게 보인다.
‘목자들의 경배’와 ‘동방 박사들의 경배’의 닮음꼴
두 주제의 그림들은 실상 화면 속 인물들만 다를 뿐이지 도상학적으로는 동일한 구도를 취한다고 볼 수 있다. 한쪽에 아기를 중심으로 성가족이 일 군을 이루고 또 한쪽에는 경배하러 온 목자들이나 박사들이 위치한다. 때때로 화가들이 굳이 차이를 두는 것이라면, 화면 속에 별을 설정하느냐의 여부이다. 목자들은 천사들에게서 직접 듣고 온 것이지만 박사들은 별을 보고 별의 인도에 따라 방문하였기 때문이다. 물론 화가들은 별을 그리지 않고 박사들을 묘사하기도 한다. 그런데 최초의 성탄 뉴스가 1세기 팔레스타인 사회에서 가장 낮은 계층에 있던 목자들에게 주어졌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목자들은 당시 하층민에 속했던 익명의 집단이지만, 박사들은 학식과 지위를 겸비한 권세 있고 유명한 집단이었다는 점은 분명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 관련이 없을 것 같은 두 집단이 그리스도를 매개로 하여 하나로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은 성탄만이 이룰 수 있는 기적이다. 그렇기에 신분 및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은 가히 혁명적인 성탄 사건이라 할 수 있다. (하긴,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 성육신하셨다는 자체가 혁명적이지 않은가!) 지위가 낮은 이들은 아기 예수와 함께 함으로 써 영광의 자리에 함께 할 수 있었고, 지위가 높은 이들은 자신을 낮추어 아기 예수와 함께 함으로써 존귀의 자리에 함께 할 수 있었다. 결국 주님 앞에선 비천과 존귀가 하나 되어 동일하게 경배의 자리에 함께 나아갈 수 있다는 얘기이다. 이렇게 유대인으로 간주되는 목자들과 (세 명의) 이방인 동방 박사들이 결합하여 세계 모든 민족에게 기독교 메시지가 최초로 선포되고 있는 모습은 참으로 경이롭다.
11. 치밀한 학살자
해피엔딩으로 끝날 것 같은 성탄의 이야기는 마태가 복음서에 세 구절을 추가함으로써(마 2:16-18) ‘기쁜 성탄’ 이면에 비탄과 애도가 있었음을 전하고 있는데, 이 비극의 원인 제공자는 당대의 통치자 헤롯이었다.
‘헤롯 대왕’은 표면적으로 ‘대왕’에 걸맞은 업적들을 쌓았다. 궁전과 요 새와 경기장과 극장 등의 도시 건설에 힘을 쏟았고, 예루살렘 성전이라는 대공사를 착공하여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두매인이었다. 유대인 통치자이면서도 이방인으로서 자기 정체성의 한계를 느꼈다. 그래서 그는 단호하게, 때로는 무자비한 정치를 펼쳤다. 불안과 의심으로 아내와 자식과 친척들을 살해하기까지 하였다. 그리고 그런 잔인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소식을 듣고는 모두 다 성탄을 축하하는 행렬에 스스로를 제외시킨다. 가진 것을 내려놓지 못했기에, 더 많은 것을 누리고 싶었기에.
그는 동방 박사들처럼 자신의 권위를 내려놓음으로써 위대한 겸손을 표현하는 데 동참할 수도 있었건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아니, 말로는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할 생각이오”(마 2:8)라고 했지만, 그는 세상의 권위와 하늘의 권위를 분별하지 못했다. 치밀하게 계산하여 “박사들에게 알아 본 때를 기준으로… 두 살짜리로부터 그 아래의 사내아이를 모조리 죽였다”
(마 2:16). 혹시나 하여 범위를 “베들레헴과 그 가까운 온 지역”으로까지 넓혀 젖먹이들을 잔혹하게 “모조리” 학살하였다(마 2:16). 그런데 헤롯은 영유아 학살 후 자신의 목적을 온전히 이뤘을까, 온전한 평안을 누렸을까? 헤롯은 대왕으로 일컬음을 받았으나 ‘헤롯’의 뜻인 ‘영웅의 아들’이란 이름답게 그대로 살지는 못했다. 그는 세속적 권위와는 달리 진정으로 영웅 이 되지는 못하였다. 15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가인 마테오 디 조반니 (Matteo di Giovanni)가 그린 <베들레헴에서 있은 영아 학살>은 정사각형의 화면에 서 위와 아래를 양분하여 권 력자의 힘과 무고한 이들의 희생을 비교하고 있다. 위쪽 의 건물 묘사는 화려한 고대 로마 건축 양식대로 돋을새김 이 가득한 돌림띠와 기둥머리 장식과 아치를 특징으로 하고 있는데, 이러한 배경은 헤롯이 가진 권력을 가장 잘 드러낸다. 마태복음서 는 헤롯의 명령에 따라 보냄을 받은 사람들이 해당 지역의 아이들을 학살 하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화가는 명령과 실행을 한 공간에서 처리함으로써 독자들에게 모든 벌어진 상황을 한 눈에 파악하게 하고 있다.
실제 비례보다 과장되고 크게 그린 권력자 헤롯은 오른쪽 높은 곳에 앉아서 오른손의 검지를 뻗어 지시를 내리고 있고, 아래쪽엔 여러 사람이 충격과 공포가 혼재된 상태로 그려져 있는데, 쫓거나 죽이는 잔인한 병사들 과 두려움에 싸여 아기를 안고 도망가는 어머니들을 묘사하고 있다. 맨 아래에는 죽은 아기들이 누워 있고, 몇몇 어머니들은 그 아기들을 끌어안고 울부짖는 상황이다. 그 와중에 화가는 중앙 아치 현관의 위쪽에 몰래 숨어 있는 가족을 그려 넣었는데, 이를 보고 독자들은 속으로 생각하게 된다. ‘과연 이들은 무사했을까?’ 플랑드르 바로크 전통의 가장 영향력 있는 예술가인 페테르 파 울루벤스(Peter Paul Rubens) 의 작품은 고전과 기독교 역사 의 박학다식한 면을 잘 드러내 고 있는데, 그의 그림 <영아 학 살>은 사람들의 움직임, 색상 및 관능을 강조함으로써 성서 속 베들레헴의 학살 사건을 더욱 극적으로 처리하고 있다. 루벤스는 이 주제로 두 개의 그림을 그렸는데, 이것은 그의 첫 번째 그림이다.
이 그림과 관련하여 시대적 배경을 알아볼 필요가 있다. 동일한 주제에 관한 첫 번째 그림 당시 벨기에 플랑드르 지방의 도시 안트베르펜은 불과 몇 년 전에 전쟁을 겪었으며 1609년 휴전으로 일시 중단되었는데, 한 해 동안에만 가톨릭교도와 칼뱅주의자들 시민 사이에 살육전이 벌어져 수천 명의 시민이 살해된 적이 있었다. 네덜란드를 통치하는 스페인 군대는 개신교 군대를 격퇴하려 하였고, 그에 따라 안트베르펜은 네덜란드 국민에 대한 스페인의 잔혹학살의 현장이 되었다.
전쟁에서 가장 피해를 입는 이들이 어린이들과 여인들임을 감안할 때, 당시의 종교 전쟁이자 독립 전쟁이 한창이었던 상황에서 성경의 주제를 다룬 이 그림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남다른 생각을 불러일으켰으리라. 이 그림은 먼 옛날의 얘기가 아닌 당대 현실을 증언하는 그림이 되었을 것이 다. 가만, 그런데 이 주제의 그림은 복음서의 기록 시대나 화가가 살던 시대에만 유효한 의미가 있는 것일까?
아기 예수의 탄생 소식과 그로 인해 죽임을 당한 영아들에 관한 이야기 는 참으로 착잡함을 금할 수 없게 만든다. 하지만 이 사건은 잘못된 통치 자와 무고한 죽음의 역사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보통 헤롯의 영유아 대학살을 영어로 “the Massacre of the Innocents(더 매서커 오 브 디 이너슨트)”라고 표기하는데, 영어 ‘innocent(이너슨트)’는 특히나 어린아이를 일컫지만 어린이뿐만 아니라 범죄·전쟁 등에 직접 관계가 없으면서 희생을 당하는 ‘아무 잘못이 없는, 무고한, 순진한’ 이들 모두에게 도 해당하는 일이지 않는가!
사실 이 학살 이야기는 우리로 하여금 성탄절을 마냥 기뻐하고 즐기려는 마음을 저어하게 한다. 마음이 편치 않다. 혼란한 마음의 상태에 있는 우리에게, 현대의 저명한 신학자이자 기독교 평화주의자인 스탠리 하우어워스(Stanley Hauerwas)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마도 복음서에서 이 아이들의 죽음보다 더 결정적으로 크리스마스의 감상적 묘 사에 도전하는 사건은 없을 것이다. 헤롯과 같은 폭군의 권력을 보호하기 위해 어린이들이 죽임을 당하고, 계속해서 죽임을 당하는 세상에 예수님이 태어나셨다.”
이천 년 전에도 하나님이 어디에 계시냐고 울부짖는 이들이 있었다. 그 리고 그러한 역사는 반복된다. 오늘날에도 폭정으로, 잘못된 정치적 결정으로 전쟁의 참화 속에서 희생당하는 무고한 이들이 있다는 사실을 목도 하면서 여전히 하나님이 어디에 계시냐고 묻게 된다. 예수의 탄생 당시나, 현재나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상황 가운데서도 믿을 수밖에 없다. 아기 예수님은 절망 속에서도 새로운 희망으로 오셨음을. 어둠과 참혹함 가운데서도 실낱같은 빛에서 더욱 강한 참된 생명의 빛으로 오셨음을. 그 아기 예수님이 이 험난한 인간 세상에 임마누엘로 오 셨음을. 그리고 그분이 우리에게 약속한 바를 믿는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마 28:20)라고 한 그 말씀을.
그리하여 전쟁과 파괴와 폭력으로 고통을 겪는 가운데서도, 우리는 그분을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리며 맞이할 수밖에 없다, 성탄의 주인공인 그분 만이 진정한 평화의 왕이시기에.
그래서 역설적으로 우리는 이번 성탄절에도 외친다. 나를 향해, 그리고 세계 시민 모두를 향해.
“기쁜 성탄!” “메리 크리스마스!”
2023. 12. 01
출처: 교회성장연구소(portal.icg21.com/board/board.php?bbs_id=humanities&ptype=view&kbbs_doc_num=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