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주원규/AI를 묻는다, 복제 인간을 묻는다/주간기독교


AI를 묻는다, 복제 인간을 묻는다

리들리 스콧 연출 《블레이드 러너》, 드뉘 빌뇌브 연출 블레이드 러너 《블레이드 러너 2049》를 생각하며


1980년대 초반, 지금은 거장 반열에 오른 리들리 스콧 감독의 《블레이드 러너》가 제작, 소개될 때만 해도 이 영화가 어떤 종류의 영화인지 가늠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영화의 흥행 여부를 떠나서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사이보그, 오늘의 AI 전신으로 알려진 레플리컨트의 출현에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던 것이 그때의 분위기였다. 하지만, 오늘날 레플리컨트로 대표되는 인간의 기능을 넘어서서 감성까지 장착한 인공지능은 하나의 대세로 자리 잡았고, 그에 관한 예언을 입증해 보이기라도 하듯 1980년대의 원작을 오늘의 디스토피아적 풍경으로 재구성한 2017년 작 《블레이드 러너 2049》가 선보였다. 두 영화의 감독과 시대 배경 모두 상이한 차이가 있지만, 고도의 기술 발전과 인공지능의 개발이 가져온 빛과 그늘에 관한 성찰은 여일했다. 무엇보다 이 영화가 전달하는 종말론적 분위기는 흡사 성경의 존재론을 닮았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려웠다.



밤, 그리고 레플리컨트

밤은 은폐의 시간, 복제의 시간이다. 모든 것을 어둠 속에 파묻고 음모를 꾸미기에 최적화된 시간이다. 1982년, 2017년, 천문학적 자본을 쏟아부은 두 작품, 《블레이드 러너》와 《블레이드 러너 2049》 모두 박스오피스와 평단 모두에게서 유의미한 찬사는 받지 못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블레이드 러너》의 실패 요인은 단지 밤과 폐쇄적 미장센이 무모할 정도로 포진된 것에만 있지 않다. 그보다는 밤이 가진 모호함, 모든 것이 불명확해지는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만 영화를 채워 넣었다는 점이 치명적 약점으로 작동했다. 《블레이드 러너》에서는 밤이 가진 무한한 은폐와 복제의 가능성이 레플리컨트로 대표되는 인간 복제품의 전면적인 등장으로 인해 점입가경을 이룬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진실, 곧 원본에 대한 강박을 품고 있다. 원본에 대한 강박은 평소엔 수면 아래에 가라앉아 있지만, 리얼리즘에 대한 본격적 위협을 느낄 때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어기제로 본격화된다. 《블레이드 러너》의 담대함은 불안의 강박을 영화 전면의 주제의식으로 재연해 냈다는 데 있다. 원본을 찾아내고 복제와 구별 짓기를 시도한 뒤에야 안전하다고 믿는 불안과 두려움. 그러한 감정의 실존을 버젓이 전시해 놓은 것이 바로 《블레이드 러너》가 추종하는 밤의 리얼리즘이다(‘밤의 리얼리즘’은 리얼리즘을 말하는 하나의 환상적 접근으로써, 밤의 모호성과 관련된 한 이데올로기를 상징한다).

성경의 이야기에도 원본에 대한 강박은 예외가 아닐 정도로 빈번히 등장한다. 하지만, 배타적 시선에서 본 원본은 단연 유대인과 그들의 국가, 이스라엘이다. 현실의 유대교는 ‘이스라엘 민족 = 선택된 민족’이라는 배타성을 마치 성경이 가리키는 본질인 양 각색해 왔다. 배타성의 눈으로 볼 때, 이방의 피가 흐르는 이들은 짐승과 다름없으며 신의 준엄한 저주로 다스려야 마땅했다. 구약성경에는 신에게 특별히 선택받은 참사람을 위협하는 야만의 기원과 그 상징들이 등장했다. 이를테면 네피림은 칼과 무기로 대표되는 야만의 문명을 상징하며 신의 질서를 훼손하는 존재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인류사에 반드시 필요한 동행자 모습으로도 그려져 씁쓸한 아쉬움을 자아내기도 한다.

문명의 수혜를 넉넉히 힘입은 존재이지만 문명이 가진 위협으로 언젠가는 반드시 그 동행의 끈을 끊고 죽여 없애야만 하는 존재, 네피림. 어느 순간에 돌출될지 모르는 두려움과 불안의 원인 인자, 네피림. 성경 스토리텔링에 지속해 출몰하는 네피림과 그에 관한 상징들은 현대 사회에선 ‘자본’이라는 모순의 연속으로 대표되는지 모른다.



바벨탑, 우상, 그리고 사랑

바벨탑 이야기는 기독교를 넘어 일종의 보편적 이야기로 자리 잡았다. 단 하나의 탑을 하늘 높이 쌓아 올린다는 일화가 주는 교훈의 핵심엔 신이 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이 있다. 바벨의 신비 위에 쌓아 올린 탑은 설령 그것이 공중누각이라 할지라도 인간의 욕망을 제대로 자극했다는 점에서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성경에서 바벨의 욕망을 지속해 끌어내는 동력이 하나 존재하는데, 바로 우상이다. 우상은 인간 자신이 세워놓은 가공의 욕망이란 점에서 쉽게 상실되지 않는 지속력을 갖고 있다. 또한, 우상은 욕망을 넘어서서 인간 행동 체계의 획일화를 제대로 도모할 수 있다. 이른바 왜곡된 통일성을 강화하는 것이다.

왜곡된 통일성으로서의 우상은 사랑을 성찰할 기회를 처음부터 박탈한다. ‘원본’ 또는 ‘존재’의 복잡성으로부터 비롯된 실체적인 사랑과 달리, 욕망의 공중누각 위에 세워 올린 ‘우상’과 관계된 사랑은 무척 대담하다. 설령 그 허무함이 발각된다 해도 언제든 그 책임을 우상에게 돌려세워 자신의 내면 자아는 지킬 수 있다는 믿음을 주기 때문이다.

바벨 이야기의 서늘한 허무감은 《블레이드 러너》를 감상할 때에도 여실히 느껴진다. ‘이건 미래의 일이다.’ ‘레플리컨트는 영화 속 허구 혹은 허무의 범주에 불과하다’라는 식으로 거리를 두는 태도가 그것이다. 하지만 《블레이드 러너》의 세계관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이러한 거리 두기의 근간은 뒤흔들린다. 복제인간 레플리컨트를 성찰하게 되기 때문이다. 타자에게 전가한 욕망의 주체가 다름 아닌 자아란 사실, 그리고 그것을 부정함으로써 초래되는 치명적인 함정에 대해 우리가 침묵해 왔음을 레플리컨트는 깨닫게 해준다.



레플리컨트: 유용하거나 위험하거나

복제의 근원엔 자본이 모순이 담겨있다. 《블레이드 러너》는 자본의 신비 혹은 폭거의 획일성을 표현하는 데 있어 어둠과 폐쇄, 그리고 눈동자를 적극적으로 사용한다. 은폐와 강요된 침묵을 상징하는 밤, 화면 속 미장센을 지배하는 닫힌 정서가 지속하는 가운데 자아는 분열을 맞이하게 된다.

자본이 인간의 고유성과 복잡성을 은폐하는 기능으로 작동했다면, 자본에 힘입어 생산된 복제인간 레플리컨트는 자아 그 자체를 차단하며, 타자가 규정한 자아에 주목하게 하는 신비로서 작동한다. 《블레이드 러너》의 난처한 지점은 레플리컨트의 신비를 닫힌 공간의 이미지와 극단적으로 접합한다는 사실에 있다.

폐쇄된 공간 이미지가 영화의 이야기 자체를 삼켜버릴 기세다. 그 기세에 힘입어 복제된 자본의 희생양들이 저항 혹은 교란을 도모한다. 자본의 획일성, 그 토대 위에서 전개된 레플리컨트의 움직임은 인간 생존 본능과 인간의 욕망을 반영하면서도, 자본의 영향 아래 장악된 이른바 도구 우상으로 기능했다. 유용하면서도 위험한 존재. 레플리컨트는 이러한 양가성을 띠고 인간 세계로 파고들었다. 이는 또 다른 할리우드의 상상력인 ‘외계 생명체의 위협’이나 ‘혹성 탈출’ 같은 외부로부터의 침투와는 차원이 다르다. 레플리컨트는 단연코 인간 내부에서 발아된 교란이다. 유용성과 친밀도가 은밀한 만큼이나 위험의 정도 역시 치명적인 수준이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더는 보이는 세계가 문제가 아니라는 데 있다. 보는 눈 자체가 문제일 수 있다. 두 영화 모두 때로 길고 난해한 장광설로 발전시킬 법한 질문들이 넘실거리는 가운데, 레플리컨트는 원본과 복제 사이에 스며든 자본의 지옥도를 무자비하게 폭로한다. 인간 내부에서 최소한의 믿음의 영역으로 남겨두고 싶었던 것들을 모조리 의심스럽게 만든다. 그 폭로가 홍채 실험을 통해 엄습했다면, 이제 눈으로 보이는 세계는 원본인가, 아니면 복제인가. 질문 자체가 교란의 구렁텅이 속으로 빠져든다.

AI, 인공지능의 본격 도입으로 인해 인간다움에 대해 더 진지하게 질문하는 시간이 돌아왔다. 한 편의 영화로 이 복잡한 논의를 다 담아낼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새로운 세계를 향한 한 걸음 내디딜 수 있는 게 교회의 역할, 종교의 역할이 될 수 있진 않을까 기대해 본다.

2023. 11. 01.


출처 : 주간기독교(http://www.cnews.or.kr/news/articleView.html?idxno=25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