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하경택/"전도서의 헛됨 신학"/목회와 인문학


전도서의 헛됨 신학

하경택 교수(장신대, 구약학)


전도서의 신학과 주제를 각인시키는 핵심어는 ‘헛됨’이다. ‘헛됨’으로 번 역한 히브리어 낱말은 <헤벨>( )이다. <헤벨>은 구약성경에서 73회 사 용되었는데, 이러한 용례 가운데 38회가 전도서에 나타난다. 전도서에서 <헤벨>이 중요한 이유는 단지 빈도수 때문만은 아니다. 이 낱말이 등장하 는 위치와 문맥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전도서의 중심 진술인 “헛되고 헛되 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는 표현은 약간의 차이만 있을 뿐 책의 서두(1:2)와 결말(12:8)에 반복되고 있다. 이 진술은 전도서의 틀을 형성하며, 전도서의 중심 주제와 신학을 특징있게 드러낸다.1)


이 낱말의 정확한 어원은 알 수 없으나 숨소리를 나타내는 의성어(어근 hb > hbb 또는 hbl)에서 파생된 것으로 추정된다.2) 이 낱말의 기본 의미는 ‘호흡, 숨, 입김’이다. 헬라어로는 유사한 기능과 의미를 가지고 있는 <아트 미스> 혹은 <아트모스>로 번역된다. 이 낱말과 함께 가장 자 주 사용되는 낱말은 <루아흐>이다(사 57:13; 렘10:14; 전 1:14 등). 전도서에 사용된 <헤벨>은 연구자들에 의해서 다양하게 번역되었다. ‘한숨(Breath)’, ‘의미 없음(Meaningless/make no sense)’, ‘덧없이 지 나가 버리는(fleeting)’, 삶의 제한을 의미하는 ‘하루살이(Ephemaral)’, 


‘부질없는 생각(안개, Vapor)’, ‘무 상함(Transience)’, ‘공허(Vanity/ vain)’, ‘헛수고(hollow mockery/ thing)’, ‘무용지물(Futility/Futile)’, ‘무(Emptiness)’, ‘불합리(Absurdity)’ 혹은 ‘이치에 맞지 않는(absurd)’, ‘이해할 수 없는(incomprehensible)’,

‘일치하지 않는(incongruous)’ 혹은 ‘아이러니한(ironic)’, ‘영(Zero/ Nichtiger)’ 등.3) 이러한 사실은 <헤벨>이 가지고 있는 함의가 얼마나 깊 고 다양한가를 알 수 있게 하며, 전도서의 핵심 주제를 드러내기에 얼마나 적절한 표현인가를 알 수 있게 한다. 또한 이것은 ‘코헬렛’4)의 낱말 선택 이 얼마나 탁월한가를 보여준다. 코헬렛은 전도서에서 전도자는 이 낱말 을 다양한 용도로 활용한다. 따라서 이 낱말은 여러 주제들 - 존재, 삶, 경 험, 행위, 사건 등 - 과 다양한 문학적 상황에서 다의적 의미를 산출해 내 는 ‘다원적 개념(Multivalency)’으로 활용된다고 말할 수 있다.5)


전도서의 핵심 진술은 “모든 것이 헛되다(    )”이다. 이 진술에는 코헬렛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응축되고 집약되어 있다. 이 진술은 전도서 1장 2절과 12장 8절에 동시에 나타나고 있으며, 전도서의 틀을 형성하며 동시에 전도서의 모토(Motto) 역할을 한다. “모든 것이 헛되다”라는 코헬 렛의 진술은 다음 세 가지로 설명된다.6)


첫째, ‘모든 것이 헛되다’라는 말은 해 아래의 삶이 영원하지 않음을 의 미한다. 해 아래 있는 모든 것은 끝이 있고 사라진다는 것이다. 모든 것에 는 종말이 있음을 일깨워주는 것이다.

 

둘째, ‘모든 것이 헛되다’라는 말은 해 아래의 삶에는 부조리와 불합리 가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땅 위에서 경험하는 우리의 삶에는 하나님의 뜻 과 정의가 분명하게 나타나지 않아 어둡기도 하고 ‘악한’ 때가 많다. 때로 는 지혜도 유용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의미에서 <헤벨>(    ) 이라는 표현에는 ‘이게 뭡니까?’라는 코헬렛의 질문이 담겨 있다.

 

셋째, ‘모든 것이 헛되다’라는 말은 그러기 때문에 참된 의지의 대상을 찾으라는 말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이해는 ‘창조주 기억’과 ‘하나님 경외’ 라는 말로 대치될 수 있다. 코헬렛은 해 아래의 삶이 영원하지 않고 불합 리가 많다고 해서 비관하거나 절망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손쉽게 해 위의 삶으로 도피하지도 않는다. 그는 끝까지 해 아래의 삶에 대한 교훈에 집중 하며, 이 땅 위에서의 삶을 위한 교훈에 천착한다. ‘모든 것이 헛됨’에도 불 구하고 그는 하나님을 향한다. 아니, ‘모든 것이 헛되기 때문에’ 하나님께 로 향한다. 그는 해 아래에서 그리고 땅 위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헛됨’과 함께 하는 삶을 살도록 교훈한다. 그것의 핵심에 바로 ‘창조주 기억’과 ‘하 나님 경외’가 있다.

 

이러한 <헤벨>에 대한 고찰을 중심으로 전도서의 ‘헛됨’ 신학을 다음 세 가지 내용으로 요약할 수 있다.7)


첫째, 전도서는 ‘의심하고 질문하는’ 신학적 특징을 보여준다.

 

‘의심과 질문의 신학’이라고 명명할 수 있겠다. 코헬렛은 전도서 서두에 서 중요한 질문을 제기한다. “해 아래서 하는 모든 수고 가운데 사람을 위 한 유익이 무엇인가(  )?”(1:3) 이것은 전도서에서 코헬렛이 제기하 는 근본적인 질문이다. 이 질문은 “헛된 것들 중에 헛되다. 전도자가 말한 다. 헛된 것들 중에 헛되다. 모든 것이 헛되다”(1:2)라는 모토(Motto) 진술 바로 다음에 나타난다는 점에서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여기에는 하나님 의 질서와 삶의 의미에 대한 코헬렛의 의구심이 깊이 배어있다. 하나님의 질서와 삶의 의미가 제대로 관찰되거나 경험되지 않는 현실에 대한 코헬 렛의 문제의식이 담겨있다.


이러한 코헬렛의 질문은 3장 9절에서도 만나게 된다. “일한 사람이 자기 가 수고한 것에서 얻을 유익이 무엇인가( )?” 이 질문은 3장 1-15절 의 맥락에서 이해할 때 더 큰 의미가 있다. 코헬렛은 앞 단락(3:1-8)에서 14쌍의 때에 대한 언급을 통해 삶의 모든 상황을 열거한다. 그런 후 코헬 렛은 이 질문을 제기한다. 여기에서 코헬렛은 인간이 할 수 있는 행동에서 얻을 수 있는 유익이 무엇인가를 묻는다. 이후에 전개되는 내용에서 이 질 문에 대한 답변을 듣게 된다. 코헬렛은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이중적으로 전개한다(11절). 한편으로는 긍정적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부정적으로 답 변한다. “그는 모든 것을 그의 때에 아름답게( ) 만드셨다.”라는 것은 앞 서 제기한 질문에 대한 긍정적인 답변이고, “또한 그는 영원을 그들의 마 음속에 주시어, 사람이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찾 아낼 수 없게 하셨다.”라는 언급은 부정적인 답변이라고 말할 수 있다.


코헬렛의 질문은  (이트론)과 동의어로 사용되는  (요테르)의 용례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코헬렛은 6장 8절에서 “어리석은 자보다 나은 지혜로운 자의 유익이 무엇인가 ( )?”라고 묻는다. 지혜로운 자와 어리석은 자의 비교는 앞에서도 다루었 던 주제이다(참조, 2:13-17). 또한 6장 11절에서는 ‘헛된 것(  )’을 많게 하 는 일/말들(  )이 많이 있음을 지적 하면서, “그것이 사람에게 무슨 유익이 있는가?”라고 묻는다. 코헬렛은 지혜문학에서 당연시 될 수 있는

지혜자의 유익과 사람이 살면서 경험하는 일/말(  )의 유익을 질문한다. 코헬렛은 해 아래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것에 대해 의심하고 질문한 다. 그리고 철저하게 검토하고 숙고한다. 전도서는 코헬렛의 다양한 경 험과 관찰, 숙고와 반성을 포함하고 있는 책으로서 ‘아래로부터의 신학 (Theology from below)’의 정수를 보여준다.8) 이전의 전통과 신학을 무 비판적으로 수용하지 않고 의심과 질문을 통해 철저히 검토하고 숙고하여 새로운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구도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둘째, 전도서는 ‘기쁨과 누림의 신학’을 보여준다.

 

전도서에는 ‘기쁨’과 ‘누림’을 강조하는 언급이 자주 나타난다. 그것 은 ‘헤벨’에 대한 언급과 맞먹을 만큼 중요한 길목 곳곳에서 그리고 다양 한 표현 방식으로 나타난다. 다음 여덟 개의 본문이 대표적이다(2:24-25, 3:12-13, 3:22, 5:17-19, 7:13-14, 8:15, 9:7-10, 11:9-10). 코헬렛은


“사람에게 먹고 마시며 자신의 수고 가운데 자기 혼으로 좋은 것을 보게 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2:24)라고 말한다. 3장에서는 모든 때에 

대한 고찰 이후에 다음과 같이 말한다(12절). “나는 깨달았다. 그에게 생 명이 있는 동안 기뻐하는 것과 좋은 것을 행하는 것 이외에 그것들 가운데 좋은 것이 없음을.” 또한 3장 16-22절에서는 ‘하나님의 정의’(16-17절)와 ‘사람과 짐승의 운명’(18-21절)에 관한 주제를 다룬 후에 결론적인 언급으 로 단락을 마친다(22절). “그러므로 내가 알았다. 사람이 자기 자신의 일 에 기뻐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음을, 참으로 그것이 그의 몫이다.” 코 헬렛은 자신이 선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보았던 것이라고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5:17-18[18-19]). “그것은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그의 생명 의 날 수 동안 그가 해 아래서 애쓴 그의 모든 수고 가운데에서 먹고 마시 며 좋은 것을 보는 것이다. 참으로 그것은 그의 몫(   )이다. 또한 하나님 께서 부와 재산을 주시고 그것으로부터 먹게 하시고 그의 몫을 갖게 하시 며 그의 수고 가운데 즐거워하게 하신 모든 사람이다.”

코헬렛은 8장 15절에서 ‘기쁨’에 대해서 다른 방식으로 언급한다. 지금 까지는 줄곧 동사 형태로 말했지만, 여기서는 명사 형태로 ‘기쁨’에 대해 서 말한다. “그러므로 내가 기쁨(     )을 찬양하였다.” 이것은 기쁨에 대 한 코헬렛의 태도를 잘 알 수 있게 한다. 코헬렛은 하나님에 대한 찬양에 견줄 만큼 기쁨의 삶을 높이 평가한다. 그러한 그는 평가의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힌다. “왜냐하면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해 아래 사람에게 없기 때문이다.”

9장 7-10절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 이것은 기쁨의 삶을 강조하는 일 곱 번째 본문이기도 하지만, 2인칭 남성단수의 명령형으로 교훈하는 본문 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코헬렛은 자신의 교훈을 듣는 제자에게 이렇게 명 령한다(7절). “너는 가서 기쁨으로(  ) 네 음식물을 먹고 좋은 마음으 로(   ) 네 포도주를 마시라.” 먹고 마시는 것과 좋은 것을 보는 것, 즉 즐거워하는 것이 병렬적으로 서술된 본문들(2:24; 5:17[18])과 달리 여기 에서는 먹고 마시는 것을 기쁨으로 그리고 좋은 마음으로 하라고 권고한다. 전치사구의 표현 방식을 통해 먹과 마시는 일상의 삶에 기쁨이 동반되 어야 함을 강조한다. 이러한 코헬렛의 교훈은 이어지는 진술에서도 다시 한번 확인된다(9절). “네 헛된 생명의 모든 날, 즉 그가 해 아래서 네게 주 신 너의 헛된 모든 날에 네가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생명( )을 즐기라. 참으로 그것은 살아있는 동안 그리고 네가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너의 수고 가운데서 누릴 너의 분깃이다.”


기쁨과 누림의 삶에 대한 강조는 코 헬렛의 마지막 교훈(11:9-12:7)에서 절 정을 이룬다. 여기에서 코헬렛은 자신 이 교훈하고 있는 대상이 ‘젊은이’임을 분명하게 밝히면서 명령문을 통해 기 쁨의 삶을 살 것을 교훈한다(9전반절). “젊은이여, 네 젊음의 때에 즐거워하라.

네 마음은 네 젊음의 날들에 네 자신을 기쁘게 하라.” 그는 기쁨과 누림의 삶의 방식까지 교훈한다. 그것은 ‘마음의 길들과 눈의 본 바를 따라 걷는 방식’이 되어야 하며(9후반절), 마음에서 ‘분노’가 떠나가고 몸에서 ‘나쁜 것’이 지나가는 건강한 삶이 동반되어야 함을 역설한다(10절).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코헬렛은 그러한 삶을 살도록 하는 강력한 추동장치를 마련 해 놓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이 이 모든 것으로 인해 ‘공의 가운데로’ 데려 가신다는 사실과 젊음의 시간이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을 주지시키는 것이 다. 이것은 ‘젊은이’가 자신의 때를 놓치지 않고 기쁨과 나눔의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려는 코헬렛의 ‘동기부여’이자 ‘격려’이다.

 

셋째로, 전도서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경외의 신학’을 보여준다.

 

코헬렛은 ‘기쁨’과 ‘누림’의 신학을 펼치는 진술에서 그것이 가능한 이유를 하나님에게서 찾는다. 코헬렛은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서 나오는 것”(2:24)이라고 말하거나 “하나님의 선물”(3:13; 5:18)이라고 말한다. 이 것은 기쁨과 누림을 가능하게 하신 하나님에 대한 감사를 그 바탕에 깔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코헬렛은 다른 방향의 통찰도 제공한다. 그것은 하나 님이 하신 일에 대한 진술이다. 그것은 두 가지로 요약된다. 하나는 하나 님이 하신 것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일의 시종(始終)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코헬렛은 1장 15절에서 “구부러진 것을 곧게 펼 수 없고, 부족한 것을 셀 수도 없다.”라고 말한다. 매우 함축적이고 상징적인 언급이지만, 이것 은 이미 일어난 일은 어떻게 할 수 없다는 코헬렛의 통찰이다. 이러한 통 찰이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관계 속에서 언급된다. 7장 13절에서 코헬렛 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의 일을 생각해 보라. 그가 굽게 하신 것 을 누가 곧게 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이 하신 일은 누구도 거역하거나 바 꿀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코헬렛은 인간이 할 수 없는 일 가운데 더욱 큰 문제를 인식한다. 그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의 시종을 알 수 없다는 것 이다. 잘 알려진 3장 11절에서 코헬렛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는 모든 것을 그의 때에 아름답게 만드셨다. 또한 그는 영원(   )을 그들의 마음 속에 주시어 사람이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찾아낼 수 없게 하셨다.” 이와 유사하게 8장 17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때 내가 하나님의 모든 일을 보았다. 참으로 사람은 해 아래서 행해진 일을 알아낼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비록 사람이 찾으려고 수고할지라도 발견 하지 못할 것이며, 또한 지혜로운 자가 안다고 말할지라도 그는 찾아낼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혜자도 하나님이 하신 일의 의미를 제대로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통찰을 통해 코헬렛이 지향하고 있는 바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3장 14절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코헬렛은 “나는 깨달았다. 하나님 께서 하신 것은 모두 영원히 있을 것이 라는 사실을. 거기에 첨가될 것이 없고, 그것에서 줄일 것도 없다.”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코헬렛은 하나님이 이렇게 하신 이유를 밝힌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그분 앞에서 두려워하게 하려고 (그렇게) 행하신 다.” 여기에서 코헬렛의 논리와 진술 의도가 분명하게 인식된다. 하나님이 하신 일을 바꿀 수도 없고 그 일의 시종을 알 수도 없기 때문에 사람이 할 수 있는 일 그리고 마땅히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다. 이외에 도 하나님 경외에 대한 언급은 여러 차례 나타난다(5:7, 7:18, 8:12-13).

 

이러한 하나님 경외의 삶은 코헬렛의 마지막 교훈에서 ‘창조주 기억’으 로 대체된다.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기억을 교훈하는 것은 모든 문제의 제 공자이면서 해결자로서 하나님의 모습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것은 창조주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교훈하는 것으로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경외를 모두 포함한다. 이러한 코헬렛의 신앙과 신학을 간파한 전도서 편집자는 후기에서 12장 13절을 덧붙인다. “모든 말/일(   )의 마지막이 들려졌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키라. 참으로 이것이 사람의 모든 것 이다.”

 

전도서의 ‘헛됨’은 역설적이다. 코헬렛은 ‘모든 것이 헛되다’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강조한다. 그는 누구보다 모든 것이 영원하지 않으며, 이 세상에 는 이해할 수 없는 부조리와 불합리가 많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현실을 외면하거나 도피하지 않는다. 그것을 넘어서는 신앙 의 삶을 촉구한다. 그것은 하나님 주신 것에 대한 ‘기쁨과 누림’의 삶이고, ‘하나님의 경외와 창조주 기억’의 삶이다. 이것이 전도서 ‘헛됨’ 신학의 역설이다.

 

이러한 코헬렛의 가르침은 격변과 혼란의 시대를 사는 우리들이 귀 기울 이고 따라야 할 이 시대를 향한 ‘케리그마’가 아닌가? 


2024. 04. 01


출처: 교회성장연구소(portal.icg21.com/board/board.php?bbs_id=humanities&ptype=view&kbbs_doc_num=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