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이강선/"자국어 성경을 읽을 수 있게 되기까지: 코트어 성경에서 위클리프 성경까지"/목회와 인문학


자국어 성경을 읽을 수 있게 되기까지: 코트어 성경에서 위클리프 성경

이강선 교수(성균관대학교 초빙교수, 기독인문학연구원 연구위원)


많은 사람이 눈을 뜨자마자 성경을 읽는다. 오늘날 국어 성경, 달리 말해 자국어 성경을 읽을 수 있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자국어 성경을 읽을 수 있게 된 것은 근대 이후의 일이다. 수많은 사람이 성경을 자국어로 번역하기 위해 노력했고 그로 인해 혹자는 이단으로 몰리고 혹자는 심지어 사형에 처해졌다.

 

중세에 로마 교회가 공식적인 성경으로 인정했던 성경은 『불가타 성경』이 다. 히에로니무스(Eusebius Sophronius Hieronymus)가 23년(382-405년) 에 걸쳐 그리스어에서 라틴어로 번역한 성경이다. 이 성경은 1,500년 동 안 사용되었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용되고 있으므로 중세에는 오로지『불가타 성경』만이 존재했던 것일까? 공식적으로는 그렇다. 그러나 정식 으로 인정받지 못한 번역 성경은 여전히 존재한다. 한편으로『불가타 성경』에서 벗어나 각국의 언어로 번역되기까지는 지난한 세월이 걸렸다.

 

‘지난한 세월’이라는 표현은 각국의 언어로 번역한 성경이 공식 성경으로 인정받기까지의 길고 어려운 과정을 의미한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킹 제임스 성경』(1611년)만 해도 영국의 국왕 제임스 1세( James Ⅰ) 가 자신의 업적을 쌓기 위해 출판한 성경이다. 그 이전에도 영어 성경이나 다른 언어로 된 성경이 존재했지만, 공식적으로 인정받지는 못했다.


물론 여기에는 로마 교회의 권위가 존재한다. 공식적이라는 것은 최고 권위 기관이 인정한다는 의미다. 중세의 최고 권위 기관은 당연히 로마 교회였다. 중세인들은 그들의 믿음에 흔들림이 없었다. 그들에게 유일한 권 위는 왕도, 영주도 아니었다. 그들에게 절대적인 권위는 하나님이었지만, 그 권위를 대변하는 기관이 바로 로마 교회였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는 이는 사제였다. 간혹 비싼 성경을 갖고 있다고 해도 읽을 수 없었다 는 의미다.


당시 모든 책은 필사본이니 당연히 책값도 비쌌다. 평민은 라틴어를 아 는 이가 많지 않았으니 간혹 갖고 있다고 해도 읽을 수 없었을 것이다. 라틴어는 로마의 언어다. 각국에는 자신들의 언어가 있다. 영국에는 영어가, 독일에는 독일어가, 프랑스에는 프랑스어가 있다. 귀족의 언어인 라틴어 는 일상생활에 필요하지 않았다. 교회에서 사제가 읽어주는 성경 구절만 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평민들은 성경을 읽고 싶어했고, 성경 이야기를 알고 싶어했다.


중세는 왕이나 농노나 할 것 없이 모든 사람이 로마 교회의 영향력 아래 있던 시기였다. 거의 모든 사람이 교회를 중심으로 살았다. 태어나면 교회 에서 세례를 받았고, 장성하면 교회에서 결혼을 했으며, 살면서는 교회법을 따랐고, 교회를 지원하기 위해 세금을 바쳤고, 죽으면 물론 사제가 주 관해서 장례를 치렀으니 요람에서 무덤까지 교회가 이들의 삶을 주관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달리 말하면 그들에게는 절대적인 진리가 존재했다.


중세인의 삶 속에 성경이 깊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당시 성경은 라틴어로 되어 있었다. 불가타가 ‘대중을 위하여’라는 의미를 가진 것을 생각하면 아이러니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교회는 성경을 알리기 위해 힘썼다. 성당 건물에 아름다운 스테인드글라스로 성경 이야기를 표현하거나, 미사 중 짧은 연극을 넣기도 했다. 이러한 연극이 발전해서 거리로 나가 순회 극단이 생겨나 사람들에게 성 경 이야기를 알렸다. 그런가 하면 그림과 조각도 성경의 이야기를 재현했다. 서민에게는 성당의 아름다운 스테인드글라스도 좋았겠지만 거리 연극 이 한결 접근하기 쉽고 이해하기 쉬웠다. 연극은 창세기부터 시작해 성경 내의 이야기를 공연하는 이른바 종교극이었다.


종교극이 성경 내용을 알려준다고 해도 서민들이 읽을 수 있고, 특히 자 국어 언어로 된 성경이 절실했다. 연극은 사시사철 하루 24시간 공연하는 것이 아니므로 그러했다.


자국어로 된 성경은 『불가타 성경』 이전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2세기 경에는 시리아어로 된 성경 『페시타』가 존재했고 3-4세기 경에는 콥트어 번역이 존재했으며 5세기 초에는 아르메니아어 번역 성경이 존재했다. 또 한 게오르기아어 번역도 존재했으니 이들 성경은 히에로니무스의 『불가타 성경』과 유사한 시기에 자국어로 번역되었다. 그중에 고트(Goat)어 성경 은 서유럽에서는 가장 이른 시기의 ‘지역어’ 번역 중 하나이다.


고트어는 고트족이 사용하는 언어로, 현재는 사용되지 않는, 사멸한 언어다. 고트족은 게르만족으로, ‘작은 늑대’라는 의미가 있으며, 서로마 제 국 멸망에 큰 역할을 했다. 이 고트족을 위하여 고트어로 성경을 번역한 울필라(Wulfila)는 소아시아에서 건너온 로마 포로의 후손으로서 약 AD 311년, 현재의 루마니아로 추정되는 곳에서 태어났다. 그는 주로 이교도 였던 고트족 카파도키아 공동체에서 기독교인으로 자랐다. 그가 어떤 교 육을 받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30세에 고티아의 교회에서 강의했는데 이 강의를 하려면 성경 공부가 필요했다. 그는 번역가가 될 준비가 되어 있었 던 것이다.

 

울필라는 콘스탄틴 황제 치하에서 대사로서 고트로 보내졌고, 게르만 민족 대이동시대인 340년 동로마 제국 교회의 주교(主敎)가 되었다. 그의 언 어적 능력은 뛰어나서 그는 그리스어·라틴어 및 고트어에 통달했다. 울필라의 고트어 성경이 특별한 이유는 그가 고트족을 선교하기 위해 고트어 의 알파벳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문자를 만든다는 것은 한 나라의 사회, 문화, 교육, 정치, 역사, 종교 등 다방면에 큰 영향을 끼치는 일이다. 종교 선교는 물론이지만, 의사소통과 정보 교환에 기여하고 그 민족 특유의 역사와 문화를 보존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방법이기도 했다.

16세기에 프랑스 선교사인 알렉상드르 드 로드(Alexandre de Rhodes) 신부 또한 베트남어 문자를 체계화시켰는데, 이 문자는 오늘날도 사용되 고 있으며 베트남어의 보존과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울필라가 번역한 성 경의 일부를 담고 있는 『은자(銀字) 성서』(자주색 양피지에 은색, 금색 잉 크로 씌어 있음)는 고트어의 귀중한 문헌으로 남아 있다. 

이같은 공헌에도 불구하고 로마 교회는 울필라를 이단으로 규정지었는데, 그것은 울필라가 영지주의로 유명한 아리우스파였기 때문이었다. 달리 말해 울필라는 그리스도가 완전한 신적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성경을 번역했음에도 이단으로 몰린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물론 성경을 번역했음에도 이단으로 몰리는 상황은 복잡한 종교적, 정치 적, 사회적 함의를 지닌다. 울필라의 경우에는 교리적 해석의 차이가 그를 이단으로 만들었다. 즉, 교회의 공식 입장과 다른 해석을 했기 때문인 것이다.

울필라가 이단으로 몰린 것은 그가 아리우스주의자였기 때문이지 만, 그가 활동했던 기간 동안 교회의 공식 입장이 여러번 변화했으므로 살아 있는 동안 이단 판정은 없었다. 한편 그가 고트족의 주교였으므로, 그 점을 고려했던 것으로 보인다. 울필라는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즉, 그의 말년과 사후에 공식적 으로 이단으로 규정되었다.


그러나 단 한 구절로 인해 사형당한 학자도 있다. 1546년, 프랑스의 학 자였던 에티엔느 돌레(Étienne Dolet, 1509-1546)는 플라톤의 『악시오쿠스』에 나오는 대화편을 프랑스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사후에 아무것도 존 재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구절을 추가했다는 이유로 인해 비난받았다. 그 의 이 번역은 영혼의 불멸성을 부정하는 것으로 해석되었고, 이는 당시 심각한 이단적 견해로 간주 되었다. 물론 다른 이유도 있었다. 인쇄술의 발달로 이전과는 달리 텍스트 유통의 영향력이 커졌기 때문이다. 그는 반 교 권주의자이기도 했으나, 표면적인 이유는 영혼의 불멸성을 부정하는 구절의 추가였다.

 

그는 이단 혐의로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고, 1546년 8월 3일, 파리의 마 유베르 광장에서 교수형에 처해진 후 시신이 화형되었다. 이 사건은 성경 번역 때문은 아니지만, 단 한 구절로 인해 사형당함으로써 로마 교회의 권 위와 그들이 교권 도전을 얼마나 두려워했는지를 보여준다.

 

평민들을 위한 자국어로의 성경 번역으로 인해 사후 이단 판정을 받은 성경 번역가는 또 있다. 1382년에 최초로 영어로 성경을 완역한 존 위클 리프(John Wycliffe)이다. 그의 입장은 오직 성경만이 최고의 권위를 가진 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성경을 가진 이는 누구나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었다. 오늘날 너무도 당연하게 보이는 이 입장은 로마 교회가 보기에는 커 다란 도전이었고 위협이었다. 로마 교회는 사제만이 신과 인간을 매개할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위클리프 본인이 직접 모든 번역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의 동료들, 특히 니콜라스 헤레포드가 많은 부 분을 번역했으며, 위클리프는 번역 작업을 감독하고 일부를 직접 번역했다.


1377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11세(Gregorius XI)가 위클리프를 이단 혐의로 고발했고, 이단으로 선고받은 그는 옥스퍼드 대학에서 추방당했다. 

그가 죽은 후인 1428년, 교황 마르티누스 5세(Martinus V)의 명령으로 위클리프의 유해를 파내어 화형에 처하고 재를 강에 뿌렸다.


로마 교회는 영어 성경 소지를 금했고 읽기를 금했다. 한편으로 위클리 프 성경 사본들을 압수하고 파괴하려 했다. 이처럼 강력한 교회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위클리프의 영향력은 지속되었다. 그의 사상과 번역 작업은 후대 종교 개혁의 씨앗이 되었던 것이다. 그가 ‘개혁의 샛별’이라고 불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오늘 우리가 아주 쉽게 읽을 수 있는 우리말 성경은 수많은 수고와 도전 의 결과이다. 일상의 행위 하나하나가 오늘에 이르기까지 거쳐온 과정을 생각해 본다면 그 어느 것도 귀하지 않은 것이 없다. 우리의 삶의 모든 순 간이 빛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2024. 08. 01


출처: 교회성장연구소(portal.icg21.com/board/board.php?bbs_id=humanities&ptype=view&kbbs_doc_num=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