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프로젝트: 기후위기 시대의 기독교 16] 환경 기후 위기와 사회 봉사

김기용 박사

한일장신대학교 신학대학원 강사

영등포산업선교회 햇살보금자리 시설장

 

 


창세기는 기후의 변화를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의 창조 역사도 기후의 변화 사건이고, 노아의 방주 역시 그러하다. 이렇듯 성경 및 인류 역사에 기후의 변화가 있었다. 성경에 기록된 기후 변화의 역사는 하나님의 창조 섭리에 따른 선한 열매이며, 인류 죄과의 결과로써 새 창조의 질서가 세워지기도 했다. 그것은 청지기로서의 인류와 하나님의 창조 세계가 생명을 존중하며 서로 조화롭게 사는 일이다(사 11:1-9). 각기 자신의 역할과 능력에 따라 상대를 아끼고 돌보는 일에 다름 아니다. 이는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 하신 예수님의 말씀처럼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인류와 세계를 섬기시는 일과도 같다(디아코니아). 그렇다면 이미 결론은 주어졌다. 기후 변화의 위기를 그리스도인은 엄중하게 받아들이고 창조질서의 회복을 위해 분연히 청지기의 사명에 충실하여 창조 세계를 돌보고 봉사해야 한다. 

 

시인 윤삼열은 오늘날 기후의 변화를 “전쟁 같은 상황”이라고 했다.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약 3000년 전 실제 한 지역 주민 사이에 목숨에 위협을 가하는 유혈사태가 일어나기도 했다(sciencealert 2021.08.30.자). 그것은 먹고살기 위한 생존의 전쟁이었다. 이렇듯 이전의 기후 변화는 자연 현상의 결과이다. 이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빚어진 자기 생존의 몸부림으로써 인류의 비극이 연출됐다. 그러나 오늘날의 이상 기후 현상은 인류의 과욕 내지 탐욕이 켜켜이 쌓여 그 효율성이 극대화 된 경제 논리가 빚어낸 대결구도의 체계적 결과이다. 이러한 인위성은 지역적인 동시에 지구적이다. 인류 상호 간 영향을 끼칠 뿐만 아니라 창조세계 전체의 생명에까지 위협을 가하고 있다. 

 

인간은 더욱 좋은 환경에서 보다 편리하게 자신의 삶을 영위하고자 한다. 오늘의 이러한 행복 추구의 논리와 그 결과로써의 행위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타자(他者)의 희생을 필요로 한다. 예를 들면 자동차의 미세먼지는 도시를 오염시키고 인간의 삶의 질을 저하시키기 때문이다. 또한 육류의 섭취를 위해 가금류가 대량생산되며, 이에 따라 수질 및 대기질 오염 등 환경 문제를 야기한다. 골프장은 시설 하나에 하루 1천여 톤의 지하수를 필요로 하며, 환경을 파괴하고 인간의 생활 세계를 포함한 생태계를 무너뜨린다. 이렇듯 사람의 눈에는 쉽게 띄지 않는 타자 희생으로 그 영역 밖의 사람들에게는 크고 작은 유익과 편리를 준다. 하지만 결국 각 주체의 삶 속에 구체적으로 영향을 끼치며 인류 전체의 문제로까지 확산되어 그 피해가 되돌아오는 부메랑이 되었다. ‘자기희생’은 남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지만, ‘타자 희생’은 나 자신에게도 피해가 된다.

 

이 지점에서 다시 세계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섭리와 속성을 살필 필요가 있다. 예수의 제자라면 응당 구조적으로 타자가 희생되는 일을 지양하고, 자기희생을 통해 꺼져가는 생명의 불씨가 살아나도록 함께 노력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 진노의 심판은 인류를 멸하려 하시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한 사회 속에서 소외되고 외면 받는 사람들을 돌보고 조화롭고 평화로운 공동체 실현을 위한 정의의 실현이다. 예수님의 이웃사랑 실천(주로 치유 사역)은 각종 사정에 의해 사회 주변부로 밀려난 사람들이 다시 사회에 복귀하고 인간답게 살도록 도우신 일이다. 초대교회 시대에는 비로소 제도적으로 가난한 이웃을 돌보고 공동체 프로그램이 가동된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정의와 예수님의 이웃사랑, 그리고 교회의 제도적 신앙 행위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인류를 섬기신 방법이다.

 

기후 및 환경 개선을 위한 최근의 대표적인 노력 중 하나가 전기차 보급이다. 그러나 이마저도 완벽한 탄소중립 내지 탄소제로가 아니다. 즉, 전 세계적인 전기차 보급이 기후변화의 위기를 완전하게 해소할 방법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전기에너지 발전량의 대부분이 석탄(40%), 원자력과 LNG(각 26%)에 있기 때문이다. 최악이 아닌 차악을 선택하는 정도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기대하는 점은, 이러한 노력이 노하우가 되어 축적되면 언젠가는 기후 및 환경 문제를 상당히 해결하고 극복할 것이다. 비단 이 경우뿐만 아니라 현대인의 삶에서 소비되는 것 상당수에는 환경 및 기후 위기와 극복의 명암이 존재하고 때로는 극명하기까지 하다. 무언가를 얻으려면 또 다른 무언가를 잃게 되는 것이 오늘의 세상이다. 

 

오늘날 창조의 세계를 돌보는 일에는 희생이 필요하다. 세상은 타자를 희생시킨다.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엡 5:21)는 말씀처럼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자세로 겸양해야 한다(빌 2:3). 이를 위해 신앙인 각자는 자신의 삶의 터전에서 일상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러한 습관이 사회적 공감대를 이루기 위해 교회는 노력해야 한다. 그렇게 교회의 획기적인 시도는 사회 정책에 반영이 될 수 있어야 한다. 어느 기업은 종이 빨대로 플라스틱 사용을 줄여 환경 위기에 대응한다. 교회가 이러한 생활을 장려하거나 직접 그 친환경 생산 활동에 앞장서는 것으로 기여할 수 있다. 또 교회는 전문 시민사회활동기구와 협력할 수 있다. 생활에 불편을 최소화하면서 모두가 공감을 이루며 자기희생적으로 기후 위기에 대응할 수 있도록 정책적인 지원이 필요하다. 

 

환경과 기후 위기 극복을 위한 자기노력은 전적인 희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 자신을 포기하는 수준에 이르기까지 희생하는 일은 소진(Burn-Out)을 야기하고, 이는 다른 차원의 위기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아울러 모든 생명 주체에게는 각기 자신의 복리를 추구할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나 자신이 즐겁고 행복해야 그것이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어 사회와 공동체 곳곳에 스며들 것이다. 나 자신을 희생하되 그것이 나를 포함한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유익이 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곧 공동체적 노력이다. 구성원 간 체계적인 공감대 형성은 사회봉사 활동에 설득력과 당위성을 얻는다. 합의된 목적과 목표가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내적 결단은 외적으로도 지지를 얻고 협조가 가능해야 한다. 

 

인간을 위해 많은 생명이 희생을 당했다. 창조세계가 아프다. 이제는 인간도 그 영향을 받게 됐다. 하나님의 창조 목적과 정의는 돌봄과 공존이다. 예수님은 주변부에 밀려난 사람들을 사회 구성원으로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도우셨다. 초대교회는 가난한 이들을 지지하고 포용하며 함께 했다. “아프냐, 나도 아프다” 했던 어느 사극(史劇)의 대사처럼 서로 성령의 능력으로 치유 받아야 한다. 각 개인이, 교회가, 각 사회의 영역 및 정부와 국가가 타자의 입장에서 공감하고 합력하여 선을 이룰 수 있도록 노력하기를 원한다. 이는 결국 나 자신의 유익과 행복이 되어 충만한 은혜로 되돌아올 것이다.


 

 

- 프로젝트: 기후 위기 시대의 기독교 ; 생태신학 녹색교회 생명목회를 위하여 - 

- 공동주최: 기독인문학연구원-이음사회문화연구원 · 기독교환경교육센터 살림 · 에이치투그룹 주식회사

- 후원 및 연대기관: 주)천일식품 · 한국교회생명신학포럼 · 비블로스성경인문학연구소


출처: http://www.gdknews.kr/news/view.php?no=121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