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응복, 박소현 연출 《스위트홈》
넷플릭스 시리즈 《스위트홈》의 시즌3가 최근 공개되면서 이른바 한국 크리처물의 정점이라 평가받는 한 작품이 대미를 장식했다. 일단 보이는 성과는 화려하다. 시즌3까지 글로벌 OTT를 통해 제작, 공개되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박수를 보내기에 그렇다. 하지만, 제작하고 선보였다는 것만으로 작품의 평가를 마무리해선 곤란하다. 경쟁력을 비교하는 게 적절해 보일지 모르지만, 이미 할리우드로 대표되는 미국 드라마는 오래전부터 시즌제 사전제작을 제작, 마케팅 측면에서 안정화한 반면 한국 시즌제 드라마는 빠른 경쟁력 장착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헐거운 면을 다수 보여준다는 점이 깊은 아쉬움으로 남기 때문이다.
시즌2에서부터 그 징후가 나타났듯이 《스위트홈》 시즌3에 관한 반응 역시 호불호에 관한 평가가 극단적으로 나뉘는 편이다. 무엇보다 시즌2에서부터 충분한 인물 간의 서사와 개연성 있는 전개를 염두에 두지 못한 채 서둘러 세계관 확장을 시도하다 보니 그 확장된 세계관이 오히려 산만하고 어느 캐릭터 하나 제대로 회수하지 못했다는 평가가 아쉬운 부분, 곧 불호에 관한 대부분의 평가로 볼 수 있다. 시즌3 역시 이를 어느 정도 회수하고 이야기 밀도를 높이는데 할애할 것으로 기대했지만, 시즌2가 시도했던 밀도를 고려하지 않은 확장을 시도한 부분이 반복된 것으로 평가되어 아쉬움은 더 짙게 남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스위트홈》을 평가절하하는 건 부당하다는 평가도 적지 않다. 무엇보다 한국에서 제작되는 크리처물이 가진 참신성은 분명한 성과를 거뒀다고 보는 호평이 그것이다. 시즌2에서부터 세계관 확장이 다소 무리하게 전개된 건 사실이지만, 지금까지 글로벌 드라마와 영화에 등장한 크리처물에서조차 한 번도 본 적 없는 변종 크리처의 출몰과 그 출몰의 지속적인 변주가 가져온 볼거리의 파격은 한국 크러치물의 특별함으로 소개하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할 수 있다.
아울러 이야기 측면에서 스위트홈은 인간의 욕망에 관한 다소 공격적이지만 깊은 성찰을 유도하는 걸 볼 수 있다. 시즌3의 확장한 세계관에선 괴물로 전락한 이들이 완벽한 죽음과 부활의 재생 과정을 통해 신인류로 변모한다는 개념이 추가되었다. 신인류는 죽지 않는 불멸의 존재처럼 나타났기에 중간 단계에 서 있는 특수 감염인들의 두려움과 불안, 더 나아가 배제하고 싶은 기괴한 존재로 등장했다. 분명한 건 그 기괴함조차 죽지 않는다는 불멸의 가치관이 덧씌워지면서 동경의 신비로 발전했다는 것이다. 시즌2에서 괴물 혹은 괴물이 되어가는 괴물화 증상을 보이는 이들은 무조건 격리, 배제, 척결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죽지 않는 존재, 곧 신인류가 되기 위해 필연적으로 괴물의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는 사실로 인해 괴물 자체가 욕망의 동력이 되어버렸다. 이로써 괴물화 증상은 더는 숨기고 은폐할 게 아니라 스스로 과시하듯 드러내어 신인류로 나아가기 위한 욕망인 것을 긍정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직 괴물이 되지 않은 인간들은 전혀 다른 욕망에 사로잡히는데, 그것은 여전히 괴물로 변할 수 없는, 인간답게 살고자 하는 생존 욕구다. 왜 이 또한 욕망일 수밖에 없는가 하면, 인간은 괴물을 혐오하고 괴물로 변하는 순간 자신이 아무 쓸모 없는, 비인간의 자리로 무너져내렸다는 자괴감에 빠지기 때문이다.
여기에 덧붙여지는 신인류 자체의 모순도 존재한다. 괴물에서 신인류로 진화한 이은혁(이도현 역) 같은 인물은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 감정이나 인간적 양심을 느끼지 못한다는 건 결국, 자신이 죽지 않는다는 것, 불멸을 취함으로써 얻게 된 자부심이나 희열을 실감하지 못하기에 스스로 부러움이나 동경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자신과 마주하게 된다. 그러므로 인간은 괴물, 신인류 모두를 배척해야 할 공포와 제거의 대상으로만 여기게 된다.
또한, 괴물이 맞이한 욕망의 농도는 다채롭기 이를 데 없다. 욕망이 어떤 밀도를 취하느냐에 따라 형상과 능력까지도 달라지면서 원래 인간이었던 괴물이 맞이하는 욕망의 스펙트럼을 다양해지는 것이다. 정반대로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원래 괴물이었던 신인류는 욕망 자체가 거세되었기에 욕망의 끝이라 할 수 있는 불멸의 능력을 취했음에도 전혀 즐거워하거나 전혀 슬퍼하지 않는, 전혀 다른 패러다임을 가져오는 하나의 커다란 세계관을 구축하는 것이다.
《스위트홈》의 다층적이고 분화된 존재들의 뒤섞임은 표면적으로만 보면 인간, 괴물, 그리고 신인류의 서로 두려워하고, 동경하는 것들의 물고 물리는 복마전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 복마전의 근본엔 저마다 최선의 감정과 생존을 향한 간절함으로 뒤섞인, 다시 말해 생존의 절박함을 다룬 이야기 구조를 취하고 있다. 대미를 장식하는 결말 역시 의미심장하다. 인간, 그리고 신인류 사이의 공존의 길을 모색하는 방법이 제시되는데, 그 공존 역시 필연적으로 생존하고자 하는 욕망에서 비롯되었고, 그 욕망은 삶에서 결코 배제될 수 없는 인간 본연의 감정임을 볼 수 있다.
다소의 호불호가 갈려도 스위트홈을 통해 이른바 인간에서 괴물, 괴물에서 신인류까지 아우르는 크리처물의 새로운 지평을 일궈낸 바는 높이 평가될 것이다. 앞으로도 인간 본연의 감정과 욕망, 세계관의 확장이 정치하게 펼쳐지는 K-드라마의 약진을 기대해 본다.
2024. 10. 14.
출처 : 주간기독교(http://www.cnews.or.kr/news/articleView.html?idxno=3097)
이응복, 박소현 연출 《스위트홈》
넷플릭스 시리즈 《스위트홈》의 시즌3가 최근 공개되면서 이른바 한국 크리처물의 정점이라 평가받는 한 작품이 대미를 장식했다. 일단 보이는 성과는 화려하다. 시즌3까지 글로벌 OTT를 통해 제작, 공개되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박수를 보내기에 그렇다. 하지만, 제작하고 선보였다는 것만으로 작품의 평가를 마무리해선 곤란하다. 경쟁력을 비교하는 게 적절해 보일지 모르지만, 이미 할리우드로 대표되는 미국 드라마는 오래전부터 시즌제 사전제작을 제작, 마케팅 측면에서 안정화한 반면 한국 시즌제 드라마는 빠른 경쟁력 장착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헐거운 면을 다수 보여준다는 점이 깊은 아쉬움으로 남기 때문이다.
시즌2에서부터 그 징후가 나타났듯이 《스위트홈》 시즌3에 관한 반응 역시 호불호에 관한 평가가 극단적으로 나뉘는 편이다. 무엇보다 시즌2에서부터 충분한 인물 간의 서사와 개연성 있는 전개를 염두에 두지 못한 채 서둘러 세계관 확장을 시도하다 보니 그 확장된 세계관이 오히려 산만하고 어느 캐릭터 하나 제대로 회수하지 못했다는 평가가 아쉬운 부분, 곧 불호에 관한 대부분의 평가로 볼 수 있다. 시즌3 역시 이를 어느 정도 회수하고 이야기 밀도를 높이는데 할애할 것으로 기대했지만, 시즌2가 시도했던 밀도를 고려하지 않은 확장을 시도한 부분이 반복된 것으로 평가되어 아쉬움은 더 짙게 남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스위트홈》을 평가절하하는 건 부당하다는 평가도 적지 않다. 무엇보다 한국에서 제작되는 크리처물이 가진 참신성은 분명한 성과를 거뒀다고 보는 호평이 그것이다. 시즌2에서부터 세계관 확장이 다소 무리하게 전개된 건 사실이지만, 지금까지 글로벌 드라마와 영화에 등장한 크리처물에서조차 한 번도 본 적 없는 변종 크리처의 출몰과 그 출몰의 지속적인 변주가 가져온 볼거리의 파격은 한국 크러치물의 특별함으로 소개하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할 수 있다.
아울러 이야기 측면에서 스위트홈은 인간의 욕망에 관한 다소 공격적이지만 깊은 성찰을 유도하는 걸 볼 수 있다. 시즌3의 확장한 세계관에선 괴물로 전락한 이들이 완벽한 죽음과 부활의 재생 과정을 통해 신인류로 변모한다는 개념이 추가되었다. 신인류는 죽지 않는 불멸의 존재처럼 나타났기에 중간 단계에 서 있는 특수 감염인들의 두려움과 불안, 더 나아가 배제하고 싶은 기괴한 존재로 등장했다. 분명한 건 그 기괴함조차 죽지 않는다는 불멸의 가치관이 덧씌워지면서 동경의 신비로 발전했다는 것이다. 시즌2에서 괴물 혹은 괴물이 되어가는 괴물화 증상을 보이는 이들은 무조건 격리, 배제, 척결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죽지 않는 존재, 곧 신인류가 되기 위해 필연적으로 괴물의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는 사실로 인해 괴물 자체가 욕망의 동력이 되어버렸다. 이로써 괴물화 증상은 더는 숨기고 은폐할 게 아니라 스스로 과시하듯 드러내어 신인류로 나아가기 위한 욕망인 것을 긍정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직 괴물이 되지 않은 인간들은 전혀 다른 욕망에 사로잡히는데, 그것은 여전히 괴물로 변할 수 없는, 인간답게 살고자 하는 생존 욕구다. 왜 이 또한 욕망일 수밖에 없는가 하면, 인간은 괴물을 혐오하고 괴물로 변하는 순간 자신이 아무 쓸모 없는, 비인간의 자리로 무너져내렸다는 자괴감에 빠지기 때문이다.
여기에 덧붙여지는 신인류 자체의 모순도 존재한다. 괴물에서 신인류로 진화한 이은혁(이도현 역) 같은 인물은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 감정이나 인간적 양심을 느끼지 못한다는 건 결국, 자신이 죽지 않는다는 것, 불멸을 취함으로써 얻게 된 자부심이나 희열을 실감하지 못하기에 스스로 부러움이나 동경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자신과 마주하게 된다. 그러므로 인간은 괴물, 신인류 모두를 배척해야 할 공포와 제거의 대상으로만 여기게 된다.
또한, 괴물이 맞이한 욕망의 농도는 다채롭기 이를 데 없다. 욕망이 어떤 밀도를 취하느냐에 따라 형상과 능력까지도 달라지면서 원래 인간이었던 괴물이 맞이하는 욕망의 스펙트럼을 다양해지는 것이다. 정반대로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원래 괴물이었던 신인류는 욕망 자체가 거세되었기에 욕망의 끝이라 할 수 있는 불멸의 능력을 취했음에도 전혀 즐거워하거나 전혀 슬퍼하지 않는, 전혀 다른 패러다임을 가져오는 하나의 커다란 세계관을 구축하는 것이다.
《스위트홈》의 다층적이고 분화된 존재들의 뒤섞임은 표면적으로만 보면 인간, 괴물, 그리고 신인류의 서로 두려워하고, 동경하는 것들의 물고 물리는 복마전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 복마전의 근본엔 저마다 최선의 감정과 생존을 향한 간절함으로 뒤섞인, 다시 말해 생존의 절박함을 다룬 이야기 구조를 취하고 있다. 대미를 장식하는 결말 역시 의미심장하다. 인간, 그리고 신인류 사이의 공존의 길을 모색하는 방법이 제시되는데, 그 공존 역시 필연적으로 생존하고자 하는 욕망에서 비롯되었고, 그 욕망은 삶에서 결코 배제될 수 없는 인간 본연의 감정임을 볼 수 있다.
다소의 호불호가 갈려도 스위트홈을 통해 이른바 인간에서 괴물, 괴물에서 신인류까지 아우르는 크리처물의 새로운 지평을 일궈낸 바는 높이 평가될 것이다. 앞으로도 인간 본연의 감정과 욕망, 세계관의 확장이 정치하게 펼쳐지는 K-드라마의 약진을 기대해 본다.
2024. 10. 14.
출처 : 주간기독교(http://www.cnews.or.kr/news/articleView.html?idxno=30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