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이강선 교수(성균관대학교 초빙교수, 기독인문학연구원 연구위원)
젊은 시인에게 주는 충고
도서관에 갔더니 무료 북마크가 검색대 옆에 놓여 있었습니다. 소중하게 그 북마크를 들고 왔습니다. 누군가에게 나누어 줄 요량으로 여러 개를 들고 왔습니다. "해야겠다는 필요성을 느낀 계기만큼 좋은 계기가 어디 있나?"라고 씌여 있었습니다. 해야겠다는 필요성, 그때는 절박한 때입니다. 그때는 마음에서 에너지가 솟구치는 때입니다. 왜 불현듯 그 욕구가 솟아오를까요? 의문을 품기 위해 내 안을 들여다보았습니다. 답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의문을 품는다고 해서 그 일이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해야겠다는 건 계기를 만들어야 한다는 의미니까요. 내 안의 어떤 생각이 작동해서 그 욕구를 만드는 것인지, 그런 아마도 저 깊숙한 무의식에서 올라오는 것일 겁니다.
생각해보면 먹는 일, 자는 일, 우리 삶 모두가 이 욕구와 관련이 있습니다. 언제 먹고 싶어질까요? 언제 자고 싶어질까요? 필요하니까 우리 몸이 요구하는 것입니다. 배고프니까 졸리니까, 해야겠다는 건 내가 하고픈 일과 연관이 있습니다. 불교식으로 말하면 육감이라고 할까요? 여섯 번째, 식이 내 삶의 목적과 연관되어서 지금 이걸 해야 할 때가 되었음을 알려준다는 것이지요. 누군가를 만나고 싶을 때도 그러할 겁니다. 물론 이 말은 조급하게 무언가를 해결하려 들려는 말이 아닙니다. 어느 단계에 따라서 생겨나는 일들을 차근히 가라는 것이지요 어느 단계란 내가 가는 길, 내 삶 전체와 연결되어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세상에는 만 시간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한 사람이 어느 분야에서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는 최소한 만 시간, 십년이 필요하다는 이야기였지요. 그 만 시간은 추구하는 시간이지만 꿈을 꾸는 시간이 아닙니다. 그것은 실제 그 일에 뛰어들어 실천하는 시간이지요. 가끔 궁금한 것은 그 일에 뛰어들고자 했을 때 배우는 시간까지 포함되는가였습니다. 그러나 우물이었습니다. 무언가를 하려고 하면 당연히 배워야지요. 그 배움은 끝이 없습니다. 기술을 배운다 하더라도 그 기술이 태어난 원인과 필요를 배우다 보면 마침내는 경지에 다다르게 되는데 그 과정에 배우는 것이 오죽 많은 가요.
철학자 최진석은 네팔의 버스 운전사와 미국의 버스 운전사를 비교하더군요. 네팔의 버스 운전사는 도구 네 개를 가지고 버스를 고치지만 미국의 버스 운전사는 매 시간마다 그에 맞는 도구가 없으면 버스를 고치지 못한다구요. 보기에 네팔의 버스 운전사가 대단히 유능해 보입니다. 그러나 미국 운전사가 익숙하듯 각종 고장에 대비하는 그 고장의 원인과 거기에 알맞은 도구를 알아야 합니다. 끝없는 배움이 있는 것이지요. 최진석은 이 실례를 문명을 이야기하고자 거론했습니다만 저는 이 실례가 어떤 분야에서 일어나는 끝없는 해결 과정에 대한 은유라고 여겨졌습니다. 동일한 도구를 가지고 누군가는 그윽한 소리를 내고 누군가는 쇳소리를 냅니다. 싱일 블이라는 아주 단순한 도구는 그저 방망이로 치면 됩니다. 그러나 누군가가 내는 소리는 영혼을 울리고 누군가 내는 소리는 소음에 지나지 않습니다. 삶에 대한 앎이 깊어지고 자신이 추구하는 일에 대한 공부가 깊어지면서 단순한 소리는 삶을 담게 되고 무의식을 열게 되고 그 이상의 것, 우주의 화음을 담게 되는 것이지요.
세상일이 그러합니다. 하고픈 일에 뛰어들어 하나를 이루면 다른 하나가 열립니다. 박사를 했더니 그것이 겨우 문턱이더라 다음에 할 공부가 끝이 없더라 하는 것은 배움을 실천하면 그 다음이 계속해서 보인다는 의미이지요. 저의 이 말이 와닿았던 것은 이리저리 헤매었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찾기 위해 이 세계, 저 세계를 기웃겨렸지요. 끊임없이.
릴케가 저 유명한 젊은 시인에게 주는 충고라는 시에서 한 말은 실천하는 과정에서 답을 찾았다는 의미입니다. 릴케가 언급한 문제는 바로 풀리지 않는 의문이거나 끊임없이 추구해야 하는 목적이고 나입니다. 문제에 대한 해답을 조급히 구하려 들지 말라는 것이지요;. 해답은 삶의 목적이지만 우리의 삶은 그 해답으로 과정에 놓여 있습니다. 살아보는 것이지요. 릴케가 말하는 문제들이란 내가 가고자 하는 길에 놓여 있는 문제들을 실천해 보라는 의미입니다. 사실 문제란 질문이고 추구이기도 합니다. 꿈을 가졌다면 그 세게에 뛰어들었다면 어떤 문제가 있든 간에 그 꿈을 추구해 볼 일입니다. 여러 단계를 거치면서 일어나는 문제들을 해결해 볼 일입니다. 그 꿈은 삶 전체를 관통하게 되고 결국에는 나 자신일 테니까요.
2024. 07. 10
출처: 이강선 교수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itinkle/223507875583)
저자: 이강선 교수(성균관대학교 초빙교수, 기독인문학연구원 연구위원)
젊은 시인에게 주는 충고
도서관에 갔더니 무료 북마크가 검색대 옆에 놓여 있었습니다. 소중하게 그 북마크를 들고 왔습니다. 누군가에게 나누어 줄 요량으로 여러 개를 들고 왔습니다. "해야겠다는 필요성을 느낀 계기만큼 좋은 계기가 어디 있나?"라고 씌여 있었습니다. 해야겠다는 필요성, 그때는 절박한 때입니다. 그때는 마음에서 에너지가 솟구치는 때입니다. 왜 불현듯 그 욕구가 솟아오를까요? 의문을 품기 위해 내 안을 들여다보았습니다. 답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의문을 품는다고 해서 그 일이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해야겠다는 건 계기를 만들어야 한다는 의미니까요. 내 안의 어떤 생각이 작동해서 그 욕구를 만드는 것인지, 그런 아마도 저 깊숙한 무의식에서 올라오는 것일 겁니다.
생각해보면 먹는 일, 자는 일, 우리 삶 모두가 이 욕구와 관련이 있습니다. 언제 먹고 싶어질까요? 언제 자고 싶어질까요? 필요하니까 우리 몸이 요구하는 것입니다. 배고프니까 졸리니까, 해야겠다는 건 내가 하고픈 일과 연관이 있습니다. 불교식으로 말하면 육감이라고 할까요? 여섯 번째, 식이 내 삶의 목적과 연관되어서 지금 이걸 해야 할 때가 되었음을 알려준다는 것이지요. 누군가를 만나고 싶을 때도 그러할 겁니다. 물론 이 말은 조급하게 무언가를 해결하려 들려는 말이 아닙니다. 어느 단계에 따라서 생겨나는 일들을 차근히 가라는 것이지요 어느 단계란 내가 가는 길, 내 삶 전체와 연결되어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세상에는 만 시간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한 사람이 어느 분야에서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는 최소한 만 시간, 십년이 필요하다는 이야기였지요. 그 만 시간은 추구하는 시간이지만 꿈을 꾸는 시간이 아닙니다. 그것은 실제 그 일에 뛰어들어 실천하는 시간이지요. 가끔 궁금한 것은 그 일에 뛰어들고자 했을 때 배우는 시간까지 포함되는가였습니다. 그러나 우물이었습니다. 무언가를 하려고 하면 당연히 배워야지요. 그 배움은 끝이 없습니다. 기술을 배운다 하더라도 그 기술이 태어난 원인과 필요를 배우다 보면 마침내는 경지에 다다르게 되는데 그 과정에 배우는 것이 오죽 많은 가요.
철학자 최진석은 네팔의 버스 운전사와 미국의 버스 운전사를 비교하더군요. 네팔의 버스 운전사는 도구 네 개를 가지고 버스를 고치지만 미국의 버스 운전사는 매 시간마다 그에 맞는 도구가 없으면 버스를 고치지 못한다구요. 보기에 네팔의 버스 운전사가 대단히 유능해 보입니다. 그러나 미국 운전사가 익숙하듯 각종 고장에 대비하는 그 고장의 원인과 거기에 알맞은 도구를 알아야 합니다. 끝없는 배움이 있는 것이지요. 최진석은 이 실례를 문명을 이야기하고자 거론했습니다만 저는 이 실례가 어떤 분야에서 일어나는 끝없는 해결 과정에 대한 은유라고 여겨졌습니다. 동일한 도구를 가지고 누군가는 그윽한 소리를 내고 누군가는 쇳소리를 냅니다. 싱일 블이라는 아주 단순한 도구는 그저 방망이로 치면 됩니다. 그러나 누군가가 내는 소리는 영혼을 울리고 누군가 내는 소리는 소음에 지나지 않습니다. 삶에 대한 앎이 깊어지고 자신이 추구하는 일에 대한 공부가 깊어지면서 단순한 소리는 삶을 담게 되고 무의식을 열게 되고 그 이상의 것, 우주의 화음을 담게 되는 것이지요.
세상일이 그러합니다. 하고픈 일에 뛰어들어 하나를 이루면 다른 하나가 열립니다. 박사를 했더니 그것이 겨우 문턱이더라 다음에 할 공부가 끝이 없더라 하는 것은 배움을 실천하면 그 다음이 계속해서 보인다는 의미이지요. 저의 이 말이 와닿았던 것은 이리저리 헤매었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찾기 위해 이 세계, 저 세계를 기웃겨렸지요. 끊임없이.
릴케가 저 유명한 젊은 시인에게 주는 충고라는 시에서 한 말은 실천하는 과정에서 답을 찾았다는 의미입니다. 릴케가 언급한 문제는 바로 풀리지 않는 의문이거나 끊임없이 추구해야 하는 목적이고 나입니다. 문제에 대한 해답을 조급히 구하려 들지 말라는 것이지요;. 해답은 삶의 목적이지만 우리의 삶은 그 해답으로 과정에 놓여 있습니다. 살아보는 것이지요. 릴케가 말하는 문제들이란 내가 가고자 하는 길에 놓여 있는 문제들을 실천해 보라는 의미입니다. 사실 문제란 질문이고 추구이기도 합니다. 꿈을 가졌다면 그 세게에 뛰어들었다면 어떤 문제가 있든 간에 그 꿈을 추구해 볼 일입니다. 여러 단계를 거치면서 일어나는 문제들을 해결해 볼 일입니다. 그 꿈은 삶 전체를 관통하게 되고 결국에는 나 자신일 테니까요.
2024. 07. 10
출처: 이강선 교수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itinkle/2235078755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