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윤성덕/통치 행위와 그 대상/국제신문


[인문학 칼럼] 통치 행위와 그 대상

 

고대 서아시아의 통치자, 힘에 취해 왕위 보전 연연

정치 체제 발전 했다지만 독선적 권력의 폐해 여전

윤성덕 연세대 기독교문화연구소 연구교수


인류 사회를 다스렸던 고대의 통치자들은 법률의 통제를 받지 않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을 것 같지만, 어떤 형태로든 국가를 세우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 사회의 구성원들이 인정하는 가치와 현실 인식에 맞는 통치 행위를 보여주어야 했다. 그럼 고대 정치인들은 언제나 정의롭게 백성을 다스리고 그들을 돌보기 위해 매진했을까? 아니면 자기 멋대로 행동하며 정치적 선전으로 그것을 포장하려 했을까?

예를 들어 고대 서아시아 역사를 장식한 아슈르 제국 이야기를 살펴보자. 이 제국은 기원전 9세기에 왕위에 오른 아슈르나찌르아플리 2세부터 시작했다고 말할 수 있는데, 그는 몇십 년 동안 기근과 정치적 혼란으로 쇠퇴기를 겪던 시기에 등극했지만 자기 선조들이 다스리던 영토를 되찾기 위해 팽창주의 정책을 시행했다. 그러나 군대를 이끌고 변방을 누비던 아슈르왕은 지나치게 잔인한 폭력 행위를 일삼으며 피지배자들의 원성을 샀다. 아슈르 군대가 저지른 행동을 가장 섬뜩하게 묘사한 글은 아슈르나찌르아플리가 자기 왕궁 북쪽에 닌우르타 신전을 짓고 그 벽을 장식하기 위해 붙였던 석판들 위에 기록으로 남아있다.

이 문서에서 왕은 닌우르타 신을 부르면서 시작하지만 곧 자신의 호칭들을 열거하며 스스로 자랑하는 말들을 쏟아 놓는다. 그 다음에 본인이 왕위에 있으면서 나섰던 군사 원정들을 차례로 설명하는데, 티그리스강 상류에 있는 어떤 도시를 점령하던 일에 관해 이렇게 말한다. “내가 많은 군사들을 산 채로 붙잡았다. 그들 중 어떤 자들은 내가 팔과 손을 잘랐고 어떤 자들은 코나 귀, 그리고 사지를 잘랐다. 나는 여러 부대에 속한 군인들의 눈을 파냈다. 내가 그들의 머리를 도시 주변에 있는 나무에 내다 걸었다. 그들의 장성한 아들들과 딸들을 불에 태웠다. 나는 파괴했고 무너뜨렸으며 불에 태웠고 그 도시를 없애 버렸다.”

여기서 잠깐 멈추고 생각해 보자. 아슈르 수도 한 가운데 신전이 있고 이 글을 신전 벽에 기록했다면, 아슈르왕의 적들에게 겁을 주어 두려움에 떨게 만들려는 목적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슈르 제국에 저항하던 주변 지역 지배자들 중에 그 누구도 이 신전 안까지 무사히 들어와서 한가하게 글을 읽을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표면적으로 이 글은 닌우르타 신에게 바쳐서 신화의 시대에 그 신이 처음 시작한 임무를 아슈르 왕들이 본받아 이어가고 있음을 보여 드리고 신을 기쁘게 해 드리겠다는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 글의 실제 독자는 당시 아슈르의 정치 기관이나 종교 기관의 지도급 인사들이었을 것이다. 이런 왕궁 관리들에게 매우 노골적이고 폭력적인 장면을 보여줌으로써 아슈르나찌르아플리는 자신이 이끄는 국가가 어떤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지, 그리고 그 행렬에 동참하지 않을 경우 어떤 결과를 맞게 될지 아주 효과적으로 보여줄 수 있었을 것이다.

고대 서아시아의 통치자들이 일반인보다 더 큰 힘과 재화를 사용할 수 있는 이유는 더 넓게 보고 더 많은 사람들이 덕을 볼 수 있는 일을 하라고 신이 임명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큰 힘과 능력을 가진 자가 초심을 잃고 자신의 이기적인 목적을 이루기 위해 골몰하거나 자기 힘과 능력에 취해 그 직위를 지키는 일에만 연연하는 경우를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위에서 본 기록에서 아슈르나찌르아플리는 국내 여론을 정리하기 위해 국외 활동을 이용하고 있다. 이런 경우 그 사회 구성원인 백성들은 통치 행위의 결과를 누리기보다는 통치 대상으로 전락하게 되고, 반란을 일으킬 생각이 아니라면 통치자의 결정과 행위를 수동적으로 추인하는 역할에 만족해야 했다.

물론 인류 문명은 고대를 벗어나 좀 더 공평하고 공정한 정치 행위를 기대할 수 있는 정부 형태와 정치 체제를 발전시켜 왔다.

그러나 권력을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의 관계는 크게 달라지지 않는 것 같다. 법으로 규정하고 온갖 제도로 검증한다 하더라도 결국 힘을 가진 자는 그렇지 못한 자가 보지 못하는 곳에 존재하고 듣지 못하는 대화를 나누며 상상하지 못하는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존재를 확인할 수 없던 정치인들이 국회 인사청문회 때 잠깐 수면에 드러나는 것 같지만 어느 순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사라지고 일상생활은 평온을 되찾는다. 그렇다면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있는 국민은 정치의 수혜자일까? 아니면 어딘가에서 이득을 보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열심히 땀을 흘려야 하는 통치의 대상일까? 


아슈르인들도 사실 지나친 폭력의 폐해를 걱정하고 있었고, 폭력과 전쟁을 강력하게 비판하는 주제로 ‘에라 서사시(the Erra Epic)’라는 문학작품을 쓰기도 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세상을 바꾸지 못했고 고고학자들이 발굴할 때까지 땅속 깊이 묻혀 있었다.

2024. 08. 07.


윤성덕 연세대 기독교문화연구소 연구교수 


출처: 국제신문 (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1700&key=20240808.220190001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