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윤성덕/가상이 현실을 대체한다면 /국제신문/2021.09.15

요즘 주요 기사 제목들을 살펴보면 우리나라는 이미 대선 경쟁에 접어들었고, 후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코로나19 대유행 때문에 빼앗긴 일상을 회복하겠다고 나서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돌아갈 일상이 아직 남아있을까? 예를 들면 이런 일이 있었다. 연초에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어떤 미술작품 하나가 6930만 달러에 팔렸다는 소식이 언론에 보도되었는데(국제신문 2021년 3월 17일 자, 뭐라노 : ‘신윤복이 통탄할 노릇’), 디지털 아티스트 ‘비플’이 만든 ‘나날들: 첫 5000일’이라는 작품이었다. 그림이나 조각이 아니라 컴퓨터로 생산한 이미지 파일 ‘jpeg’ 형식이었고,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디지털 파일, 즉 원본이 없이 얼마든지 축소와 확대가 가능하고 무한대로 복사가 가능한 작품이 이런 높은 가격에 거래되었다는 것이다.

미술작품은 언제나 원작자가 창작한 진품인지가 중요한 거래 조건이 되는데, 비플의 작품은 처음부터 실체가 없으니 이런 조건을 적용할 수가 없으며, 다만 블록체인을 통해 거래 내역을 저장하는 ‘대체 불가능한 표식(non fungible tokens)’ 기술을 통해 세상에 하나뿐인 작품임을 증명한다고 한다. 비트코인 거래에도 사용하는 블록체인 기술을 활용해 암호화된 디지털 미술작품은 언제 어디서 만들었고 언제 거래되었으며 현재 소유주가 누구인지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디지털 파일 상태로 생산한 미술작품이 지난 20년간 약 10만 점 거래된 바 있고, 거래 가격의 총합은 2220억 원에 달한다고 한다.

이 기사는 우리가 알던 상식의 세계, 그러니까 진짜와 가짜 사이에 분명한 경계가 존재하던 일상이 사라졌다고 말해준다. 위에서 언급한 미술작품 ‘나날들’은 지구상 어디에도 물리적인 실체가 없고, 암호화 처리를 한 원본이 그렇지 않은 복사본과 예술적으로 아무런 차이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고가에 매매가 되었다는 사실은 이미 새로운 일상이 시작되었고, 물리적인 실체를 기준으로 진짜와 가짜를 가르는 세상을 대체했음을 뜻한다.

사실 이런 변화들이 닥쳐올 것이라고 예견한 학자들은 ‘가상현실’이라는 주제로 논의를 진행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마이클 하임과 같은 철학자는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에 본질적인 의미는 줄어들고 기능적인 정보에 집착하는 현상이 일어나며, 인식 주체나 인식의 대상이 되는 실체가 상실되고 기호 논리만 남게 된다고 설명한다(가상현실의 철학적 의미). 개인은 검색엔진과 역동적인 하이퍼텍스트를 타고 자유롭게 인터넷 세상을 유영하고, 원본과 사본이라는 개념이 사라진 글을 읽고 쓴다. 원래 인간이 체계적으로 읽으며 정리하던 지식은 인공지능을 탑재한 컴퓨터가 훨씬 빠르고 정확하게 대신 정리하고, 통계적인 수치에 따라 표준적이고 전형적인 방향으로 결정하여 대중에게 공급한다. 쟝 보드리야르도 실재와 동떨어진 기호와 이미지의 세계를 언급하면서, 원본이 없고 이미지가 현실을 대체하는 이미지 과잉시대가 올 것이라고 내다 보았다(시뮬라시옹). 미래 세계에서 이미지의 기호가치가 통용되기 때문에 실재보다 더 실재적인 초실재의 세계가 펼쳐진다고도 하였다.

이런 변화는 사회 전반에 걸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데, 가상현실 기술이 발달할수록 개인은 외부세계와 차단되는 몰입(immersion) 상태에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현실 세계와 가상세계 사이에 걸쳐 있는 자신의 동일성을 유지하기 어렵게 되고, 결국 실재 생활에서 매우 수동적인 삶을 살게될 위험이 크다. 공상과학영화를 보면 자기 삶을 돌보지 않고 침대처럼 생긴 의자에 누워 대부분의 시간을 시각과 청각과 촉각까지 지배하는 가상세계에서 보내는 주인공들이 나오는데, 그런 생활이 이제 곧 실현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사회적으로는 컴퓨터가 생산하는 주인 없는 지식이 통계적인 가치에 따라 일률적으로 유통되며, 창의적이고 주체적인 의미를 가진 생활이 증발할 수도 있다. 누구나 다 좋아하는 맛집에 찾아가서 가장 맛있다는 음식을 먹고, 누구나 다 인정하는 브랜드의 최신 유행 옷을 사 입으며, 누구나 다 감탄하는 넓은 거실과 편리한 부엌과 편안한 침실이 있는 집을 구매해야 한다. 내가 사는 이유가 무엇인지 고민하고, 자기 인생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 어떤 집에 살고 어떤 옷을 입으며 어떤 음식을 먹을지 결정하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벌써 1년이 넘도록 코로나19가 계속되면서 대한민국 사회 전체가 강제로 비대면 사회가 되어가고 있다. 이 사태는 발달하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는 과학기술을 강제로 일상에 적용하는 역할을 할 가능성이 있다. 우리가 개인마다 자기 정체성을 잃지 않고 가상현실을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을 미리 준비하고, 또 우리 사회가 방향타 없이 익명의 가상세계 속으로 휩쓸려 들어가지 않도록 대책을 마련해야 할 때다.

한국기독교문화연구소 전문연구원

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1700&key=20210916.22019004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