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이강선/"내 삶의 절정은 언제일까"/마음건강 길


<단풍 드는 날> 도종환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아는 순간부터
나무는 가장 아름답게 불탄다

제 삶의 이유였던 것
제 몸의 전부였던 것
아낌없이 버리기로 결심하면서
나무는 생의 절정에 선다

방하착(放下着)
제가 키워온,

그러나 이제는 무거워진
제 몸 하나씩 내려놓으면서
가장 황홀한 빛깔로
우리도 물이 드는 날


새벽에 화곡로로 나가보았습니다. 바람이 살짝 선선해졌습니다. 여전히 덥지만 습기가 덜한 것이 느껴졌던 거지요. 그 차이는 아주 미묘합니다. 빛이 메타세콰이어 나뭇잎에 내려앉은 모습이 달라졌고 눈 닿는 곳은 신선해졌습니다.

느낌이 빛의 각도에 영향을 미친 것이었을까요. 일부 누런 나뭇잎들이 눈에 띄었습니다. 그전에도 없었을 리 없건만 유독 눈에 뜨인 거지요.

늘 푸르청청할 것만 같은 메타세콰이어도 때가 되면 색깔이 달라집니다. 우리는 일쑤 그 사실을 잊지요. 그전부터 가능성이 이미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에 보이는 것은 일상을 살아가도록 합니다. 지금 내가 어디 와 있는지 알도록 하고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알아차리도록 합니다. 일상은 싹트고 자라고 익어가는 것과 동일합니다.

그러나 일상은 너무도 바삐 지나가 우리가 무언가 할 때 그 일의 싹틈과 자람과 익어감이 내재해있음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변화는 생겨난 이상 당연한 것이지요. 생명 없는 것들에게도 동일합니다. 생겨나고 변하고 소멸하는 일. 의식이 없는 것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할 뿐이지요.


우리의 삶이 한 권의 책이라면 우리는 자신의 이야기를 읽어낼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살아 있는 한 우리는 이야기를 만들어냅니다. 나의 이야기를 끊임없이 만들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나의 책은 내 삶이 끝나기 전까지는 끝나지 않습니다. 절정이 언제인지 모르는 것이지요.

매 순간 절정이라고 생각하면서 산다면 그 삶이 절정으로 채워질 텐데요. 절정을 끌어오는 방법 중 하나가 방하착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방하착放下着’, ‘방’은 내놓다 ‘하’는 아래, ‘착’은 붙을 착입니다. 불교 용어인 이 단어는 집착을 내려놓는다는 의미입니다.

집착을 내려 놓아라

여러 가지 이유로 우리는 일에 혹은 사람에 집착합니다. 좋아하므로, 생계를 이어야 하므로, 그렇게 해서 삶을 살아왔고 그것이 내 생이라고 말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내게 이득을 주었던 그것들을 내려놓기 어렵습니다. 내려놓지 않아도 좋은 것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것은 생명이고 소명이고 내 삶의 이유일 겁니다.

반면 내려놓지 않으면 다음을 이어갈 수 없는 것이 분명 있습니다.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없도록 하는 것. 변화를 막는 것입니다.

때가 되면 내려놓아야 합니다. 나무는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일이 제 안에 있음을 알고 있는 거지요. 우리도 때가 되면 그것을 압니다. 단지 집착으로 눈이 가리어져 깨닫지 못하는 것이지요.

지금 여기서, 내가 내려놓아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가장 아름다워질 수 있다고 여겨지는 때는 오늘입니다. 오늘이 지나면 어제는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매 순간을 절정으로 만들어가는 거지요.

새로 피어난 잎사귀로 절창을 만들 수 있고 한창인 나뭇잎으로도 죽은 나뭇잎으로도 절창을 만들 수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이 생의 한 부분이듯이.

아래 사진은 촛불과 측백나무 잎사귀, 벚나무 잎사귀, 둥굴레 잎사귀, 맥문동으로 만든 만다라입니다. 그 시간이 끝나면 버려질 것들이지요
 

2024. 08. 23


출처: 마음건강 길(https://www.mindgil.com/news/articleView.html?idxno=82826&fbcli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