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박일준/하나님의 가족은 혈연 공동체가 아니다/주간기독교/2021.11.24

오늘 우리가 말하는 여성의 권리란 무엇인가. 기존에 남성들의 헛된 욕망을 그저 성만 바꾸어 여성의 욕망으로 치환하는 것은 아닌가? 여성에게 의무로 부과된 일들, 그것은 우리 가부장적 경쟁문화에서 ‘전체에 속하지 않은 일’ 즉 ‘not-all’의 범주에 들어가는 일 아닌가. 그래서 아무리 수고를 해도 전혀 인정을 받을 수 없는 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회와 가정이 유지되려면 반드시 수행되어야만 하는 일, 어째서 그런 일들은 의무로 부여되고, 권리는 인정되지 않는 것인가라는 항변이 들린다. 이 항변이 정당하다. 하지만 이 정당성은 여/남의 이분법을 전제로 해서만 정당성을 획득한다. 그랬을 때, 남자들은 권리만 누리고 의무는 하지 않는 존재가 된다. 이 이분법을 전제로 남성에 대한 이 비판은 정당하다.

하지만 내가 지금 묻고 있는 것은 이 여/남의 이분법이 가부장적 경쟁주의 문화를 이겨낼 수 있는 대안의 토대가 되는가이다. 그리고 남자들도 이 사회의 루저로서 불쌍하고 측은하니 봐주라는 호소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우선 남성들이 쫓는 알파메일을 향한 욕망의 헛된 쳇바퀴 경쟁 속에서 스스로를 남성으로 규정하는 이들이 쏟는 노고가 헛된 것임을 자각하자는 것이다. 그리고 이 경쟁의 구조 속에서 전혀 ‘전체에 속하지 않는 일’을 누가 감당하고 있는지를 다시 돌아보자. 이 구조 속에서 ‘남성’과 ‘여성’은 생물학적 질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이 구조가 우리 마음 속에 심어놓은 심리적 구조이다. 이 심리적 구조의 문제가 생물학적 남자의 자리에 생물학적 여성대표를 몇몇 임명한다고 해결될 문제인가? 오히려 우리는 우리의 존재를 여/남의 이분법으로 보기를 넘어서야 할 것이다. 우리는 한 가족이 아닌가. 가족에 위기가 닥치면, 우리 모두는 함께 침몰하든지 함께 헤쳐 나가든지 한다. 나는 살아남고, 가족이 침몰한다면, 나의 생존은 결코 구원이 아닐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운명 공동체로서 가족이다.

하나님의 가족은 결코 혈연으로 맺어진 공동체가 아니다. 아담과 하와의 공동체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맺어진 공동체이지 결코 혈연으로 맺어진 공동체가 아니다. 오히려 혈연으로 맺어진 공동체로서 하와와 아담의 가족은 철저히 실패했음을 기억하자. 형이 동생을 죽인 가족이다. 잔인하지 않은가. 혈연 공동체는 그렇게 실패했음을 성서는 정면으로 서술한다. 바울 공동체는 혈연으로 구성된 하나님의 가족이 아니라, 귀족과 노예, 남자와 여자, 어른과 아이 등 도저히 하나로 모일 수 없는 이들이 모여 하나님의 가족이 된 것이다. 그것은 기독교 공동체의 이상이었는지도 모른다. 예배 안에서 하나님의 한 가족이 되었던 그들이 예배 직후 식사를 나누는 자리에서 다시 귀족과 노예로 돌아가는 일을 질책하며 바울은 하나님의 가족이 지녀야 할 사랑에 대해서 그렇게 길게 고린도전서에 적고 있지 않은가. 하나님의 가족은 그 안에서 각 개인의 권리를 보장해주는 공동체가 아니라, 각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사람으로서 삶의 역량, 즉 인간 역량들(human capabilities)을 발휘하도록 서로 돕는 공동체였다.

노예에게 재산권과 투표권을 부여해주고, 자본주의적 무한경쟁 속에서 생존경쟁에 참여하라고 하나님의 가족은 명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가족은 비인간으로 취급받는 노예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사람으로서의 온전함을 동등하게 인정해 주었고, 예배 가운데에서 우리의 동등한 일원으로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소중한 가족이었다. 적어도 예배 가운데서 그는 배우지 못했어도, 귀족이 아니어도, 재산이 없어도 동등한 형제요 자매였다. 인간으로서 우리와 함께 예배할 역량을 지닌 존재로서 말이다. 하나님은 귀족의 찬양을 노예의 찬양보다 더 높이 받으시지 않으신다. 그들 모두는 하나님의 형상을 부여받은 똑같이 소중하고 아름다운 영혼이기 때문이다. 그 가족 안에서 가부장은 존재하지 않는다. 만일 로마 시민권을 가진 귀족이 가장의 역할을 한다면, 그 가장의 역할은 노예와 여성이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사람으로서 인간적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지, 경쟁을 이겨낸 승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가족 안에서 가부장의 권위를 찾았던 것일까? 가족은 경쟁의 구조가 아님에도 말이다. 경쟁의 시스템과 위계의 질서 속에서 소위 ‘남자’들은 가부장의 신화가 마치 하나님의 형상을 구현한 신화라고 착각하며 살아왔다. 이 경쟁에서 승리하면 마침내 내가 승자가 되리라는 환상으로 말이다. 그런데 이 경쟁은 끝나지 않는다. 무한경쟁의 또 다른 의미이다. 그 무한경쟁 사회라는 장에서 경쟁에 실패한 상처를 결국은 우리는 혹은 나는 가족 안에서 마치 ‘가부장’인 척하며 보상받으려 했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우리의 가족은 이렇게 무너져 내려 버렸던 것은 아닌가?

오늘 우리 시대의 문제는 이 ‘가족 공동체’를 모든 존재들로 연장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팬데믹은 우리가 기후변화와 생태계 위기라는 지구적 문제들에 안일하게 대처했을 때 어떤 결과를 안게 될런지를 보여주는 예시일 뿐이다. 이 위기는 결코 우리가 맞이할 마지막 기후재난이 아니다. 이 위기는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혹은 진정한 가장으로서 우리 가족 공동체 안에 말 못하는 생물들과 존재들을 존재역량이라는 관점으로 지켜주지 못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 지를 보여주는 예시이다. 그들은 인간의 언어를 말하지 못하지만, 그렇다고 그 존재들이 우리에게 의사표시를 못하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기후변화를 통해서 체험하게 된다. 이 지구라는 시스템은 물질도 생물도 아니지만, 분명히 우리 인간 삶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기후가 우리 인간문명의 행위들에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기후변화’는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이 지구 위에 존재하는 생물들이 자신들의 존재의 역량들을 발휘하고 살아가도록 양육하지 않고, 오히려 인간의 편익을 위한 도구와 자원으로서 이용만 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팬데믹은 여과없이 보여주고 있다.

인간은 이 지구 위의 존재들과 따로 떨어진 존재가 아니며, 오히려 그들과 얽혀 그들과 더불어 삶을 함께 만들어 나아가는 존재들이다. 그래서 존재는 ‘일자’ 혹은 ‘개인’이 아니며, 존재는 언제나 다자(the multiple)이고 그래서 가족이다. 우리는 비인간 존재들과 ‘친족’임을 팬데믹은 알려준다. 박쥐의 생태계가 교란당할 때, 천산갑의 생태계가 착취당할 때, 인간의 삶도 위협을 받는다는 사실을 보고 있지 않은가. 라캉의 성차 그래프에서 ‘여성’이라는 기표는 우리에게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거세당하지 않은 자는 없다고. 그것이 우리의 진실이다. 미국 해병대에는 이런 구호가 있다고 한다: 그 어떤 전우도 버려두지 않는다(no man left behind). 기후변화와 생태계 위기는 우리의 전우가 비단 동료 인간들일 뿐 아니라 다른 생물들과 유기물과 무기물까지 포함한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우리 모두는 그렇게 복잡하고 다양하고 서로 다른 가족 구성원들로 구성된 가족이다. 이 녹색 지구라는 집에서 말이다.

우리들이 살아가는 시대의 ‘현상들’을 단순하게 보기 보다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히드라처럼, 여러 다양한 모습들을 동시적으로 담지한 중층적이고 복잡한 실재의 다양한 현상적 출현으로 주목해 보아야 한다고 로버트 제라시(Robert Geraci)는 주장한바 있다. 예를 들어, 혼종성, 상호간 연결, 상호적 통약불가능성 등의 문제 등이 종교적 현상이나 과학적 현상 혹은 기술적 현상 등에서 출현하는데, 우리가 전통적으로 종교적 분야와 과학적 분야 그리고 기술적 분야를 분과마다 분리해서 독립적으로 다루던 사유의 습벽으로 인해 현대의 ‘현상’은 더욱 더 이해하기 어려워지고 있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제라시는 “히드라-논리 접근법”(hydra-logical approach)을 제안하는데, 이는 예를 들어 우리 시대 종교 담론들 속에서 과학의 모습이나 기술의 모습을, 혹은 과학 담론 속에서 종교의 모습을 혹은 기술의 모습에서 종교의 모습을 주목해 보는 것이다. 특별히 제라시는 기후변화에 대응하는 우리 시대 담론의 모습과 인공지능 및 로봇의 대응하는 대중적 접근방법 속에서 종교-과학-기술의 세 머리가 달린 히드라의 모습을 볼 수 있다고 제안한다. 사실 ‘종교’란 ‘용어’ 자체가 유럽제국들의 식민지적 기획의 일환으로 식민지 국민들을 정치적으로 보다 효율적으로 통제하기 위한 방식을 찾는 과정에서 발명된 용어이고, 그래서 ‘비교종교학’적 방식을 도입해 그들의 문화를 이해하여 식민지적 통치를 공고히 하려는 제국주의적 기획의 일환이었다. 따라서 종교와 정치경제를 분리해 이해하는 것은 때로 매우 위험하고 순진한 발상이다.

이러한 근대 식민주의의 문화지형 속에서 ‘과학’이란 용어는 또한 비합리적 믿음의 체계로서 종교에 대비되는 상대방을 지칭하는 용어로서 고안되었고, 과학을 종교와 대비되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기획임을 강조하기 위해 만들어진 용어이다. 그래서 중세적 학문의 질서 속에서 태동한 ‘자연철학’이라는 용어 대신 ‘과학’이란 용어가 고안되었고, 이 과학이란 용어를 통해 중세를 무지몽매한 미신의 시대로 그래서 식민지의 종교문화를 미개하고 원시적인 문화로 가리킬 수 있는 개념적 구조가 만들어질 수 있었다. 즉 ‘과학’이란 용어 자체의 발명도 근대 유럽의 식민주의의 소산이라는 말이다.

출처 : 주간기독교(http://www.cnews.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