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박일준/타자에게 마음과 시간 내어주기/주간기독교/2021.12.14

 ‘기술’이란 용어의 의미도 유럽의 식민지배가 확장되고 가속화되던 시절과 무관하지 않다. 왜냐하면 식민지 문화를 원시종교와 미신의 문화로 규정하고, 그들 문화 속에 배어있는 생활과학들을 미신에 기반한 미개한 기술로 치부하면서, 서양의 과학과 기술을 통해 식민지를 계몽한다는 기획 속에 발전되어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근대 유럽제국의 자의식은 종교와 과학과 기술의 혼종을 통해 창출된 것인데, 특별히 “기술의 힘”, “종교적 배타주의와 우월성에 대한 선교적 정당화”가 결합하여 우리가 보고 있는 현대 학문의 종교, 과학, 기술의 분야가 규정되었다는 것은 곧 현재의 종교와 과학과 기술의 분할이 동일한 뿌리로부터 유래한다는 것을 예감케한다.

오늘날 우리가 ‘트랜스휴머니즘’이나 ‘인공지능’(AI)을 규정하는 방식도 시대의 정황과 매우 맞물려 있다. 지적 설계론이 “종교와 과학을 하나의 일관된 세계관으로 화해시키거나 통합하려는 노력”이 되듯이, 예를 들어 “묵시적 AI”(apocalyptic AI)라는 관점에서 종교와 과학과 기술을 각자 나름대로 통합적으로 인식하려는 노력들이 우리 시대에 넘쳐나고 있다. 물론 각자의 통합적인 노력들은 다른 관점들과 잘 화해되지 않는다. 그저 자신이 기반하고 있는 믿음이나 이론들을 확장하여, 다른 관점들을 제국주의적으로 통합하려는 시도들이 난무할 뿐이다. 이런 맥락에서 근대 유럽제국주의의 확장과 매우 유사하고, 바로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여전히 근대를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이 꿈꾸는 인간의 구원이란 비전이 우리가 알고 있는 통념적인 종교의 구원과 전혀 닮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논리적 구성은 매우 종교적이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종교적 담론과 전혀 화해할 수 없는 측면들을 담지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 시대 담론적 혹은 세계관적 히드라들의 출현은 그저 “경계선상의 피조물”(liminal creature)로서, 범주화되지 않는 것을 범주화하도록 돕는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고 평한다. 이런 과정에서 특별히 묵시적 관점들, 즉 종말의 파국에 대한 상상력이 과학과 기술의 활동들과 융합하여, 인간의 정신을 업로딩하면서 신과 같은 기계들이 되는 꿈을 꾸거나 불멸의 삶을 꿈꾸는 시대적 흐름들을 양산해 내고 있기도 하다. 이런 맥락에서 종교는 어디에나 있다. 또한 세속화 시대에 종교는 그 어디에서도 소멸되고 있기도 하다. 그 종교-과학-기술 히드라는 때로는 트랜스휴먼의 모습으로 때로는 지적설계의 모습으로 때로는 식민주의의 모습으로 시대마다 상황마다 모습을 바꾸며 출현한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해방의 담론이나 구원의 담론을 무조건 ‘해방’이나 ‘구원’이라는 말의 문자적 의미를 통해 이해하기를 멈추고, 그것이 종교-과학-기술 히드라의 산물임을 기억해야 한다.

해방의 담론이란 언제나 ‘우리’가 어느 것에 의해 혹은 어딘가에 구속되어 있고, 억압받고 있다는 것을 전제해야 한다. 그래야 그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이 말이 되는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무엇으로부터 억압받는지조차 불확실할 때, 우리는 이 불확실성으로부터의 해방을 위해 ‘억압’을 만들고 발명해내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식민지의 국민들이 미개한 종교적 관습으로 억압받고 있는다는 가정은 유럽제국주의자들이 식민지를 계몽해야 한다는 명분이었고, 선교를 위한 정당성의 부여였다. 하지만 그들은 정말 억압받고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그들의 억압은 유럽제국주의자들의 식민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한 구실이었을까?

우리 시대 해방이나 구원의 담론이 너무 넘쳐난다. 신천지도 구원을 말하고, 통일교도 구원을 말하고, 기독교 사이비 단체들도 구원을 말한다. 우파도 해방을 말하고, 좌파도 해방을 말한다. 이들의 해방과 구원은 늘 이들이 이 난국의 사탄의 세력들이 누구인지를 규정하느냐에 달려있다. 캐서린 켈러가 지적하듯이, 우리 시대의 구원과 해방 담론의 이면에는 언제나 칼 슈미트적인 적과 아군의 이분법이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오늘 우리의 페미니즘 담론이 여자와 남자의 이분법을 당연한 것으로 전제하고 해방과 구원을 말할 때, 이것 역시 슈미트적 이분법의 정치를 결코 넘어서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제라시의 히드라-논리적 접근법은 말한다: 그 적의 모습 속에 우리가 담겨있고, 우리 속에 적의 모습이 이미 담겨있다고. 우리가 정말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것은 적과 아군의 구별이 아니라, 왜 하나님 나라는 늑대와 어린 양이 함께 뛰노는, 생물학적으로 절대 불가능한 이미지로 말하여 지는지에 대해서이다. 결국 여성해방이 말하는 것은 인류의 해방이지, 여성들만의 해방이 아니다. 그리고 이 여성들의 해방은 남자들을 뒤에 남겨두지 않는다. 가부장제의 극복은 여성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가부장제라는 허울과 망상 속에 더 속 깊이 골병 들어가는 영혼은 남자들의 영혼이다.

그런데 성서는 그리고 기독교는 그 불가능한 꿈을 믿는다. 역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믿는다. 초대 교회 교부 터툴리아누스는 “나는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다”고 외쳤다. 많이들 아전인수격으로 인용하는 유명한 말이지만, 이 터툴리아누스의 말은 비논리적인 외침이 전혀 아니다. 이 말은 오히려 아리스토텔레스의 삼단논법의 전형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터툴리아누스가 말하는 ‘불합리한 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가리킨다.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것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믿을 수 없는 불합리한 것이다. 이는 우리 모두가 익히 알고 있다.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그렇게 우리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알고 있음’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누군가 죽은 자가 부활했다는 것을 너무도 확고하게 주장하고 외친다면, 이는 그 불합리한 것을 사실이라 외치는 이의 말이 참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도 다른 모든 사람이 자신이 불합리한 것을 외친다고 여길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주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왜 그는 다른 사람들의 조롱이나 놀림 혹은 반대를 뻔히 알고도 그것을 주장하는 것일까? 그는 바로 그 부활의 사건을 직접 경험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체험이 다른 사람들의 상식을 뛰어넘어 버린 것이다. 만일 그가 직접 경험하지 않은 채, 남들이 ‘죽은 자가 부활했다 카더라’는 식이었다면 그는 그렇게 확고하게 주장할 수 없지 않겠는가. 늑대와 어린 양이 뛰노는 그 나라, 하나님 나라는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나라이다. 하지만 우리는 예배 가운데 그 나라의 현존을 언뜻 경험하지 않는가? 수없이 많은 우리들의 가식적인 사랑들 사이에서 언뜻 우리는 진정한 사랑의 흔적과 향기를 분명하게 경험하지 않는가? 만일 이 경험이 없다면, 하나님 나라를 우리는 주장할 수 없을 것이다.

수없이 많은 시간 나는 자격 없는 아빠였고, 자격 없는 남편이었고, 자격 없는 아들이었다. 내 소중한 아이들 앞에 떳떳한 아빠였던 시간보다 자격 없는 아빠로 살았던 시간들이 훨씬 더 비교할 수 없을만큼 많았던 것 같다. 그 많은 시간 동안 또한 나는 자격 없는 남편이었고, 무책임한 남편이었다. 이 경쟁에서 낙오하지 않기 위해 분투한다는 명분으로 말이다. 결국 경쟁에서 이기지도 못했고, 소중한 이들에게 떳떳하지도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어린이날 둘째와 막내 아이 손을 붙들고 놀이공원으로 향한다. 이런 날 거기가면 죽도록 줄만 서다 놀이기구 몇 개 타고 진이 빠져 시간만 허비하는 느낌이 들거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 날은 그렇게 시간을 아이들을 위해 허비해 주고 싶었다. 그렇다고 한 번 그렇게 놀아주었다고, 내 떳떳하지 못한 그 많은 시간들이 정당화되는 것도 아니다. 여전히 난 부족한 아빠일 뿐이다. 그러나 그 시간 낭비 속에, 그 긴 줄서기 속에서 문득 감사하다. 이렇게 시간을 허비할 수 있도록 해준 것이 감사하다. 내 앞의 줄 서 있는 아빠가 아들에게 이야기한다: ‘여기서 이렇게 시간소비하면서 줄서서 시간 보내느니 차라리 다른데 가서 재밌게 놀자 응?’ ‘더 효율적인 시간이란 존재하지 않아요. 아이와 이렇게 시간을 소비하는 것 자체가 가장 소중한 순간입니다’라고 오지랖을 부리며 조언하지는 않았지만, 속으로 그 아빠에게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래도 그 아빠는 나보다 훨씬 훌륭한 아빠라는 것을 안다. 아이 둘이 자라나는 동안 나는 한번도 이런 시간을 아이와 보내주지 못했으니 말이다. 우리 모두 그렇지 않을까? 아마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들 대부분이 나보다 훨씬 더 훌륭한 아빠이고 엄마일 것이다. 아마도 내가 훌륭한 아빠가 되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그 날 그 시간에 나는 그 불가능한 일의 실현이 가능하다는 것을 언뜻 보았다. 우리가 한 가족이기 위해서는 내 삶의 시간 속에 그 아이들을 위한 시간을 내어주어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배우자를 위한 시간도 내어주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이런 일상의 평범한 시간 속에 평범하게 언뜻 실현된다. 그것이 내 경험이다. 그것은 내 권리와 주체를 내려놓는 일을 요구한다. 가부장적 시공간 속에서 타자인 그들, 그들의 얼굴을 향해 내 마음과 시간을 내어주어야 하는 일이다. 하나님 나라는 바로 ‘지금 여기’에 있다.

출처 : 주간기독교(http://www.cnews.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