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프랑스어 번역 성경, 올리베탕 성경은 신학에 어떠한 공헌을 했는가? "
이강선 교수(기독인문학연구원 연구위원, 성균관대 번역대학원)
1. 올리베탕의 시대와 문제의식
16세기 유럽은 중세 교회의 권위가 무너지기 시작하고, 인간 중심의 사 고가 확산되던 시기였다. 인문주의와 인쇄술의 발달은 성경을 더 많은 이 들이 읽고 해석할 수 있도록 도왔고, 이로 인해 로마 가톨릭교회의 독점적 해석 권위가 도전받기 시작했다. 프랑스 역시 이러한 격변의 시대 속에 있 었고, 성경을 모국어로 번역하려는 시도는 점점 늘어났다. 하지만 당시 프 랑스어 성경 번역은 여전히 라틴어로 된 불가타 성경에 기초하거나 교회 의 승인을 받아야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피에르-로베르 올리베탕(프랑스어: Pierre-Robert Olivétan)은 ‘성경은 모든 신자가 직접 읽고 이해해야 하는 책’이라는 개 신교의 중심 사상을 따랐다. 그는 히브리어 구약 성경과 그리스어 신약 성 경을 원문으로 삼아 프랑스어로 번역함으로써, 성경의 본래 의미를 전달 하고자 했다. 이는 단순한 언어의 전환이 아니라, 당대 종교 권위 구조에 대한 도전이자 신학적 선언이었다.
그는 자신의 이름 Pierre-Robert Olivétan에서 ‘Olivétan’이라는 성을 필 명으로 사용했는데, 이는 그가 이탈리아계 프랑스인으로서 프랑스 내의 박해를 피하고 신학적 정체성을 구분하기 위해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성 씨는 본래 ‘Olivier’였을 가능성도 제기되나, 역사적 문헌에서는 ‘Olivétan’이 성경 번 역자로서의 공적 명칭으로 굳어졌다.
2. 성경 번역의 동기와 박해
올리베탕은 루터와 틴데일 등 종교개혁자들의 성경 번역 사역에 깊은 영 향을 받았으며, 특히 루터가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해 일반 대중이 읽을 수 있도록 했다는 점에 감동을 받았다. 그는 프랑스 내에서 종교개혁 사상을 받아들이고 전파하려 했지만, 당시 프랑스에서는 개혁 사상이 이단으로 간주되어 박해를 받았다.
1534년 프랑스에서 일어난 ‘벽보 사건(Affaire des Placards)’은 그의 삶과 번역 작업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이 사건은 루터파 신자들이 로 마 가톨릭 미사에 반대하는 전단을 파리와 지방 도시에 대량으로 부착한 사건으로, 당시 국왕인 프랑수아 1세는 이 사건을 계기로 원래 가졌던 개 신교에 대한 관용적 태도를 거두고, 강경한 탄압 정책으로 돌아섰다. 이 사건 이후 개신교 신자들은 대규모로 체포되거나 화형당했으며, 종교개혁 지지자들은 프랑스를 떠나야 했다.
결국 올리베탕은 비교적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 스위스의 뇌샤텔(Neuchâtel) 로 피신해 성경 번역 작업을 진행하게 된다. 뇌샤텔은 개혁주의 신학을 수 용한 도시로, 올리베탕은 이곳에서 기욤 파렐(Guillaume Farel) ⑨의 지 지를 받으며 1535년에 최초의 프랑스어 개신교 성경 번역본을 출간했다. 이 성경은 곧 프랑스 개신교 공동체의 표준 성경으로 자리 잡게 된다.
올리베탕의 번역은 대중을 위한 것이었다.
대중을 위한다는 구절은 성경이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라는 의미로, 모든 성경 번역이 이 구절에 근거한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초 기 라틴어 성경 번역인 불가타(Vulgata) 성경 도 동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불가타’는 라틴어로 ‘보편적인’, ‘일반 대중의’라는 뜻을 지니며, 히에로니무스(Eusebius Sophronius Hieronymus)가 라틴어를 모국어로 쓰는 대중을 위해 성경을 번역했던 맥락과 연결된다. 하 지만 불가타는 점차 교회에 의해 ‘공식 번역’ 으로 간주되면서 오히려 교회의 해석 권위를 공고히 하는 도구로 작동했다. 설교, 예식, 고 백, 성례전 모두 성직자의 통제 아래 있었고, 말씀의 해석도 성직자의 권한이었다. 즉, 불가 타 성경은 단순한 언어 번역본이 아니라, 교회 권위를 세우기 위한 해석의 집합체였다. 이는 성경을 교회의 권위 아래 두려는 의도로 이루 어진 번역이었으며, 루터를 비롯한 후대의 개 혁자들이 성경을 원문에 근거해 재번역하려 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올리베탕 역시 루터(Martin Luther)와 틴데 일(William Tyndale)의 흐름을 잇는 인물로 서, 성경을 성직자의 전유물이 아닌 모든 이들
을 위한 책으로 만들려는 개혁적 사명감을 공유했다. 올리베탕은 스위스 뇌샤텔(Neuchâtel)에서 개혁신학을 따르는 왈도파 공동체와 긴밀히 협력하며, 그곳에서 교육 활동을 활발히 펼 쳤다. 특히 그는 지역 학교의 교장(또는 책임 자)으로서 신앙 공동체 내에서 교육과 지도자의 역할을 담당하며, 공동체의 신앙과 성경 보급에 실질적인 기여를 했다. 이러한 환경은 그 의 프랑스어 성경 번역 작업을 완성하고 배포 하는 데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프랑스의 위그노들은 올리베탕 성경을 통해 가정에서 예배를 드리고 공개된 예배를 금지당해도 숨어서 함께 말씀을 나누고 성경 말씀을 암송하며 죽음을 준비했다. 이들은 단지 성경을 읽는 개인들이 아니라, 성경을 고백하는 공동체 전체였던 것이다. 올리베탕은 그 공동체의 언어, 신앙, 고백의 틀을 만들어준 사람이었다.
3. 언어적 선택과 신학적 전략
올리베탕 성경은 다른 영어 성경과 독 어 성경처럼 보통의 프랑스 사람을 위한 것이기는 했지만 그가 번역하면서 선택 한 단어는 신학적 독특함을 드러낸다. 즉, 그는 기존 가톨릭 전통에서 사용하던 용 어들을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성경 본문 이 지닌 원의에 더 충실한 용어를 선택 했던 것이다. 예를 들어, ‘Bishop(주교)’ 이라는 단어 대신 ‘Overseer(감독)’를, ‘Church(교회)’ 대신 ‘Congregation(회중)’을 택함으로써, 교회 권위 구조에 도전하는 신학적 의미를 담았다.
특히 ‘회중(Congrégation)’이라는 단어는 종교개혁 신학의 핵심인 ‘모든 신자의 만인제사장론’을 전제로 한 용어였다. 이 용어는 교회를 성직자의 전유물이 아니라, 신자 개개인의 참여와 고백 위에 세워지는 공동체로 보 는 관점을 잘 드러낸다. 로마 카톨릭에도 공동체라는 개념이 있었지만 가 톨릭이 지닌 ‘공동체 전체의 신앙고백’이라는 개념은 교리문답이나 미사 참여 같은 일방적인 참여 형태였으므로 올리베탕의 회중이라는 개념과는 다르다. 따라서 올리베탕의 용어는 이후 개신교 예배 전통에서 회중의 적 극적 참여가 강조되는 흐름으로 이어지게 된다.
또한 올리베탕은 성경을 번역하면서 히브리어 구약에 반복적으로 등장 하는 하나님의 이름, 즉 테트라그라마톤(YHWH)에 주목했다. 그는 이 신 성한 이름을 때로는 ‘여호와(Jehovah)’보다 자주 ‘영원자(L'Éternel)’로 번 역했다. ‘여호와’라는 음역은 당시 통용되던 신학적 표현이었지만, 올리 베탕은 이보다 더 본질적이고 신학적 의미가 담긴 표현인 ‘영원자’를 주로 택했다. 이는 하나님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존재로 인식한 개신교 신학 의 관점을 반영한다. 이 선택은 이후 프랑스어 성경의 전통에도 영향을 끼 쳐, 현대 프랑스어 개신교 성경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L'Éternel’로 번역하 는 관습이 자리 잡게 되었다.
4. 올리베탕과 칼뱅
올리베탕은 장 칼뱅(Jean Calvin)의 외사촌으로, 두 사람은 젊은 시절부 터 학문적으로 긴밀한 교류를 나누었다. 올리베탕은 칼뱅에게 종교개혁 사상을 소개한 인물 중 하나로, 칼뱅이 개신교로 개종하는 데 지대한 영향
을 끼쳤다. 칼뱅은 후일 자신의 대표작 『기독교 강요』에서 성경의 권위를
강조하며, 올리베탕의 번역 성경을 중요한 자료로 인용한다.
특히 올리베탕의 성경이 담고 있는 공동체 중심의 신학, 즉 말씀을 기반으로 한 회중 중심의 교회 이해는 칼뱅의 제네바 교회 모델과도 밀접한 연 관이 있다. 올리베탕의 번역은 이후 칼뱅이 발전시킨 개혁신학의 기반 중 하나로 작용했으며, 두 사람의 관계는 단순한 혈연을 넘어 신학적 토대를 함께 고민한 협력 관계였다.
성경 번역을 마친 후에도 올리 베탕은 스위스 뇌샤텔에 있던 왈 도파 공동체에서 교육자로서 활 발히 활동하며, 학교 교장으로서 신앙 공동체 내에서 교육과 신앙 지도에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다. 그러나 프랑스 내에서의 박해와 망명 생활은 그의 삶에 큰 부담이 되었고, 건강 역시 악화되었다. 그는 1538년경 사망했다. 겨우 30세의 젊은 나이였다.
사망 원인에 대해서는 명확한 기록이 없으나, 학자들은 그가 과도한 번역 작업과 스트레스, 그리고 불안정한 망명 생활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올리베탕의 이른 죽음은 아쉬움을 남겼지만, 그가 남 긴 프랑스어 성경 번역은 이후 후배 개혁자들, 특히 칼뱅에 의해 이어받아 개신교 전통의 기초가 되었다. 그의 작업은 단순한 번역 이상의 의미를 지니며, 말씀의 접근성을 통해 신앙의 민주화를 이끌어낸 선구적 시도였다.
5. 한국 교회와 올리베탕
한국 교회는 주로 독일과 스위스, 미국 등의 개신교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어 프랑스 개신교의 영향은 상대적으로 적다. 이에 따라 올리베탕이라 는 인물은 그다지 조명되지 않았으나, 최근 들어 성경 공동체 낭독, 회중 참여 예배, 교회 언어의 비폭력화가 관심받으면서 올리베탕의 언어 전략이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특히 한국 개신교가 직면한 교회 권위주의 문제, 설교자 중심의 예배 구 조 등은 올리베탕의 ‘회중 중심’ 성경 번역 원칙에서 새로운 돌파구를 찾 을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한다. 그의 번역은 단순한 언어적 작업이 아니라, 신앙과 공동체의 구조를 새롭게 재편성하려는 신학적 시도였다는 점에서 오늘날 교회 갱신 담론과도 연결될 수 있다.
결론: 모든 이를 위한 성경, 모든 이를 위한 신앙
피에르-로베르 올리베탕의 성경 번역은 단순한 언어의 전환이 아니었 다. 그것은 당시 종교 권위에 대한 도전이며, 신자 개인의 양심과 이해를 존중한 신학적 실천이었다. 그는 성경을 신학자나 성직자의 전유물이 아 니라, 모든 신자가 직접 읽고 묵상하며 살아내야 할 말씀으로 제시했다. 이러한 접근은 종교개혁의 핵심 정신이자, 이후 칼뱅과 같은 개혁자들이 세운 교회 공동체의 밑거름이 되었다.
올리베탕이 사용한 용어들, 특히 ‘회중’과 ‘영원자’ 같은 표현은 그 자체 로 교회 구조에 대한 신학적 성찰이며, 공동체 중심의 신앙생활에 대한 비 전을 담고 있다. 오늘날 한국 교회 역시 교회 권위주의, 언어의 폐쇄성, 일 방향적 신앙 전달이라는 문제에 직면해 있다. 이런 점에서 올리베탕의 작 업은 단지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지금 여기를 위한 신학적 자극이자 실천 적 제안으로 다시 읽혀야 한다.
그의 번역은 말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동시에 우리 모두의 책 이라고. 그리고 믿음은 ‘이해하는’ 행위이며, 교회는 그 이해를 함께 나누 는 공동체라고.
2025. 08. 01.
출처: 교회설장연구소(portal.icg21.com/board/board.php?bbs_id=humanities&ptype=view&kbbs_doc_num=113)
"첫 프랑스어 번역 성경, 올리베탕 성경은 신학에 어떠한 공헌을 했는가? "
이강선 교수(기독인문학연구원 연구위원, 성균관대 번역대학원)
1. 올리베탕의 시대와 문제의식
16세기 유럽은 중세 교회의 권위가 무너지기 시작하고, 인간 중심의 사 고가 확산되던 시기였다. 인문주의와 인쇄술의 발달은 성경을 더 많은 이 들이 읽고 해석할 수 있도록 도왔고, 이로 인해 로마 가톨릭교회의 독점적 해석 권위가 도전받기 시작했다. 프랑스 역시 이러한 격변의 시대 속에 있 었고, 성경을 모국어로 번역하려는 시도는 점점 늘어났다. 하지만 당시 프 랑스어 성경 번역은 여전히 라틴어로 된 불가타 성경에 기초하거나 교회 의 승인을 받아야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피에르-로베르 올리베탕(프랑스어: Pierre-Robert Olivétan)은 ‘성경은 모든 신자가 직접 읽고 이해해야 하는 책’이라는 개 신교의 중심 사상을 따랐다. 그는 히브리어 구약 성경과 그리스어 신약 성 경을 원문으로 삼아 프랑스어로 번역함으로써, 성경의 본래 의미를 전달 하고자 했다. 이는 단순한 언어의 전환이 아니라, 당대 종교 권위 구조에 대한 도전이자 신학적 선언이었다.
그는 자신의 이름 Pierre-Robert Olivétan에서 ‘Olivétan’이라는 성을 필 명으로 사용했는데, 이는 그가 이탈리아계 프랑스인으로서 프랑스 내의 박해를 피하고 신학적 정체성을 구분하기 위해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성 씨는 본래 ‘Olivier’였을 가능성도 제기되나, 역사적 문헌에서는 ‘Olivétan’이 성경 번 역자로서의 공적 명칭으로 굳어졌다.
2. 성경 번역의 동기와 박해
올리베탕은 루터와 틴데일 등 종교개혁자들의 성경 번역 사역에 깊은 영 향을 받았으며, 특히 루터가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해 일반 대중이 읽을 수 있도록 했다는 점에 감동을 받았다. 그는 프랑스 내에서 종교개혁 사상을 받아들이고 전파하려 했지만, 당시 프랑스에서는 개혁 사상이 이단으로 간주되어 박해를 받았다.
1534년 프랑스에서 일어난 ‘벽보 사건(Affaire des Placards)’은 그의 삶과 번역 작업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이 사건은 루터파 신자들이 로 마 가톨릭 미사에 반대하는 전단을 파리와 지방 도시에 대량으로 부착한 사건으로, 당시 국왕인 프랑수아 1세는 이 사건을 계기로 원래 가졌던 개 신교에 대한 관용적 태도를 거두고, 강경한 탄압 정책으로 돌아섰다. 이 사건 이후 개신교 신자들은 대규모로 체포되거나 화형당했으며, 종교개혁 지지자들은 프랑스를 떠나야 했다.
결국 올리베탕은 비교적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 스위스의 뇌샤텔(Neuchâtel) 로 피신해 성경 번역 작업을 진행하게 된다. 뇌샤텔은 개혁주의 신학을 수 용한 도시로, 올리베탕은 이곳에서 기욤 파렐(Guillaume Farel) ⑨의 지 지를 받으며 1535년에 최초의 프랑스어 개신교 성경 번역본을 출간했다. 이 성경은 곧 프랑스 개신교 공동체의 표준 성경으로 자리 잡게 된다.
올리베탕의 번역은 대중을 위한 것이었다.
대중을 위한다는 구절은 성경이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라는 의미로, 모든 성경 번역이 이 구절에 근거한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초 기 라틴어 성경 번역인 불가타(Vulgata) 성경 도 동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불가타’는 라틴어로 ‘보편적인’, ‘일반 대중의’라는 뜻을 지니며, 히에로니무스(Eusebius Sophronius Hieronymus)가 라틴어를 모국어로 쓰는 대중을 위해 성경을 번역했던 맥락과 연결된다. 하 지만 불가타는 점차 교회에 의해 ‘공식 번역’ 으로 간주되면서 오히려 교회의 해석 권위를 공고히 하는 도구로 작동했다. 설교, 예식, 고 백, 성례전 모두 성직자의 통제 아래 있었고, 말씀의 해석도 성직자의 권한이었다. 즉, 불가 타 성경은 단순한 언어 번역본이 아니라, 교회 권위를 세우기 위한 해석의 집합체였다. 이는 성경을 교회의 권위 아래 두려는 의도로 이루 어진 번역이었으며, 루터를 비롯한 후대의 개 혁자들이 성경을 원문에 근거해 재번역하려 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올리베탕 역시 루터(Martin Luther)와 틴데 일(William Tyndale)의 흐름을 잇는 인물로 서, 성경을 성직자의 전유물이 아닌 모든 이들
을 위한 책으로 만들려는 개혁적 사명감을 공유했다. 올리베탕은 스위스 뇌샤텔(Neuchâtel)에서 개혁신학을 따르는 왈도파 공동체와 긴밀히 협력하며, 그곳에서 교육 활동을 활발히 펼 쳤다. 특히 그는 지역 학교의 교장(또는 책임 자)으로서 신앙 공동체 내에서 교육과 지도자의 역할을 담당하며, 공동체의 신앙과 성경 보급에 실질적인 기여를 했다. 이러한 환경은 그 의 프랑스어 성경 번역 작업을 완성하고 배포 하는 데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프랑스의 위그노들은 올리베탕 성경을 통해 가정에서 예배를 드리고 공개된 예배를 금지당해도 숨어서 함께 말씀을 나누고 성경 말씀을 암송하며 죽음을 준비했다. 이들은 단지 성경을 읽는 개인들이 아니라, 성경을 고백하는 공동체 전체였던 것이다. 올리베탕은 그 공동체의 언어, 신앙, 고백의 틀을 만들어준 사람이었다.
3. 언어적 선택과 신학적 전략
올리베탕 성경은 다른 영어 성경과 독 어 성경처럼 보통의 프랑스 사람을 위한 것이기는 했지만 그가 번역하면서 선택 한 단어는 신학적 독특함을 드러낸다. 즉, 그는 기존 가톨릭 전통에서 사용하던 용 어들을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성경 본문 이 지닌 원의에 더 충실한 용어를 선택 했던 것이다. 예를 들어, ‘Bishop(주교)’ 이라는 단어 대신 ‘Overseer(감독)’를, ‘Church(교회)’ 대신 ‘Congregation(회중)’을 택함으로써, 교회 권위 구조에 도전하는 신학적 의미를 담았다.
특히 ‘회중(Congrégation)’이라는 단어는 종교개혁 신학의 핵심인 ‘모든 신자의 만인제사장론’을 전제로 한 용어였다. 이 용어는 교회를 성직자의 전유물이 아니라, 신자 개개인의 참여와 고백 위에 세워지는 공동체로 보 는 관점을 잘 드러낸다. 로마 카톨릭에도 공동체라는 개념이 있었지만 가 톨릭이 지닌 ‘공동체 전체의 신앙고백’이라는 개념은 교리문답이나 미사 참여 같은 일방적인 참여 형태였으므로 올리베탕의 회중이라는 개념과는 다르다. 따라서 올리베탕의 용어는 이후 개신교 예배 전통에서 회중의 적 극적 참여가 강조되는 흐름으로 이어지게 된다.
또한 올리베탕은 성경을 번역하면서 히브리어 구약에 반복적으로 등장 하는 하나님의 이름, 즉 테트라그라마톤(YHWH)에 주목했다. 그는 이 신 성한 이름을 때로는 ‘여호와(Jehovah)’보다 자주 ‘영원자(L'Éternel)’로 번 역했다. ‘여호와’라는 음역은 당시 통용되던 신학적 표현이었지만, 올리 베탕은 이보다 더 본질적이고 신학적 의미가 담긴 표현인 ‘영원자’를 주로 택했다. 이는 하나님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존재로 인식한 개신교 신학 의 관점을 반영한다. 이 선택은 이후 프랑스어 성경의 전통에도 영향을 끼 쳐, 현대 프랑스어 개신교 성경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L'Éternel’로 번역하 는 관습이 자리 잡게 되었다.
4. 올리베탕과 칼뱅
올리베탕은 장 칼뱅(Jean Calvin)의 외사촌으로, 두 사람은 젊은 시절부 터 학문적으로 긴밀한 교류를 나누었다. 올리베탕은 칼뱅에게 종교개혁 사상을 소개한 인물 중 하나로, 칼뱅이 개신교로 개종하는 데 지대한 영향
을 끼쳤다. 칼뱅은 후일 자신의 대표작 『기독교 강요』에서 성경의 권위를
강조하며, 올리베탕의 번역 성경을 중요한 자료로 인용한다.
특히 올리베탕의 성경이 담고 있는 공동체 중심의 신학, 즉 말씀을 기반으로 한 회중 중심의 교회 이해는 칼뱅의 제네바 교회 모델과도 밀접한 연 관이 있다. 올리베탕의 번역은 이후 칼뱅이 발전시킨 개혁신학의 기반 중 하나로 작용했으며, 두 사람의 관계는 단순한 혈연을 넘어 신학적 토대를 함께 고민한 협력 관계였다.
성경 번역을 마친 후에도 올리 베탕은 스위스 뇌샤텔에 있던 왈 도파 공동체에서 교육자로서 활 발히 활동하며, 학교 교장으로서 신앙 공동체 내에서 교육과 신앙 지도에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다. 그러나 프랑스 내에서의 박해와 망명 생활은 그의 삶에 큰 부담이 되었고, 건강 역시 악화되었다. 그는 1538년경 사망했다. 겨우 30세의 젊은 나이였다.
사망 원인에 대해서는 명확한 기록이 없으나, 학자들은 그가 과도한 번역 작업과 스트레스, 그리고 불안정한 망명 생활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올리베탕의 이른 죽음은 아쉬움을 남겼지만, 그가 남 긴 프랑스어 성경 번역은 이후 후배 개혁자들, 특히 칼뱅에 의해 이어받아 개신교 전통의 기초가 되었다. 그의 작업은 단순한 번역 이상의 의미를 지니며, 말씀의 접근성을 통해 신앙의 민주화를 이끌어낸 선구적 시도였다.
5. 한국 교회와 올리베탕
한국 교회는 주로 독일과 스위스, 미국 등의 개신교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어 프랑스 개신교의 영향은 상대적으로 적다. 이에 따라 올리베탕이라 는 인물은 그다지 조명되지 않았으나, 최근 들어 성경 공동체 낭독, 회중 참여 예배, 교회 언어의 비폭력화가 관심받으면서 올리베탕의 언어 전략이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특히 한국 개신교가 직면한 교회 권위주의 문제, 설교자 중심의 예배 구 조 등은 올리베탕의 ‘회중 중심’ 성경 번역 원칙에서 새로운 돌파구를 찾 을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한다. 그의 번역은 단순한 언어적 작업이 아니라, 신앙과 공동체의 구조를 새롭게 재편성하려는 신학적 시도였다는 점에서 오늘날 교회 갱신 담론과도 연결될 수 있다.
결론: 모든 이를 위한 성경, 모든 이를 위한 신앙
피에르-로베르 올리베탕의 성경 번역은 단순한 언어의 전환이 아니었 다. 그것은 당시 종교 권위에 대한 도전이며, 신자 개인의 양심과 이해를 존중한 신학적 실천이었다. 그는 성경을 신학자나 성직자의 전유물이 아 니라, 모든 신자가 직접 읽고 묵상하며 살아내야 할 말씀으로 제시했다. 이러한 접근은 종교개혁의 핵심 정신이자, 이후 칼뱅과 같은 개혁자들이 세운 교회 공동체의 밑거름이 되었다.
올리베탕이 사용한 용어들, 특히 ‘회중’과 ‘영원자’ 같은 표현은 그 자체 로 교회 구조에 대한 신학적 성찰이며, 공동체 중심의 신앙생활에 대한 비 전을 담고 있다. 오늘날 한국 교회 역시 교회 권위주의, 언어의 폐쇄성, 일 방향적 신앙 전달이라는 문제에 직면해 있다. 이런 점에서 올리베탕의 작 업은 단지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지금 여기를 위한 신학적 자극이자 실천 적 제안으로 다시 읽혀야 한다.
그의 번역은 말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동시에 우리 모두의 책 이라고. 그리고 믿음은 ‘이해하는’ 행위이며, 교회는 그 이해를 함께 나누 는 공동체라고.
2025. 08. 01.
출처: 교회설장연구소(portal.icg21.com/board/board.php?bbs_id=humanities&ptype=view&kbbs_doc_num=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