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주원규/쓸쓸함에 대하여/주간기독교


쓸쓸함에 대하여

허진호, 박홍수 연출 《인간실격》


 2021년 9월 JTBC에서 방영된 주말드라마 《인간실격》은 먹먹함과 쓸쓸함을 이야기하는 드라마로 기억되고 있다. 먹먹함은 삶의 바닥을 경험한, 그래서 슬픔에 슬픔이 덧씌워진 두 남녀 주인공의 정서에서 자연스럽게 길어 올려지는 감정을 말하며, 쓸쓸함은 역설적으로 두 남녀가 신파적으로 슬픔을 전시하지 않고 어떻게든 살아내려고 발버둥 치는 단내나는 모습에서 그려지는 처연함을 보여주기에 그렇다.

《인간실격》의 두 주인공 부정(전도연)과 강재(류준열)는 각자 전혀 다른 인생의 길을 살다가 어쩔 수 없는 인생의 내리막길을 맞이하게 되는 현실을 담담히 이야기한다. 그 내리막길에서 문득 ‘아무것도 되지 못했다는 것’을 깨닫고, 그런데도 빛을 향해 최선을 다해 걸어가려는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16부라는 이제는 긴 호흡이 된 이 드라마에 시청자들이 마음을 열어 주기가 쉽지 않았다. 오늘의 시청자는 슬픔의 정서를 오롯이 담은 이야기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을 가지게 한다. 웃기지만 슬픈 이야기에는 쉽게 마음을 열지만 슬픈 감정만을 전면에 담은 이야기 자체에는 쉽게 마음을 열지 않는다. 무겁고 우울한 주제, 생각해야 할 소재 앞에서 선뜻 손이 가지 못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현실 자체가 암담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실을 현실 그대로 보는 것보다 장밋빛으로 윤색되고 가공된 이야기로만 보고 싶다. 단순한 재미와 위로, 안식을 구하는 것을 우선순위로 생각하기에 더욱 그렇다.


극 중 가사도우미 부정은 삶의 좋은 의미를 주는 작가, 인간 냄새나는 글을 쓰고 싶은 작가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은 출판사에 근무하면서 대필작가로 살아내야만 했다. 그러던 중, 부정은 유명 셀럽으로 행세하는 배우이자 작가인 아란(박지영)의 굴레에 빠져 인생 전체가 송두리째 거부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부정이 쓴 원고를 토씨 하나 빠지지 않고 자기 이름을 붙여 출간한 아란의 책, ‘인생 수첩’은 공교롭게도 베스트셀러가 되고, 그로 인해 아란의 삶은 외형적으로는 더 큰 날개를 얻게 되지만, 부정은 자신의 인생과 노력 자체가 짓밟히는 슬픔에 영혼이 붕괴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 슬픔은 안타깝지만 우리네 삶에서도 어렵지 않게 보이기도 한다. 대필작가로 삶의 정체성이 부정되는 경험은 오늘의 우리 삶에서 애써 일군 성과를 편법과 꼼수, 사회적 약탈 분위기로 인해 빼앗기게 되는 박탈감으로 재현되고 있다. 또한, 한 번 무너지면 좀처럼 재기나 부활을 허락하지 않는 비정한 현실을 묘파하고 있는 게 《인간실격》이 보여준 성실한 성찰이다.

부정 역할을 소화해 낸 칸 영화제 여우주연상에 빛나는 전도연 배우의 연기는 이러한 《인간실격》이 보여주고자 하는 짓밟힌 자, 억눌린 자의 슬픔을 절묘하게 살려낸다.

상대역인 강재는 쓸쓸하다. 한때 호스트로 일하다가 지금은 ‘역할대행서비스’를 하며 살아가는 그는 세상과 일정 부분 선을 긋고 살아간다. 이웃사촌이던 부정과 눈조차 마주하지 않으려는 것도 차라리 투명인간처럼 살아가기 위한 선택으로 비추기도 한다. 이런 강재에겐 아버지의 쓸쓸한 죽음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한 인간의 나약함과 쓸쓸함이 포개어져 있다.

호흡기에 의지해 더러운 반 평짜리 침대를 자신의 영원한 처소로 삼고, 온종일 누워만 지내던 강재의 아버지, 그의 유일한 낙은 아들 강재를 기다리는 일이었다. 안타깝게도 그가 아들을 위해 마지막 안간힘을 써서 한 일은 스스로 호흡기를 떼는 일이었다. 비좁은 침대 위에 앉아 엄마와 함께 찍은 사진 속에서 어린 강재의 모습이 그렇게 굳어있다.


 하지만, 그 굳어있음에도 강재는 자신이 느꼈을 깊은 쓸쓸함, 그 쓸쓸함의 순간과 마주하는 것을 그대로 보아넘기지 못하는 존재가 되었다. 아버지의 비좁고 쓸쓸한 침대, 이후, 역설적인 안식처가 되어버린 엄마의 반지하 셋방, 친했던 형의 아무도 찾지 않는 죽음, 강재는 그 쓸쓸함을 그대로 지나치지 못했다. 그런 그에게 어느 날 버스 정류장에서 눈물을 흘리는 부정을 본다. “아무것도 되지 못했다”라며 하나뿐인 아버지 앞에서 아파하는 부정을 강재는 지나치지 못하고, 결국, 버스 안에서 눈물 흘리는 부정에게 퉁명스럽게 손수건을 건네고 만다.

결국, 《인간실격》은 두 인물의 슬픔에서 비롯된 먹먹함, 이를 넘어서기 위해 발버둥 치는 애씀의 뒤란에 자리한 쓸쓸함을 말하는 드라마가 분명하다. 그 쓸쓸함이 오늘의 우리에게 역설적인 온기를 허락하고 있다. 누군가 너무나 쓸쓸하고 아파할지도 모른다며 말이다.

2023. 10. 04

출처 : 주간기독교(http://www.cnews.or.kr/news/articleView.html?idxno=25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