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의 숨결을 느끼게 해주는 교회
김신영 (기독교환경교육센터 부소장)
*본 글은 '필자와 <주간기독교>의 허락을 받아 공유함을 알려드립니다.'
*출처 : 주간기독교 (www.cnews.or.kr/news/articleView.html?idxno=2034)
우리는 공간의 영향을 받으며 살아간다. 사람들은 일정한 목적과 의도대로 공간을 통제하고 관리하며 사용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반대로 공간이 사람들의 행위, 생각, 감정에 영향을 주는 경우도 적지 않다. 어떤 공간이나 장소에 대한 기억은 후각을 통해 각인되기도 한다. 서점이나 호텔 로비에 들어설 때 느껴지는 각인된 향을 통해, 비로소 우리는 바로 ‘그 장소’에 와 있다는 것을 감각적으로 느끼기 시작한다. 오랜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현관문을 열고 내 집에 들어설 때 내 집의 냄새는 내가 비로소 ‘내 집’에 왔다는 것을 느끼게 해준다.
호텔이나 서점에서도 향을 사용하는 경우가 자주 있다. 서울 광화문에 위치한 유명한 대형 서점에 가면 그곳만의 냄새가 있다. 그 냄새는 서점에서 자체 개발해 그동안 매장에서만 사용해 온 ‘책향(The Scent of Page)’이다. 서점의 고객들과 방문객들은 서점이 주는 분위기와 목적 외에도 서점에 들어올 때부터 책향이 주는 느낌에 익숙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책향은 시트러스, 피톤치드, 허브, 천연 소나무 오일을 혼합하여 제조되었다. 그래서 서점에 들어서는 고객들은 마치 울창한 나무숲을 거니는 느낌을 얻었다. 오래된 중고서점이나 대학 도서관에 들어설 때 나는 오래된 책 냄새에 설렘을 느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 냄새가 없는 공간을 상상하면 어색하다.
종교적 공간도 마찬가지이다. 의례에 참여하는 사람의 마음가짐이나 신앙적 자세도 중요하지만, 공간이 주는 분위기와 물질적 요소들이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진 성당 안에 들어가면 높은 천정과 굵은 기둥들이 줄지어 있다. 그리고 이 하중을 견디기 위해 창문을 최소화하면서 자연스레 어두워진 실내는 엄숙하고 경건한 신앙적 자세를 요구한다. 이 안에서는 비그리스도인마저도 작은 소음조차 만들기 어려운 마음이 생긴다. 이 안에서만은 무릎을 꿇고 손을 모으고 기도해야 할 것 같은 마음이 들 수도 있다. 현대인들에게도 느껴지는 이 일시적인 느낌이 중세인들에게는 더욱 강렬했을 것이다.
아주 높고, 화려한 첨탑들이 무수히 솟아 있는 고딕 양식으로 건축된 유럽의 대성당들은 로마네스크 양식의 건축물과 비슷하면서도 조금은 다르다. 높고 웅장한 건축물 앞에서 느끼는 압도적인 분위기는 신의 높음과 인간의 낮음을 느끼게 만든다. 고딕 양식의 성당은 높고 뾰족한 천장을 지지하기 위해 여러 뼈대를 서로 교차해서 하중을 분산시켰다. 그래서 로마네스크의 굵은 기둥 대신 얇은 기둥이 상부의 하중을 버티도록 했다. 이로 인해 로마네스크 양식의 두꺼운 벽 대신 커다란 창문이 설치될 수 있었다. 그뿐 아니라 아름답게 채색된 스테인드글라스는 내부를 더욱 밝고 화려한 빛으로 채웠다. 교회는 하나님의 영광과 그리스도의 승리가 강하게 재현되는 거룩한 공간이 되었다. 그래서 유럽의 대도시들은 하나님의 영광과 승리를 표현하는 상징적 건축물을 하나씩 갖게 되었다.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과 쾰른의 대성당, 사르트르 대성당이 이를 대표한다.
시대를 훌쩍 뛰어넘어 현대의 초대형 교회들을 살펴보자. 높고 웅장한 외관과 더불어 넓은 로비, 지하철과의 연결성, 밝고 화려한 조명, 고급 수입 목재 및 석재로 제작된 의자 및 인테리어, 높고 튼튼한 강단, 음향전문가가 설계한 공간, 고화질 대형 스크린 등 최신 기술들이 동원되어 있다. 자본주의적 성공과 신앙적 성숙이 동일시되는 번영신학의 시각이 교회 건축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교회의 핵심적 기능인 선포, 봉사, 친교는 교회 건축과 함께 강화되었다. 예배당, 교육관, 친교공간, 문화공간, 지역주민을 위한 공간 등이 잘 마련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이들은 백화점이나 대형쇼핑 센터와 비슷한 수준의 편의성과 접근성을 갖추고 있기도 하다.
과거나 지금이나 웅장한 대형 건축물에는 막대한 건축비가 소요된다. 과거에는 고위 성직자들이나 왕가에서 건축비를 기부하기도 했고, 헌금과 면죄부 판매, 범법자들에게 걷은 벌금 등으로 건축 비용을 충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역사가들은 교회가 대성당을 짓느라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과 병원 및 학교 운영을 희생시켰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지금과 달리 구제, 교육, 의료 등 복지에 대한 국가의 책임과 역할이 부재하던 시절 교회의 역할은 매우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가 종교권력의 재생산을 우선시했을 때 교회의 시선과 시민의 시선은 점차 엇갈리기 시작했다.
현대의 초대형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유럽의 대성당들과는 다른 면에서 시대착오적이며 시민들의 시선과 다른 곳을 향하고 있다. 오늘날 사회는 기후변화가 촉발한 생태적 위기에 노출되어 있다. 전문가들의 암울한 전망에도 불구하고 정부들은 여전히 경제성장에 골몰하고 있으며 탄소배출 감소에 미온적이다. 예산이나 역량의 부족 때문이 아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일어나자 기후변화 적응에는 인색하던 나라들이 수천억에서 조 단위의 국방비를 증액하고 지출하기 시작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탄소 배출이 많은 국가와 글로벌 기업들이 자기의 이익 추구를 우선시하고 공적 가치를 선택적인 것으로 여길 때, 종교는 이와 다른 방향을 제시할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이 된다. 현대인들이 교회를 볼 때, 이곳이 기후변화로부터 우리를 구원해 줄 방주라는 걸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오래된 책의 진한 종이 냄새가 비로소 내가 도서관 서고에 와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것처럼, 사람들이 교회를 볼 때 이곳이 기후변화 시대에 구원의 방주라는 느낌을 줄 수 있어야 한다. 최신식 상업적 건물이나 관공서 건물보다 뛰어난 외관 및 편의성을 제공하는 것을 넘어, 교회에 들어서는 순간 이 교회가 지구를 생각하는 곳이라는 걸 온몸으로 느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건축은 공공재이다. 건축은 지역의 기능과 흐름에 영향을 미치며 그곳에 거주하거나 지나가는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어떤 건물들의 위치나 배치로 인해 여러 효과가 나타난다. 어떤 건축물은 빛공해를 일으켜 사람 간 분쟁도 일으키고, 철새들을 혼란에 빠지게도 한다. 교회가 크고 작은 민원이나 환경 소송에 휘말리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조망권, 일조권, 소음, 교통 체증, 이중 주차 및 무단 주차, 부동산 가격 하락이 대형교회가 지역사회와 경험하는 법적 갈등이다.
이러한 갈등은 교인이 아닌 지역주민들과의 소통 과정이 결여되어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 지역주민의 의사조차 반영되지 않은 교회 건축에 생태적 차원이 포함될 여지는 더 적다. 문제는 이렇게 건축된 교회는 지역 사회 안에서 배척받거나 심할 경우 ‘혐오시설’이 되어 버릴 뿐 아니라, 교인들과 지역주민들에게 마저 사랑과 화해 및 구원의 공간이 아닌 갈등의 공간으로 각인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이런 경우를 상상해보자. 교회 도착 수백 미터 전부터 교회로 진입하려는 차들로 인해 차가 막히고 주차 공간을 찾기가 어렵다. 지하주차장에 어렵게 차를 세우고 예배당과 연결된 엘리베이터를 타려고 하는데 자리가 쉽게 나지 않아 여러 대를 올려보낸다. 때로는 비상구 계단을 이용하기도 한다. 그렇게 도착한 예배당에 앉아 밝은 조명과 모니터를 보며 예배에 참석한다. 예배를 마치고 이 모든 과정을 반대로 거치며 교회를 빠져나온다. 나오는 길은 더 복잡하다. 이런 공간에서는 그 어떤 거룩함과 신성함을 경험하기 힘들 것이다. 이러한 교회는 기후변화 시대의 정의로운 목소리를 내기도 어렵다. 매달 전기, 수도, 가스 요금으로 수천만 원을 소비하는 입장에서 탄소제로와 같은 방향 전환을 고민하기란 쉽지 않다.
교회는 디퓨저를 설치해 숲속의 향을 제공하거나 환경주일을 지킨다고 해서 성도들이 생태적 영성을 느끼도록 할 수 없다. 탁월한 냉난방과 최첨단 시설을 제공한다고 해도 기후위기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이 모든 것은 기후 부채감과 기후 죄책감만 알게 모르게 증가시킬 뿐이다. 교회 밖에서 교회를 바라보는 시민들의 시선에도 좋은 이미지를 주기 어렵다. 교회는 기후위기 시대의 방주가 아니라 ‘오염원’의 하나가 될 뿐이다. 시민들의 기대와 시선을 따라가는 것이 늘 옳지는 않다. 하지만 개인, 가정, 마을, 도시가 유기적으로 연대하며 기후위기에 적응해야 하는 이 시기에 교회는 생태적 감수성의 중심지가 되어야 한다. 교회를 내부와 외부에서 경험하는 사람들이 교회를 통해 창조주 하나님을 발견하고 느낄 수 있도록 새로운 공간과 장소에 대한 상상력이 필요하다.
2023. 06. 07.
*기독인문학연구원: (www.ioch.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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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의 숨결을 느끼게 해주는 교회
김신영 (기독교환경교육센터 부소장)
*본 글은 '필자와 <주간기독교>의 허락을 받아 공유함을 알려드립니다.'
*출처 : 주간기독교 (www.cnews.or.kr/news/articleView.html?idxno=2034)
우리는 공간의 영향을 받으며 살아간다. 사람들은 일정한 목적과 의도대로 공간을 통제하고 관리하며 사용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반대로 공간이 사람들의 행위, 생각, 감정에 영향을 주는 경우도 적지 않다. 어떤 공간이나 장소에 대한 기억은 후각을 통해 각인되기도 한다. 서점이나 호텔 로비에 들어설 때 느껴지는 각인된 향을 통해, 비로소 우리는 바로 ‘그 장소’에 와 있다는 것을 감각적으로 느끼기 시작한다. 오랜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현관문을 열고 내 집에 들어설 때 내 집의 냄새는 내가 비로소 ‘내 집’에 왔다는 것을 느끼게 해준다.
호텔이나 서점에서도 향을 사용하는 경우가 자주 있다. 서울 광화문에 위치한 유명한 대형 서점에 가면 그곳만의 냄새가 있다. 그 냄새는 서점에서 자체 개발해 그동안 매장에서만 사용해 온 ‘책향(The Scent of Page)’이다. 서점의 고객들과 방문객들은 서점이 주는 분위기와 목적 외에도 서점에 들어올 때부터 책향이 주는 느낌에 익숙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책향은 시트러스, 피톤치드, 허브, 천연 소나무 오일을 혼합하여 제조되었다. 그래서 서점에 들어서는 고객들은 마치 울창한 나무숲을 거니는 느낌을 얻었다. 오래된 중고서점이나 대학 도서관에 들어설 때 나는 오래된 책 냄새에 설렘을 느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 냄새가 없는 공간을 상상하면 어색하다.
종교적 공간도 마찬가지이다. 의례에 참여하는 사람의 마음가짐이나 신앙적 자세도 중요하지만, 공간이 주는 분위기와 물질적 요소들이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진 성당 안에 들어가면 높은 천정과 굵은 기둥들이 줄지어 있다. 그리고 이 하중을 견디기 위해 창문을 최소화하면서 자연스레 어두워진 실내는 엄숙하고 경건한 신앙적 자세를 요구한다. 이 안에서는 비그리스도인마저도 작은 소음조차 만들기 어려운 마음이 생긴다. 이 안에서만은 무릎을 꿇고 손을 모으고 기도해야 할 것 같은 마음이 들 수도 있다. 현대인들에게도 느껴지는 이 일시적인 느낌이 중세인들에게는 더욱 강렬했을 것이다.
아주 높고, 화려한 첨탑들이 무수히 솟아 있는 고딕 양식으로 건축된 유럽의 대성당들은 로마네스크 양식의 건축물과 비슷하면서도 조금은 다르다. 높고 웅장한 건축물 앞에서 느끼는 압도적인 분위기는 신의 높음과 인간의 낮음을 느끼게 만든다. 고딕 양식의 성당은 높고 뾰족한 천장을 지지하기 위해 여러 뼈대를 서로 교차해서 하중을 분산시켰다. 그래서 로마네스크의 굵은 기둥 대신 얇은 기둥이 상부의 하중을 버티도록 했다. 이로 인해 로마네스크 양식의 두꺼운 벽 대신 커다란 창문이 설치될 수 있었다. 그뿐 아니라 아름답게 채색된 스테인드글라스는 내부를 더욱 밝고 화려한 빛으로 채웠다. 교회는 하나님의 영광과 그리스도의 승리가 강하게 재현되는 거룩한 공간이 되었다. 그래서 유럽의 대도시들은 하나님의 영광과 승리를 표현하는 상징적 건축물을 하나씩 갖게 되었다.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과 쾰른의 대성당, 사르트르 대성당이 이를 대표한다.
시대를 훌쩍 뛰어넘어 현대의 초대형 교회들을 살펴보자. 높고 웅장한 외관과 더불어 넓은 로비, 지하철과의 연결성, 밝고 화려한 조명, 고급 수입 목재 및 석재로 제작된 의자 및 인테리어, 높고 튼튼한 강단, 음향전문가가 설계한 공간, 고화질 대형 스크린 등 최신 기술들이 동원되어 있다. 자본주의적 성공과 신앙적 성숙이 동일시되는 번영신학의 시각이 교회 건축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교회의 핵심적 기능인 선포, 봉사, 친교는 교회 건축과 함께 강화되었다. 예배당, 교육관, 친교공간, 문화공간, 지역주민을 위한 공간 등이 잘 마련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이들은 백화점이나 대형쇼핑 센터와 비슷한 수준의 편의성과 접근성을 갖추고 있기도 하다.
과거나 지금이나 웅장한 대형 건축물에는 막대한 건축비가 소요된다. 과거에는 고위 성직자들이나 왕가에서 건축비를 기부하기도 했고, 헌금과 면죄부 판매, 범법자들에게 걷은 벌금 등으로 건축 비용을 충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역사가들은 교회가 대성당을 짓느라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과 병원 및 학교 운영을 희생시켰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지금과 달리 구제, 교육, 의료 등 복지에 대한 국가의 책임과 역할이 부재하던 시절 교회의 역할은 매우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가 종교권력의 재생산을 우선시했을 때 교회의 시선과 시민의 시선은 점차 엇갈리기 시작했다.
현대의 초대형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유럽의 대성당들과는 다른 면에서 시대착오적이며 시민들의 시선과 다른 곳을 향하고 있다. 오늘날 사회는 기후변화가 촉발한 생태적 위기에 노출되어 있다. 전문가들의 암울한 전망에도 불구하고 정부들은 여전히 경제성장에 골몰하고 있으며 탄소배출 감소에 미온적이다. 예산이나 역량의 부족 때문이 아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일어나자 기후변화 적응에는 인색하던 나라들이 수천억에서 조 단위의 국방비를 증액하고 지출하기 시작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탄소 배출이 많은 국가와 글로벌 기업들이 자기의 이익 추구를 우선시하고 공적 가치를 선택적인 것으로 여길 때, 종교는 이와 다른 방향을 제시할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이 된다. 현대인들이 교회를 볼 때, 이곳이 기후변화로부터 우리를 구원해 줄 방주라는 걸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오래된 책의 진한 종이 냄새가 비로소 내가 도서관 서고에 와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것처럼, 사람들이 교회를 볼 때 이곳이 기후변화 시대에 구원의 방주라는 느낌을 줄 수 있어야 한다. 최신식 상업적 건물이나 관공서 건물보다 뛰어난 외관 및 편의성을 제공하는 것을 넘어, 교회에 들어서는 순간 이 교회가 지구를 생각하는 곳이라는 걸 온몸으로 느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건축은 공공재이다. 건축은 지역의 기능과 흐름에 영향을 미치며 그곳에 거주하거나 지나가는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어떤 건물들의 위치나 배치로 인해 여러 효과가 나타난다. 어떤 건축물은 빛공해를 일으켜 사람 간 분쟁도 일으키고, 철새들을 혼란에 빠지게도 한다. 교회가 크고 작은 민원이나 환경 소송에 휘말리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조망권, 일조권, 소음, 교통 체증, 이중 주차 및 무단 주차, 부동산 가격 하락이 대형교회가 지역사회와 경험하는 법적 갈등이다.
이러한 갈등은 교인이 아닌 지역주민들과의 소통 과정이 결여되어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 지역주민의 의사조차 반영되지 않은 교회 건축에 생태적 차원이 포함될 여지는 더 적다. 문제는 이렇게 건축된 교회는 지역 사회 안에서 배척받거나 심할 경우 ‘혐오시설’이 되어 버릴 뿐 아니라, 교인들과 지역주민들에게 마저 사랑과 화해 및 구원의 공간이 아닌 갈등의 공간으로 각인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이런 경우를 상상해보자. 교회 도착 수백 미터 전부터 교회로 진입하려는 차들로 인해 차가 막히고 주차 공간을 찾기가 어렵다. 지하주차장에 어렵게 차를 세우고 예배당과 연결된 엘리베이터를 타려고 하는데 자리가 쉽게 나지 않아 여러 대를 올려보낸다. 때로는 비상구 계단을 이용하기도 한다. 그렇게 도착한 예배당에 앉아 밝은 조명과 모니터를 보며 예배에 참석한다. 예배를 마치고 이 모든 과정을 반대로 거치며 교회를 빠져나온다. 나오는 길은 더 복잡하다. 이런 공간에서는 그 어떤 거룩함과 신성함을 경험하기 힘들 것이다. 이러한 교회는 기후변화 시대의 정의로운 목소리를 내기도 어렵다. 매달 전기, 수도, 가스 요금으로 수천만 원을 소비하는 입장에서 탄소제로와 같은 방향 전환을 고민하기란 쉽지 않다.
교회는 디퓨저를 설치해 숲속의 향을 제공하거나 환경주일을 지킨다고 해서 성도들이 생태적 영성을 느끼도록 할 수 없다. 탁월한 냉난방과 최첨단 시설을 제공한다고 해도 기후위기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이 모든 것은 기후 부채감과 기후 죄책감만 알게 모르게 증가시킬 뿐이다. 교회 밖에서 교회를 바라보는 시민들의 시선에도 좋은 이미지를 주기 어렵다. 교회는 기후위기 시대의 방주가 아니라 ‘오염원’의 하나가 될 뿐이다. 시민들의 기대와 시선을 따라가는 것이 늘 옳지는 않다. 하지만 개인, 가정, 마을, 도시가 유기적으로 연대하며 기후위기에 적응해야 하는 이 시기에 교회는 생태적 감수성의 중심지가 되어야 한다. 교회를 내부와 외부에서 경험하는 사람들이 교회를 통해 창조주 하나님을 발견하고 느낄 수 있도록 새로운 공간과 장소에 대한 상상력이 필요하다.
2023. 06.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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