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의 집에서 골고다 가는 길
윤국영 박사(기독인문학연구원 상임연구위원)
예수 시대 예루살렘
주전 1세기, 예수님도 사셨던 예루살렘은 이 도시의 수천 년 역사를 통틀어 전무후무한 번영을 구가했던 시기다. 19세기 말까지 예루살렘은 영토나 인구 면에서 예수 시대를 능가하지 못했다. 오늘날 예루살렘 구시가지 밑으로는 수천 년에 걸친 유적들이 잠자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예수 시대 전후의 유적이 그 크기와 범위에서 단연 돋보인다. 이는 여러 시대의 성벽 돌로 이루어진 오늘날의 구시가지 성벽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기저부를 이루는 하스모니안 시대, 그리고 특히 헤롯 시대 성벽 돌의 규모와 공교함은 후대 로마 시대, 중세 십자군 및 아랍 시대 성벽 돌을 압도한다.
일찍이 다윗에 의해 하나님의 처소 예정지로 자리매김한 예루살렘 성전산 지역은 그 아들 솔로몬 때에 비로소 첫 성전이 지어지고, 바벨론에 의해 파괴된 솔로몬 성전은 포로기 이후 스룹바벨에 의해 재건되었다. 이 재건 예루살렘은 포로귀환 한 유대인들이 미력하여 다윗성과 성전산을 중심으로 한 소규모의 도시 재건에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후 인구가 점차 늘어나고 유대인 독립 왕국인 하스모니안(Hasmonean) 왕조와 로마 꼭두각시 헤롯 대왕이 다스리는 주전 1-2세기가 되면서 예루살렘의 영역은 서쪽과 북쪽으로 확장된다.
성전과 성전산 지역도 조금씩 개축과 증축을 거치게 된다. 구약시대 성전은 평평한 산(모리아 산) 위에 지어졌지만 하스모니안 시대(주전 1-2세기) 이후로는 산을 거대한 축대로 덮고 그 위에 성전을 세웠다. 이 축대와 성전 전체를 성전산(Temple Mount)이라 부른다. 모리아 산 위에 덮어 씌워진 거대한 축대와 그 한가운데 번쩍이는 아름다운 성전, 그 남쪽에 자리 잡은 웅장한 회랑 건물은 당대 사람들에게 1,000년을 이어온 성도 예루살렘의 최전성기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이와 더불어 예루살렘은 국제적 문화 감각도 뛰어났다.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의 기록에 의하면 예루살렘에는 최신 로마식 오락 시설인 연극장(Theatre), 마차 경기장(Hippodrome), 원형경기장(Amphitheatre)이 갖춰져 있었다고 한다.
예수 시대의 예루살렘은 성전산 지역(Temple Mount area), 아랫도시(Lower City), 윗도시(Upper City) 그리고 ‘제2지역(Mishneh)’이라고 불리는 북부 성벽 확장 지역의 4구역으로 나뉜다. 이후 아그립바 1세(주후 41-44년) 때 북쪽의 넓은 지역에 성벽을 더 쌓기 시작하는데, 이 새로운 성벽은 로마에 의해 예루살렘 파괴 직전 완성되며 예루살렘은 더욱 크게 확장된다(New City).
마가의 집
예수님 당시 예루살렘 윗도시는 동쪽 아랫도시에 비해 고도가 약 30~100m 정도 더 높은 언덕 지대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높은 지대에 사는 것을 선호하여 성읍에서 높은 지역은 부유층과 엘리트층이 차지했다. 하스모니안 왕들과 헤롯 왕조의 왕들은 자신의 궁전을 이곳 윗도시에 지었다. 서쪽 언덕은 예루살렘 성전 지대보다 수십 미터나 더 높아서 성전 뜰의 제사를 내려다볼 수 있는 곳이었기 때문에 헤롯 왕가 왕들의 허영심을 채워 주기에도 안성맞춤이었다.
주후 6년 이후, 로마가 유대 지역을 직접 통치하게 되면서 로마 총독이 예루살렘에 머물 때는 헤롯 궁전을 자신의 거처로 사용했다. 이 지역은 정치권력이 집중된 곳이었기에 부유층과 종교-정치 엘리트들이 주로 모여 사는 지역이었다. 1967년 ‘6일 전쟁’ 직후 서쪽 언덕에서 행해진 대대적 발굴은 당대 예루살렘 상류층의 화려한 생활상을 잘 보여줬다.
성경에는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초대교회 이래 기독교 전통에 따르면 최후의 만찬(막 14:12-16; 눅 22:7-13) 및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행 1:13-14, 2:1-4)은 마가와 그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서 일어났고, 그 집은 윗도시 남쪽 구역인 오늘날의 시온산 지역에 있었다고 전해진다. 마가 혹은 마가 요한과 그 어머니 마리아는 많은 제자를 수용할 만큼 넓은 집과 여종을 소유할 정도로 유복했고, 그들의 집은 예수 공동체의 허브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행 12:12). 그 집터는 주후 70년 로마군에 의해 파괴되었을 것으로 본다. 이미 초기 기독교 시대부터 교회들이 이곳을 중심으로 존재하기 시작했고, 오늘날에도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전승을 잇는 교회들이 시온산 지역에 세워져 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 서쪽 언덕의 한 2층 방에서 유월절 포도주와 빵을 제자들과 나누시던 때 창밖으로 보이는 예루살렘 아랫도시. 이제 곧 그 아랫도시를 지나 겟세마네로 내려가셔야 할 시간을 기다리며 주님은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그때에 모두 배신하고 뿔뿔이 흩어질 것을 아셨음에도 끝까지 팔 벌리고 맞아주시는 주님의 심정을 과연 제자들은 느꼈을까?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요 13:1)
마가의 집에서 겟세마네 가는 길
고대 예루살렘에서 동쪽 지역은 남북 방향의 중앙계곡(Tyropoeon Valley) 주변으로 낮고 완만하게 펼쳐져 있다. 서쪽 언덕 지역보다 낮기 때문에 아랫도시라고 불리운다. 이 지역은 서쪽 언덕에 비해 훨씬 더 오래된 주거 역사를 가지며 일찍이 다윗이 이 지역을 중심으로 통합왕국의 수도 예루살렘을 건설했다(City of David).
그러나 예수 시대가 되면 윗도시에 비해 낙후되고 조밀한 중하층 거주 지구가 된다. 윗도시가 잘 정비되어 세련된 환경이라면 아랫도시는 좁지만 활기가 넘친다. 또 성전지역에 인접해 있기에 성전을 찾는 인파로 늘 붐빈다. 예수 시대 전후로는 해외파 유대인이나 유대교 개종자 중에 예루살렘에 장기 거류하거나 정착하여 성전이 가까운 아랫도시에 살았던 자들이 적지 않았던 것 같다. 성전산 남쪽 지역에서 발견된 한 비문(Theodotos Inscription)에 의하면 예수 시대 예루살렘에는 해외파 유대인들이 각자의 출신지별로 다니는 회당들이 따로 있었다(행 2:5-12).
예수께서는 윗도시 마가의 집에서 유월절 만찬을 마친 후, 제자들과 아랫도시를 지나 감람산 서편 기슭에 있는 겟세마네로 이동하셨다. 윗도시 중에서도 높은 지대인 시온산 지역에서 아랫도시의 가장 낮은 지대인 실로암 인근까지 고도차는 약 100m 정도로 매우 가파르다. 오늘날 윗도시와 아랫도시를 잇는 중간지점에는 가파른 비잔틴 시대 계단이 일부 발견되는데, 예수께서도 혹 이 루트를 따라 내려가셨을지도 모르겠다.
가로등도 없는 어두운 밤길에 로마식 빌라 형태로 만든 부유한 집들 사이를 지나 가파르게 내려오는 아랫도시의 좁은 골목길 계단. 낮에는 분주했을 중앙계곡 끝자락 상점 거리를 가로지르며 펼쳐지는 잔잔한 실로암 연못, 그리고 나직하게 들리는 기혼샘 물살 소리. 겟세마네 가는 길은 여느 때와 변함이 없건만 그 밤은 왠지 다르게 느껴졌을까? 성 밖으로 나오면 감람산이 어느새 성큼 다가와 있다. 감람산 기슭과 동쪽 성벽 사이로 컴컴한 기드론 와디 바닥을 밟으며 겟세마네로 향할 때 무리는 어땠을까? 제자들도 무언가 예감하고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 도망치고 싶었으리라. 그리고 얼마 후 그렇게 그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눅 22:42)
십자가의 길
겟세마네 올리브 숲 사이에서 예수께서 잡히시고 제자들은 감람산 기슭 사방으로 몸을 감추었다. 횃불 무리에 의해 다시금 윗도시로 끌려가신 예수. 당대의 실세 대제사장들의 집으로 끌려가시고 대제사장들과 장로들 그리고 서기관들이 모인 산헤드린 공회에서 심문을 받으신다.
이들 지도층 대부분이 거주했던 윗 도시에서 발굴된 주택들을 보면, 이교도를 배척하는 유대교 정결례 전통이 로마풍 건축 요소와 절묘한 조화를 이루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모습은 로마와 평화 유지를 통해 유대교 사회를 보존하고자 했던 당대 유대 정치-종교적 엘리트들의 입장을 잘 보여 준다. 예수께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드러내시는 것은 그들에게 참을 수 없는 신성 모독이었지만, 정치적으로도 예수의 존재가 로마와의 평화를 와해시켜 유대 민족에 파국을 가져올 것으로 판단했을 것이다.
“만일 그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그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하니” (요 11:48)
예수께서는 밤새 심문을 받으신 후, 새벽 6시경 빌라도 총독에게 넘겨졌다. 빌라도는 유대 최대의 명절인 유월절을 맞아 행정수도인 가이사랴를 떠나 예루살렘을 방문 중이었다. 로마 총독은 예루살렘 주재 시에 윗도시에 있는 화려한 헤롯 궁전을 거처로 삼았고, 로마 군영이 주둔하는 안토니아 요새(Antonia Fortress)에서도 업무를 처리했다. 이 요새는 헤롯 대왕이 성전산 지역을 관할하고자 성전산 지역 북서쪽에 지은 높이 솟은 성채인데, 예수님 당시에는 로마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전통적 견해로는 예수께서 이곳 안토니아 요새에서 사형 언도를 받고 십자가를 지셨다고 본다.
오늘날 ‘십자가의 길(Via Dolorosa)’로 불리는 루트는 총 14개 처소로 구분되어 주로 그리스 정교회와 가톨릭 그리고 아르메니안 정교회에서 관리한다. 오늘날의 십자가의 길 골목 바닥 높이는 예수님 시대보다 상당히 높아져 있으며, 지난 2,000년간 예루살렘은 수많은 파괴와 재건의 변화를 겪었다. 따라서 현재 사람들이 걷는 ‘십자가의 길’의 루트와 분위기는 예수님 당대와 꽤 차이가 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2,000년 전 예수님께서 채찍을 맞으며 십자가를 지셨던 그 길, 그 현장 속으로 깊이 들어가 본다면 동일하게 느낄 수 있는 부분들도 있다.
안토니아 요새 터를 벗어나면 금세 가로지르게 되는 중앙계곡 길, 그리고 이 계곡 길로부터 시작되는 완만한 오르막과 그 끝에 솟아 있는 골고다 성묘교회를 만난다. 고요한 새벽, 이를 떠올리며 길을 걸으면 2,000년 전 그 인류사적 현장이 좀 더 마음 깊이 느껴진다.
위압적인 안토니아를 벗어나자마자 중앙계곡 길 시장의 떠들썩한 소리가 들린다. 유월절을 맞아 계곡 길을 따라 성전을 향하는 수많은 순례자와 그중 한 사람 구레네(Cyrene) 시몬. 늘 가던 성전 쪽 대신 반대편 우측으로 꺾으면 십자가에 달려 죽게 되는 그곳으로 가는 길이다.
허름해 보이는 ‘제2 구역(Mishneh)’의 어둡고 좁은 골목 오르막길로 접어들면서 조금 잦아든 떠들썩함. 그리고 밀려오는 외로움. 어느덧 골목 끝에 다다르고 서쪽 성문을 빠져나가면 갑자기 환해지면서 골고다 언덕이 나타난다. 만약 그때 내가 이 길에 서 있었다면 어땠을까? 아니 주님은 그 눈빛으로 내게 뭐라고 하셨을까?
제2 지역을 동에서 서로 가로지르는 십자가의 길은 약 600m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나 대속이라는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께는 멀고 먼 고통의 길이었을 것이다. 머릿속을 어지러이 교차하는 수많은 생각과 감정.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 모든 것을 사로잡아 하나님께 복종케 하는 순종의 한 걸음, 한 걸음을 꿋꿋이 걸으셨으리라.
“이르시되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하시고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눅 9:22-23)
골고다
제2 구역의 성벽(제2 성벽) 너머 더 북쪽에는 채석장이나 가축 시장, 물 저장 연못, 정원 그리고 무덤들이 주로 발견된다. 예수님 당시에는 예루살렘 북쪽 교외 지역이었고 상주인구가 많지 않아 집들이 조밀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동쪽, 서쪽, 북쪽으로 유대 안팎 여러 지역과 연결되기 때문에 순례객을 비롯한 통행인구로 늘 붐비던 곳이다. 예루살렘 성내에서 숙소를 찾지 못한 많은 순례객이 천막을 치고 유숙하는 지역이기도 하다.
골고다의 정확한 위치는 성경에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초기 기독교적 전통과 비너스 신전이 있었다는 역사적 반증을 바탕으로 유추해 볼 때, 골고다와 예수님 무덤의 위치를 오늘날의 성묘교회(The Church of the Holy Sepulcher)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이 교회의 위치는 예수님 시대 예루살렘의 제2 구역 북서쪽 외곽에 해당한다. 예수께서는 골고다에서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달리시고 오후 3시에 운명하셨다.
역사상 가장 잔혹하기로 유명했던 고대 앗수르 제국 이래 수많은 십자가형과 유사 사형법이 행해져 왔다. 2,000년 전 팔레스타인 지역, 십자가에 달린 한 억울한 사형수의 이야기가 21세기 현재 아시아 동쪽 끝 대한민국에 사는 이들에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곰곰이 생각해본다. 많은 중간지점을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결론적으로는 아무 의미가 없거나 아니면 의미 전부이거나 둘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히 13:12-13)
부활의 새벽길
안식일이 지나고 다시금 새벽이 찾아왔다. 아마도 윗도시 마가의 집에 모여 있었을 제자들. 낙망과 슬픔을 안고 유대 법대로 향품을 예수님의 시신에 싸기 위해 여인들이 길을 나선다. 성 밖 골고다로 가기 위해서는 빌라도가 머물러 있는 거대한 헤롯 궁전 옆을 지나야 한다. 불과 이틀 전 있었던 예수 처형 사건으로 분위기는 여전히 살벌했다. 그러니 한적한 새벽 미명이었지만 로마군이 지키는 그 궁전 앞을 지나는 여인들의 심정이 얼마나 떨렸을까? 전날 안식일 역시 두려움과 낙망으로 종일 집에 갇혀 지냈으리라.
궁전을 지나며 길 오른편 빌라들 사이로 보이는 성전과 아랫도시의 전경, 그리고 멀리 보이는 감람산의 모습은 여느 때와 변함이 없다. 그러나 이제 메시아로 믿고 모든 것을 버리고 따랐던 예수께서 사형당하심으로 더 이상 곁에 없으시다는 상상하기 힘든 날들이 시작되었다.
궁전 앞을 다 벗어나면 왼쪽으로 세 개의 높은 탑이 나타난다(파사엘(Phasael), 히피쿠스(Hipicus), 미리암(Mariamme). 헤롯 궁전을 지키는 이 탑들은 당대 예루살렘에서 가장 높이 솟은 건축물이다(가장 높은 파사엘은 약 14층 아파트 높이). 이 탑들을 지나면 곧 성문을 통해 성 밖으로 나간다. 성 밖에 나가자마자 오늘날까지 사용되며 ‘망대 연못(Towers’ Pool)’이라 불리는 빗물을 모아두는 저수지가 나타난다. 그리고 잠시 후 여인들은 엊그제 겪었던 악몽처럼 골고다를 다시 마주한다. 성경에 의하면 그 근처에 아리마대 요셉 소유의 바위를 판 새 무덤, 곧 예수님의 무덤이 있었을 것이다(요 19:42).
오늘날 예루살렘 구시가지 반경 5㎞ 이내에서 1,000개 정도의 예수 시대 전후 바위 무덤들이 발견되는데 실제로는 훨씬 더 많았을 것이다. 예수 시대 바위 무덤은 일종의 횡혈식 석실 무덤인데, 큰 바위 지대를 마치 여러 개의 방이 있는 반지하 집처럼 파고 들어간 무덤 양식이다. 입구를 들어서면 중앙 홀이 있고 여기서 사방으로 시신을 넣는 방을 파고 들어간다. 각각의 방에는 시신을 안치하는 돌 선반이 마련되어 있다.
시신은 향품과 함께 세마포에 싸두는데, 약 1년 후 살이 썩고 뼈만 남게 되면 이를 수습하여 돌 상자에 넣어 무덤에 보관한다. 대개 무덤 안은 넓지만 입구는 사람 하나가 구부리고 들어갈 정도로 작게 만든다. 여기에 둥글고 평평하게 다듬은 돌을 여닫이 홈에 끼워 굴려서 입구를 봉했다.
여인들이 살 떨리는 위험을 무릅쓰면서 무덤에 온 이유는 예수님의 장사를 치르던 지난 금요일에 향품을 시신과 함께 넣을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도착하여 본 예수님의 무덤은 열려 있고 로마군 파수꾼들은 온데간데없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칠흑같이 깜깜할 것만 같던 무덤 안에서 흰옷 입은 천사들을 만난다(막 16:5; 눅 24:3-4; 요 20:12). 그리고 듣게 되는 예수님의 부활 소식.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은 들어본 적도 상상해 본 적도 없었을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잠시 후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난다. 조금 전까지 동산 무덤으로 가는 길은 좌절과 슬픔뿐이었지만, 이제 돌아오는 길은 경외와 기쁨의 길로 변해 버렸다.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이후 여러 다른 제자에게도 나타나신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고전 15:17-20)
예수의 부활을 목도한 제자들은 예수님의 약속과 명령대로 함께 모여 기도하던 중 성령을 받게 되고, 예수 부활의 증인으로 거듭난다. 무엇이 두려움으로 숨어 지내던 제자들을 변화하게 했을까? 아마도 ‘예수가 누구인지’ 알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요 14:16-17). 그가 누구인지 제대로 알면 바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이 오순절 성령세례 장소도 윗도시 마가의 집으로 본다. 오전 9시, 칠칠절을 맞아 예루살렘을 가득 메운 순례객들 앞에서 제자들이 담대히 말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부활하심과 회개를 통한 새로운 삶의 촉구였다(행 2:14-40). 이때 세례를 받은 신도의 수가 3,000명이라고 하니 이 일은 아마도 예루살렘에서 가장 많은 인파로 붐비는 아랫도시 성전산 남쪽이나 서쪽의 중앙계곡 길 인근 장소에서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이후 제자들의 수가 많이 늘어나지만, 유대 지도자들의 핍박도 더욱 심해진다. 예수님 당대 유대인 종교 지도자들과 같이 오늘날도 유대인들은 예수를 “랍비요 인간이며 십자가에서 죽고 다시 살지 못하였다”라고 말한다(마 27:63-64, 28:11-15). 또한 무슬림들은 “그가 선지자요 십자가에서 죽은 듯 하나 실상 죽음을 맛보지 않고 하늘로 올리어졌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고, 오늘날 우리 또한 그러하다.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냐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냐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또한 아버지가 없으되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느니라” (요일 2:22-23)
2023. 05 01.
출처: 교회성장연구소(portal.icg21.com/board/board.php?ptype=view&kbbs_doc_num=88&page=1&bbs_id=humanities&searchtype=&searchword=&searchhpcode=&searchcate=)
마가의 집에서 골고다 가는 길
윤국영 박사(기독인문학연구원 상임연구위원)
예수 시대 예루살렘
주전 1세기, 예수님도 사셨던 예루살렘은 이 도시의 수천 년 역사를 통틀어 전무후무한 번영을 구가했던 시기다. 19세기 말까지 예루살렘은 영토나 인구 면에서 예수 시대를 능가하지 못했다. 오늘날 예루살렘 구시가지 밑으로는 수천 년에 걸친 유적들이 잠자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예수 시대 전후의 유적이 그 크기와 범위에서 단연 돋보인다. 이는 여러 시대의 성벽 돌로 이루어진 오늘날의 구시가지 성벽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기저부를 이루는 하스모니안 시대, 그리고 특히 헤롯 시대 성벽 돌의 규모와 공교함은 후대 로마 시대, 중세 십자군 및 아랍 시대 성벽 돌을 압도한다.
일찍이 다윗에 의해 하나님의 처소 예정지로 자리매김한 예루살렘 성전산 지역은 그 아들 솔로몬 때에 비로소 첫 성전이 지어지고, 바벨론에 의해 파괴된 솔로몬 성전은 포로기 이후 스룹바벨에 의해 재건되었다. 이 재건 예루살렘은 포로귀환 한 유대인들이 미력하여 다윗성과 성전산을 중심으로 한 소규모의 도시 재건에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후 인구가 점차 늘어나고 유대인 독립 왕국인 하스모니안(Hasmonean) 왕조와 로마 꼭두각시 헤롯 대왕이 다스리는 주전 1-2세기가 되면서 예루살렘의 영역은 서쪽과 북쪽으로 확장된다.
성전과 성전산 지역도 조금씩 개축과 증축을 거치게 된다. 구약시대 성전은 평평한 산(모리아 산) 위에 지어졌지만 하스모니안 시대(주전 1-2세기) 이후로는 산을 거대한 축대로 덮고 그 위에 성전을 세웠다. 이 축대와 성전 전체를 성전산(Temple Mount)이라 부른다. 모리아 산 위에 덮어 씌워진 거대한 축대와 그 한가운데 번쩍이는 아름다운 성전, 그 남쪽에 자리 잡은 웅장한 회랑 건물은 당대 사람들에게 1,000년을 이어온 성도 예루살렘의 최전성기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이와 더불어 예루살렘은 국제적 문화 감각도 뛰어났다.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의 기록에 의하면 예루살렘에는 최신 로마식 오락 시설인 연극장(Theatre), 마차 경기장(Hippodrome), 원형경기장(Amphitheatre)이 갖춰져 있었다고 한다.
예수 시대의 예루살렘은 성전산 지역(Temple Mount area), 아랫도시(Lower City), 윗도시(Upper City) 그리고 ‘제2지역(Mishneh)’이라고 불리는 북부 성벽 확장 지역의 4구역으로 나뉜다. 이후 아그립바 1세(주후 41-44년) 때 북쪽의 넓은 지역에 성벽을 더 쌓기 시작하는데, 이 새로운 성벽은 로마에 의해 예루살렘 파괴 직전 완성되며 예루살렘은 더욱 크게 확장된다(New City).
마가의 집
예수님 당시 예루살렘 윗도시는 동쪽 아랫도시에 비해 고도가 약 30~100m 정도 더 높은 언덕 지대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높은 지대에 사는 것을 선호하여 성읍에서 높은 지역은 부유층과 엘리트층이 차지했다. 하스모니안 왕들과 헤롯 왕조의 왕들은 자신의 궁전을 이곳 윗도시에 지었다. 서쪽 언덕은 예루살렘 성전 지대보다 수십 미터나 더 높아서 성전 뜰의 제사를 내려다볼 수 있는 곳이었기 때문에 헤롯 왕가 왕들의 허영심을 채워 주기에도 안성맞춤이었다.
주후 6년 이후, 로마가 유대 지역을 직접 통치하게 되면서 로마 총독이 예루살렘에 머물 때는 헤롯 궁전을 자신의 거처로 사용했다. 이 지역은 정치권력이 집중된 곳이었기에 부유층과 종교-정치 엘리트들이 주로 모여 사는 지역이었다. 1967년 ‘6일 전쟁’ 직후 서쪽 언덕에서 행해진 대대적 발굴은 당대 예루살렘 상류층의 화려한 생활상을 잘 보여줬다.
성경에는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초대교회 이래 기독교 전통에 따르면 최후의 만찬(막 14:12-16; 눅 22:7-13) 및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행 1:13-14, 2:1-4)은 마가와 그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서 일어났고, 그 집은 윗도시 남쪽 구역인 오늘날의 시온산 지역에 있었다고 전해진다. 마가 혹은 마가 요한과 그 어머니 마리아는 많은 제자를 수용할 만큼 넓은 집과 여종을 소유할 정도로 유복했고, 그들의 집은 예수 공동체의 허브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행 12:12). 그 집터는 주후 70년 로마군에 의해 파괴되었을 것으로 본다. 이미 초기 기독교 시대부터 교회들이 이곳을 중심으로 존재하기 시작했고, 오늘날에도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전승을 잇는 교회들이 시온산 지역에 세워져 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 서쪽 언덕의 한 2층 방에서 유월절 포도주와 빵을 제자들과 나누시던 때 창밖으로 보이는 예루살렘 아랫도시. 이제 곧 그 아랫도시를 지나 겟세마네로 내려가셔야 할 시간을 기다리며 주님은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그때에 모두 배신하고 뿔뿔이 흩어질 것을 아셨음에도 끝까지 팔 벌리고 맞아주시는 주님의 심정을 과연 제자들은 느꼈을까?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요 13:1)
마가의 집에서 겟세마네 가는 길
고대 예루살렘에서 동쪽 지역은 남북 방향의 중앙계곡(Tyropoeon Valley) 주변으로 낮고 완만하게 펼쳐져 있다. 서쪽 언덕 지역보다 낮기 때문에 아랫도시라고 불리운다. 이 지역은 서쪽 언덕에 비해 훨씬 더 오래된 주거 역사를 가지며 일찍이 다윗이 이 지역을 중심으로 통합왕국의 수도 예루살렘을 건설했다(City of David).
그러나 예수 시대가 되면 윗도시에 비해 낙후되고 조밀한 중하층 거주 지구가 된다. 윗도시가 잘 정비되어 세련된 환경이라면 아랫도시는 좁지만 활기가 넘친다. 또 성전지역에 인접해 있기에 성전을 찾는 인파로 늘 붐빈다. 예수 시대 전후로는 해외파 유대인이나 유대교 개종자 중에 예루살렘에 장기 거류하거나 정착하여 성전이 가까운 아랫도시에 살았던 자들이 적지 않았던 것 같다. 성전산 남쪽 지역에서 발견된 한 비문(Theodotos Inscription)에 의하면 예수 시대 예루살렘에는 해외파 유대인들이 각자의 출신지별로 다니는 회당들이 따로 있었다(행 2:5-12).
예수께서는 윗도시 마가의 집에서 유월절 만찬을 마친 후, 제자들과 아랫도시를 지나 감람산 서편 기슭에 있는 겟세마네로 이동하셨다. 윗도시 중에서도 높은 지대인 시온산 지역에서 아랫도시의 가장 낮은 지대인 실로암 인근까지 고도차는 약 100m 정도로 매우 가파르다. 오늘날 윗도시와 아랫도시를 잇는 중간지점에는 가파른 비잔틴 시대 계단이 일부 발견되는데, 예수께서도 혹 이 루트를 따라 내려가셨을지도 모르겠다.
가로등도 없는 어두운 밤길에 로마식 빌라 형태로 만든 부유한 집들 사이를 지나 가파르게 내려오는 아랫도시의 좁은 골목길 계단. 낮에는 분주했을 중앙계곡 끝자락 상점 거리를 가로지르며 펼쳐지는 잔잔한 실로암 연못, 그리고 나직하게 들리는 기혼샘 물살 소리. 겟세마네 가는 길은 여느 때와 변함이 없건만 그 밤은 왠지 다르게 느껴졌을까? 성 밖으로 나오면 감람산이 어느새 성큼 다가와 있다. 감람산 기슭과 동쪽 성벽 사이로 컴컴한 기드론 와디 바닥을 밟으며 겟세마네로 향할 때 무리는 어땠을까? 제자들도 무언가 예감하고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 도망치고 싶었으리라. 그리고 얼마 후 그렇게 그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눅 22:42)
십자가의 길
겟세마네 올리브 숲 사이에서 예수께서 잡히시고 제자들은 감람산 기슭 사방으로 몸을 감추었다. 횃불 무리에 의해 다시금 윗도시로 끌려가신 예수. 당대의 실세 대제사장들의 집으로 끌려가시고 대제사장들과 장로들 그리고 서기관들이 모인 산헤드린 공회에서 심문을 받으신다.
이들 지도층 대부분이 거주했던 윗 도시에서 발굴된 주택들을 보면, 이교도를 배척하는 유대교 정결례 전통이 로마풍 건축 요소와 절묘한 조화를 이루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모습은 로마와 평화 유지를 통해 유대교 사회를 보존하고자 했던 당대 유대 정치-종교적 엘리트들의 입장을 잘 보여 준다. 예수께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드러내시는 것은 그들에게 참을 수 없는 신성 모독이었지만, 정치적으로도 예수의 존재가 로마와의 평화를 와해시켜 유대 민족에 파국을 가져올 것으로 판단했을 것이다.
“만일 그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그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하니” (요 11:48)
예수께서는 밤새 심문을 받으신 후, 새벽 6시경 빌라도 총독에게 넘겨졌다. 빌라도는 유대 최대의 명절인 유월절을 맞아 행정수도인 가이사랴를 떠나 예루살렘을 방문 중이었다. 로마 총독은 예루살렘 주재 시에 윗도시에 있는 화려한 헤롯 궁전을 거처로 삼았고, 로마 군영이 주둔하는 안토니아 요새(Antonia Fortress)에서도 업무를 처리했다. 이 요새는 헤롯 대왕이 성전산 지역을 관할하고자 성전산 지역 북서쪽에 지은 높이 솟은 성채인데, 예수님 당시에는 로마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전통적 견해로는 예수께서 이곳 안토니아 요새에서 사형 언도를 받고 십자가를 지셨다고 본다.
오늘날 ‘십자가의 길(Via Dolorosa)’로 불리는 루트는 총 14개 처소로 구분되어 주로 그리스 정교회와 가톨릭 그리고 아르메니안 정교회에서 관리한다. 오늘날의 십자가의 길 골목 바닥 높이는 예수님 시대보다 상당히 높아져 있으며, 지난 2,000년간 예루살렘은 수많은 파괴와 재건의 변화를 겪었다. 따라서 현재 사람들이 걷는 ‘십자가의 길’의 루트와 분위기는 예수님 당대와 꽤 차이가 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2,000년 전 예수님께서 채찍을 맞으며 십자가를 지셨던 그 길, 그 현장 속으로 깊이 들어가 본다면 동일하게 느낄 수 있는 부분들도 있다.
안토니아 요새 터를 벗어나면 금세 가로지르게 되는 중앙계곡 길, 그리고 이 계곡 길로부터 시작되는 완만한 오르막과 그 끝에 솟아 있는 골고다 성묘교회를 만난다. 고요한 새벽, 이를 떠올리며 길을 걸으면 2,000년 전 그 인류사적 현장이 좀 더 마음 깊이 느껴진다.
위압적인 안토니아를 벗어나자마자 중앙계곡 길 시장의 떠들썩한 소리가 들린다. 유월절을 맞아 계곡 길을 따라 성전을 향하는 수많은 순례자와 그중 한 사람 구레네(Cyrene) 시몬. 늘 가던 성전 쪽 대신 반대편 우측으로 꺾으면 십자가에 달려 죽게 되는 그곳으로 가는 길이다.
허름해 보이는 ‘제2 구역(Mishneh)’의 어둡고 좁은 골목 오르막길로 접어들면서 조금 잦아든 떠들썩함. 그리고 밀려오는 외로움. 어느덧 골목 끝에 다다르고 서쪽 성문을 빠져나가면 갑자기 환해지면서 골고다 언덕이 나타난다. 만약 그때 내가 이 길에 서 있었다면 어땠을까? 아니 주님은 그 눈빛으로 내게 뭐라고 하셨을까?
제2 지역을 동에서 서로 가로지르는 십자가의 길은 약 600m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나 대속이라는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께는 멀고 먼 고통의 길이었을 것이다. 머릿속을 어지러이 교차하는 수많은 생각과 감정.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 모든 것을 사로잡아 하나님께 복종케 하는 순종의 한 걸음, 한 걸음을 꿋꿋이 걸으셨으리라.
“이르시되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하시고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눅 9:22-23)
골고다
제2 구역의 성벽(제2 성벽) 너머 더 북쪽에는 채석장이나 가축 시장, 물 저장 연못, 정원 그리고 무덤들이 주로 발견된다. 예수님 당시에는 예루살렘 북쪽 교외 지역이었고 상주인구가 많지 않아 집들이 조밀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동쪽, 서쪽, 북쪽으로 유대 안팎 여러 지역과 연결되기 때문에 순례객을 비롯한 통행인구로 늘 붐비던 곳이다. 예루살렘 성내에서 숙소를 찾지 못한 많은 순례객이 천막을 치고 유숙하는 지역이기도 하다.
골고다의 정확한 위치는 성경에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초기 기독교적 전통과 비너스 신전이 있었다는 역사적 반증을 바탕으로 유추해 볼 때, 골고다와 예수님 무덤의 위치를 오늘날의 성묘교회(The Church of the Holy Sepulcher)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이 교회의 위치는 예수님 시대 예루살렘의 제2 구역 북서쪽 외곽에 해당한다. 예수께서는 골고다에서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달리시고 오후 3시에 운명하셨다.
역사상 가장 잔혹하기로 유명했던 고대 앗수르 제국 이래 수많은 십자가형과 유사 사형법이 행해져 왔다. 2,000년 전 팔레스타인 지역, 십자가에 달린 한 억울한 사형수의 이야기가 21세기 현재 아시아 동쪽 끝 대한민국에 사는 이들에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곰곰이 생각해본다. 많은 중간지점을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결론적으로는 아무 의미가 없거나 아니면 의미 전부이거나 둘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히 13:12-13)
부활의 새벽길
안식일이 지나고 다시금 새벽이 찾아왔다. 아마도 윗도시 마가의 집에 모여 있었을 제자들. 낙망과 슬픔을 안고 유대 법대로 향품을 예수님의 시신에 싸기 위해 여인들이 길을 나선다. 성 밖 골고다로 가기 위해서는 빌라도가 머물러 있는 거대한 헤롯 궁전 옆을 지나야 한다. 불과 이틀 전 있었던 예수 처형 사건으로 분위기는 여전히 살벌했다. 그러니 한적한 새벽 미명이었지만 로마군이 지키는 그 궁전 앞을 지나는 여인들의 심정이 얼마나 떨렸을까? 전날 안식일 역시 두려움과 낙망으로 종일 집에 갇혀 지냈으리라.
궁전을 지나며 길 오른편 빌라들 사이로 보이는 성전과 아랫도시의 전경, 그리고 멀리 보이는 감람산의 모습은 여느 때와 변함이 없다. 그러나 이제 메시아로 믿고 모든 것을 버리고 따랐던 예수께서 사형당하심으로 더 이상 곁에 없으시다는 상상하기 힘든 날들이 시작되었다.
궁전 앞을 다 벗어나면 왼쪽으로 세 개의 높은 탑이 나타난다(파사엘(Phasael), 히피쿠스(Hipicus), 미리암(Mariamme). 헤롯 궁전을 지키는 이 탑들은 당대 예루살렘에서 가장 높이 솟은 건축물이다(가장 높은 파사엘은 약 14층 아파트 높이). 이 탑들을 지나면 곧 성문을 통해 성 밖으로 나간다. 성 밖에 나가자마자 오늘날까지 사용되며 ‘망대 연못(Towers’ Pool)’이라 불리는 빗물을 모아두는 저수지가 나타난다. 그리고 잠시 후 여인들은 엊그제 겪었던 악몽처럼 골고다를 다시 마주한다. 성경에 의하면 그 근처에 아리마대 요셉 소유의 바위를 판 새 무덤, 곧 예수님의 무덤이 있었을 것이다(요 19:42).
오늘날 예루살렘 구시가지 반경 5㎞ 이내에서 1,000개 정도의 예수 시대 전후 바위 무덤들이 발견되는데 실제로는 훨씬 더 많았을 것이다. 예수 시대 바위 무덤은 일종의 횡혈식 석실 무덤인데, 큰 바위 지대를 마치 여러 개의 방이 있는 반지하 집처럼 파고 들어간 무덤 양식이다. 입구를 들어서면 중앙 홀이 있고 여기서 사방으로 시신을 넣는 방을 파고 들어간다. 각각의 방에는 시신을 안치하는 돌 선반이 마련되어 있다.
시신은 향품과 함께 세마포에 싸두는데, 약 1년 후 살이 썩고 뼈만 남게 되면 이를 수습하여 돌 상자에 넣어 무덤에 보관한다. 대개 무덤 안은 넓지만 입구는 사람 하나가 구부리고 들어갈 정도로 작게 만든다. 여기에 둥글고 평평하게 다듬은 돌을 여닫이 홈에 끼워 굴려서 입구를 봉했다.
여인들이 살 떨리는 위험을 무릅쓰면서 무덤에 온 이유는 예수님의 장사를 치르던 지난 금요일에 향품을 시신과 함께 넣을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도착하여 본 예수님의 무덤은 열려 있고 로마군 파수꾼들은 온데간데없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칠흑같이 깜깜할 것만 같던 무덤 안에서 흰옷 입은 천사들을 만난다(막 16:5; 눅 24:3-4; 요 20:12). 그리고 듣게 되는 예수님의 부활 소식.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은 들어본 적도 상상해 본 적도 없었을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잠시 후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난다. 조금 전까지 동산 무덤으로 가는 길은 좌절과 슬픔뿐이었지만, 이제 돌아오는 길은 경외와 기쁨의 길로 변해 버렸다.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이후 여러 다른 제자에게도 나타나신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고전 15:17-20)
예수의 부활을 목도한 제자들은 예수님의 약속과 명령대로 함께 모여 기도하던 중 성령을 받게 되고, 예수 부활의 증인으로 거듭난다. 무엇이 두려움으로 숨어 지내던 제자들을 변화하게 했을까? 아마도 ‘예수가 누구인지’ 알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요 14:16-17). 그가 누구인지 제대로 알면 바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이 오순절 성령세례 장소도 윗도시 마가의 집으로 본다. 오전 9시, 칠칠절을 맞아 예루살렘을 가득 메운 순례객들 앞에서 제자들이 담대히 말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부활하심과 회개를 통한 새로운 삶의 촉구였다(행 2:14-40). 이때 세례를 받은 신도의 수가 3,000명이라고 하니 이 일은 아마도 예루살렘에서 가장 많은 인파로 붐비는 아랫도시 성전산 남쪽이나 서쪽의 중앙계곡 길 인근 장소에서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이후 제자들의 수가 많이 늘어나지만, 유대 지도자들의 핍박도 더욱 심해진다. 예수님 당대 유대인 종교 지도자들과 같이 오늘날도 유대인들은 예수를 “랍비요 인간이며 십자가에서 죽고 다시 살지 못하였다”라고 말한다(마 27:63-64, 28:11-15). 또한 무슬림들은 “그가 선지자요 십자가에서 죽은 듯 하나 실상 죽음을 맛보지 않고 하늘로 올리어졌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고, 오늘날 우리 또한 그러하다.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냐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냐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또한 아버지가 없으되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느니라” (요일 2:22-23)
2023. 05 01.
출처: 교회성장연구소(portal.icg21.com/board/board.php?ptype=view&kbbs_doc_num=88&page=1&bbs_id=humanities&searchtype=&searchword=&searchhpcode=&searchca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