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조영호/"혼밥하는 사랑"/문화와 인문학


혼밥하는 사랑

조영호 교수(안양대학교 겸임교수, 기독인문학연구원 상임연구위원)


에리히 프롬(Erich S. Fromm)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유대인 독일계 미국인 사회심리학자이면서 철학자이다. 그는 1900년 독일 유대교 집안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프롬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유대교 전통과 가치였다. 그래서 아도르노(Theodor W. Adorno)는 프롬을 ‘직업적 유대인’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프롬은 나치가 독일을 장악하게 되자 미국 뉴욕으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이후 그는 그에게 학자로서의 명성을 얻게 해준 대표작인 『자유로부터의 도피』와 그 후속편이라 할 수 있는 『건전한 사회』를 출판했다. 프롬은 『건전한 사회』를 통해 병든 사회를 치유하고 병든 개인을 치료하기 위해서 사회 구조의 개혁만이 아니라 인간의 정신 역시 건강성을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현대의 병을 치료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정신 해방과 사회 개혁을 『존재냐 소유냐』에서 명료하게 서술한다. 1956년 프롬은 지금까지 적어도 34개 언어로 번역되어 수백만 부가 팔린 『사랑의 기술』을 발표하였다. 이 책에서 그는 현대 소비사회 인간의 문제를 찾아내고 사랑의 병리적 현상에 대해 심리분석을 시도한다. 


1. 『사랑의 기술』 이해

프롬은 『사랑의 기술』에서 사람들이 의술이나 예술에 관한 기술을 익혀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랑의 기술도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사랑이란 별 준비 없이 적당한 기회에 마음 내키는 대로 하면 되는 것쯤으로 여기는 기존의 생각을 고치고자 했다. 프롬에 의하면 사랑은 독립된 인간 활동이 아니다. 사랑은 인간이 존재하는 본성에 대한 것이며, 사랑받는 사람의 자유나 행복과 맞닿는 문제로써 반드시 실천해야 할 당위적 활동이라고 생각했다. 


“자유는 근대인에게 독립과 합리성을 부여해 주었지만, 또한 근대인을 고립시킴으로써 마침내 그를 불안에 싸인 무력한 존재로 만들었다. 이러한 고립은 참을 수 없는 것으로 근대인은 자유라는 무거운 짐으로부터 도피하여 새로운 의존과 복종을 찾느냐, 그렇지 않으면 인간의 독자성과 개성에 기인한 자유의 실현을 위하여 전진하느냐는 양자택일의 상황에 놓여있다. … (중략)… 인간은 개인이 됨으로써 자연으로부터 분리되어 ‘인간’이 되는 첫걸음을 내디뎠다. … (중략)… 인간은 혼자이고 자유롭지만, 무력하고 두렵다. 그리하여 새로 얻은 자유는 재앙처럼 보인다.”


프롬은 고통스런 억압에서 해방된 인간이 다시 새로운 억압을 찾아 도망가는 소위 ‘자유로부터의 도피’의 원인을 ‘사랑 없음’이나 ‘잘못된 사랑’ 혹은 ‘서투른 사랑’이라고 말한다. 즉, 현대인들의 사랑이 왜곡되고 서툰 이유는 사랑에 대한 치명적인 오해에서 비롯된다. 사랑에 대한 치명적인 오해란, 사랑이 애써 배우고 습득해야 하는 기술인데도 저절로 터득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고 말한다. 의사가 되려면 의학을 배워야 하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사랑도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2. 아무것도 모르는 자는 아무것도 사랑하지 못한다.

사람들이 사랑에 대해 흔히 갖는 편견이 있다. 그것은 사랑이란 배움의 대상이 아니라고 여기는 것이다. 그 때문에 사랑은 아무 준비 없이 그저 하면 되는 것, 우연한 기회에 찾아오는 운명과도 같은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많은 사람이 사랑의 행위적 측면을 강조하기 때문에 생긴 편견이다. 다시 말해 사랑을 그저 달콤한 기분으로 유쾌하게 탐닉해 버리고 마는 것쯤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게 사랑을 애써 배워야 하는 것으로 여기지 않는 사람들은 사랑받을 수 있는 요건을 갖추는 일 또는 사랑스러운 대상을 찾는 문제에만 매달리고, 사랑하기 위해 자발적이고 능동적인 능력을 갖추는 일에는 소홀히 한다. 마치 그림을 그리기 위하여 무엇을 그릴지만 골몰하고 어떻게 그려 낼 것인가는 걱정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이 경우 많은 사람은 간절하게 사랑을 원하면서도 실패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사랑은 행동해야 비로소 이루어지므로 실천이 매우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배움이 없는 사랑은 서툰 사랑 혹은 병적인 사랑에 이르기 때문에 진정한 사랑의 실천을 어렵게 만든다. 


그렇다면 근본적인 사랑의 원리나 기술로서의 사랑은 무엇일까? 인간은 본래 생각이 많기 때문에 스스로 판단하고 해결하는 능력이 뛰어나다. 따라서 짐승들과 달리 자연적 세계에서 멀어진, 발전된 문화적 세계를 이루어 살아간다. 이 같은 세계에 동화되지 못한 채 세계와 분리되어 사는 사람은 외로움 속에서 불안을 느끼고, 심지어 수치심과 죄책감까지 느낀다. 이같이 세계와 멀어져 나 홀로 있다는 사실에서 받게 되는 불안함, 수치심, 죄책감 등을 잊기 위하여 아예 자기만의 세계에 스스로 갇혀 살거나 도치 상태에 빠지기도 한다.


“인간의 실존에 있어서 본질적인 것은 인간이 동물계로부터, 곧 본능적 적응의 세계로부터 벗어났고 자연을 초월해 있다는 - 비록 인간은 자연을 결코 버리지 못하지만 - 사실이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다. 그러나 한번 자연과 결별하면 인간은 자연으로 되돌아가지는 못한다. … (중략)… 인간은 자기 자신을 아는 생명이다. … (중략)… 자신의 고독과 자신의 분리와 자연 및 사회의 힘 앞에서의 자신의 무력함의 인식한다. 이러한 모든 인식은 인간이 분리되어 흩어져 있는 실존을 견딜 수 없는 감옥으로 만든다.”


이처럼 본성적으로 외로울 수밖에 없는 불안감, 수치심, 죄책감 등을 극복하기 위하여 해야 할 가장 바람직한 노력이 바로 올바른 사랑이며, 그런 사랑을 위해서는 사랑의 기술이 필요하다. 즉, 사랑의 근본 원리는 인간이 성장할수록 사랑의 기술을 애써서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3. 혼밥하는 사랑

“고립된 현대인은 사람을 지독하게 그리워한다. 동시에 경쟁자인 다른 사람들을 몹시 두려워한다. 그래서 현대인은 지극히 사회화되어 있지만, 몹시 외롭다. 현대인은 다른 사람들과 가까운 접촉을 두려워하지만, 마찬가지로 혼자 있고 아무런 접촉도 가지지 못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현대인이 타인과 가벼운 잡담이나 대화 등에 연연하는 동시에 그것에서 짙은 허무감을 느끼는 심리적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다. ‘어떻게 외롭지 않으면서 혼자 지낼 수 있을까?’ 하는 문제에 대한 해답이 하찮은 대화의 기능이다.”


소비사회는 모든 것을 상품화하는 사회다. 모든 것이 상품화된다는 것이 초래하는 최대의 재앙은 바로 ‘사람의 상품화’이다. 인간의 상품화는 인간관계에서도 극적인 변화를 초래했다. 사람들 사이의 윤리는 상품 교환의 윤리로 대체된다. 인간관계의 기본 원칙이었던 사랑의 윤리가 공정한 교환 혹은 공정거래의 윤리로 뒤바뀌어 버린 것이다.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이 공정성이 시장의 윤리 원칙이며, 그것이 시장적 성격의 삶을 지배하는 윤리적 원칙이다. … (중략)… 그러나 이웃을 사랑하고 그 사람에게 일체감을 느끼고 정식적인 힘을 계발하는 목적에 생애를 바치는 따위의 일은 공정성의 윤리에 포함되지 않는다.”


소비사회에서 사람들은 사랑을 주고받으며 살아가는 참다운 인간관계를 경험할 수 없고, 그 결과 불행한 삶을 살게 된다.


“물질적 재화에 있어서나 사랑에 있어서나 받은 만큼 준다는 것이 자본주의 사회의 보편적인 윤리의 격언이다. … (중략)… 유대 기독교의 형제애의 규범은 공정성의 윤리와는 전혀 다르다. 유대 기독교의 규범은 네 이웃을 사랑하라, 다시 말하면 이웃에 대한 책임을 느끼고 이웃과 하나가 되라는 것이고, 반면 공정성의 윤리는 책임이나 일체감을 느끼지 말고 멀리 떨어져 있으라는 것이다.”


소비사회는 시장 숭배와 시장 만능주의뿐만 아니라 개인주의도 보편화시킨다. 연대의 사랑이 아니라 개인주의적이고 자기중심적인 행동이 모두에게 최선의 결과를 가져다주리라는 원칙을 고수하고 따르는 것이다. 


원래 사람은 다른 사람에 의해 수단화되거나 도구화되어서는 안 되는 존엄한 존재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의 심리학자들은 사람을 도구화, 수단화하는 것은 곧 학대라고 단언한다. 그러나 인간에 의한 인간의 이용(인간의 상품화)은 자본주의 체계의 밑바탕에 깔린 가치 체계의 표현이다. 이처럼 자본주의 사회는 사람을 도구화하고 수단화하는 것을 허용할 뿐 아니라 오히려 장려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타인을 잔인하게 짓밟고 착취하며 잘 이용하는 사람일수록 성공한다.


“성공을 목표로 한, 이 같은 투쟁에서 인간적 유대를 위한 사회적, 도덕적 법칙은 파괴되고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경쟁에서 1등을 차지하는 것이었다. … (중략)…현대인은 인간 존재의 현실을 모두 은폐하고 자신의 인위적이고 윤색된 허위의 현실로 이를 대치한다. 반짝이는 유리구슬을 얻기 위해 땅과 자유를 잃어버린 노예들과 다를 것이 없다.”


현대 소비사회는 불합리하고 반인간적인 사회다. 따라서 현대인이 느끼는 기본 감정은 고립감(추방의 공포)이다. 심리적으로 고립된 사람이 느끼는 감정 고립감을 프롬은 사회적 유기 공포, 즉 사회로부터 고립되거나 추방당하는 ‘공포’라고 한다. 생물학적 존재에게 가장 치명적인 공포가 죽음에 대한 공포라면, 사회적 존재에게 가장 치명적인 공포는 사회적 유기 공포일 것이다. 이러한 유기의 공포 고립감의 치유는 참다운 사랑의 회복과 사랑을 통한 건강한 관계의 회복에 있다.


4. 어떤 사랑인가?

사랑에 대해 사람들이 생각하는 또 하나의 편견이 있다. 그것은 처음 사랑에 빠졌을 때의 상태만 사랑의 진짜 모습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는 최초의 사랑 경험 이후, 지속되는 사랑이 사랑의 전체 과정 중에서 더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는 사실을 잊게 한다. 사실 남녀 간에 처음 사랑에 빠졌을 때의 흥분과 격정은 매우 인상적이다. 사람들이 첫사랑을 못 잊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곧 권태와 실망으로 바뀌는 것 또한 자주 목격된다.


이러한 권태와 실망이 사랑의 감정이 식었거나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어쩌면 사랑의 후속 단계에 들어갔다는 표현이 옳다. 격정이란 본래 그 속성상 오래 지속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초기 사랑의 격정 상태에서는 신체가 3단계의 활발한 화학 반응을 일으키는 것으로 밝혀졌다. 갈망, 이끌림, 지속적 애착이 그것이다. 이 단계를 지날 때마다 특유의 화학물질을 분비하는 뇌의 활동이 급격히 활발해진다고 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남녀 간의 사랑에 빠진 사람의 두뇌 활동은 마약중독 상태에 빠진 사람의 상태와 비슷하며, 사랑에 실패하여 실연한 사람의 상태는 마약 중독자에게 마약을 주지 않을 때와 비슷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프롬은 『사랑의 기술』에서 사랑을 존재 양식과 소유 양식으로 구분할 때 ‘사랑은 소유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라는 전제를 기초로 한다. 예를 들어,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잡아서 배를 가르는 것이 잘못된 소유 양식이라면 거위가 건강을 유지하며 꾸준히 성장하도록 하는 것이 온전한 존재 양식이라고 보는 것이다. 


프롬은 “소유할 수 없는 추상적 개념인 사랑마저 소유할 수 있는 구체적인 대상으로 착각하고 소유하려고 하는 데서 문제가 시작된다”고 지적한다. 사랑이 식었다거나 사라졌다는 것도 실은 사랑이 존재 양식에서 소유 양식으로 전환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사랑은 계속 존재 양식의 형태를 취해야 진정 행복할 수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그러므로 사랑은 소유 양식이 아니라 존재 양식을 유지할 때 지속된다. 


앞에서 이미 살펴보았듯이 인간은 본래 생각할 줄 아는 사고 능력이 뛰어나서 자연 세계와 분리되어 문화적 세계에 살고 있기 때문에 외로울 수밖에 없다. 혼밥하는 인간이 취할 수 있는 가장 바람직한 노력은 올바른 사랑이며, 이 사랑을 위해서는 사랑의 기술이 필요하다. 학문과 예술 또는 자신의 신체 단련 같은 것도 외로움을 이기는 노력 가운데 하나이다. 


그렇지만 가장 바람직한 노력은 다른 사람과 나누는 사랑이다. 그 시작은 따뜻하게 열려있는 마음으로 나누는 대화다. 그리고 거기에는 공통적으로 관심, 지식, 보호, 존경, 책임이 따라야 한다. 이렇게 구체적인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부모, 형제와 이웃, 부부(이성), 자기 자신, 하나님 등 대상에 따른 분별 있는 사랑의 기술을 먼저 배우고, 알아야 한다.


5. 사랑하라

“지금 맺고 있는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경험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이러한 사랑의 본질이 있다. 가장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이런 사랑의 형태는 영화와 잡지의 사랑 이야기나 사랑 노래의 소비자들에 의해 경험되는 사랑의 대상적 만족에서 찾아볼 수 있다. 사랑, 합일, 친밀감을 바라는 충족되지 않는 욕망은 이러한 생산품을 소비하는 데서 만족을 찾는다.”


사랑의 실패와 사랑에 대비되는 증오와 시기심의 경험은 사람들이 점차 사랑을 불신하고, 사랑하려고 노력하지 않게 만든다. 우리는 사랑 상실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TV나 책, 음악, 영화 등 우리 시대에 소비되고 있는 문화 속에는 사랑 이야기로 가득하다. 


사랑 상실의 시대, 우리 인간들은 사랑의 이야기를 계속 생산해 내며 인간은 사랑을 갈망하고 욕망한다. 왜 우리는 다른 시대보다 더 많은 사랑을 이야기하고, 생산하고, 갈망할까? 그것은 ‘혼밥’이라는 우리 시대의 신조어와 ‘관계 공포’라는 심리학적 용어가 보여주는 것처럼 타인과 함께하는 것에 대한 어려움이나 불안을 느끼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애초에 사랑의 관계를 잘 맺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불신하고, 포기하게 된다. 이런 관계 불안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대인공포증(Anthropophobia)이다. 즉, 인간(Anthropo)에 대한 공포(phobia) 혹은 타인과의 관계에 대해 두려움과 불안을 느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듯 사랑을 더없이 갈망하면서도 사랑의 관계 맺기가 서툴러지며 그 믿음과 진정성이 점점 사라지고 있는 오늘날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프롬의 삶을 통해 그 답을 찾아볼 수 있다. 당시 사람들에게서는 사랑보다 증오와 혐오 그리고 죽음밖에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유대인으로서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냉전, 핵전쟁의 위험이 도사리던 절망의 시대 속에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상황에서도 사랑의 관계를 끊임없이 담금질하는 삶을 살았다. 우리는 그의 삶을 통해 그가 모든 인간에게 존재하는 궁극적인 사랑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프롬은 사람들이 단순히 살아가는 것에 그치지 않고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고 싶은 욕망을 지니고 있으며, 그 관계 맺음의 가장 강렬한 형태가 사랑이라고 믿었다. 


이제 우리는 사랑 상실의 시대, 즉 사랑을 포기하고자 하는 마음 앞에서 사랑을 부정하고 그로부터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다른 사람과 하나 되고자 하는 능동적인 사랑을 배우길 기도한다. 


프롬은 우리가 배워야 할 사랑을 “사랑받는 자의 자유, 성장 그리고 행복에 대한 능동적 갈망”이라고 정의한다. 즉, 프롬이 말하는 사랑은 한 인간 전체에 대한 사랑이다.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눅 10:27) 

2023. 06.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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