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윤국영/"예루살렘에서 그리심산 가는 길"/목회와 인문학


예루살렘에서 그리심산 가는 길

윤국영 박사(기독인문학연구원상임연구위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

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행 1:8)

 

족장 길 

시대가 흐르고, 사람이 바뀌었음에도 하나의 길이 수백, 수천 년의 시간동안 변치 않고한결같이 이어진 데에는 이유가 있다. 특별한 신기술 발전이나 지정학적-경제적 변동이 없고서야 가장 가깝고 편한 길을 계속해서 선호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팔레스타인의 중앙 산악지역 분수령 비탈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족장 길(Road of the Patriarchs)’도 마찬가지다. 가나안 시대부터 수백, 수천 년을 이어온 중요 성읍들을 따라 구약의 많은 이야기가 펼쳐지는 길.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이 길을 따라 장막을 옮겨갔다고 해서 ‘족장 길’이라 불린다. 이 길을 따라 가나안의 남단 성읍 브엘세바에서 북쪽으로 헤브론, 에브라다, 예루살렘, 벧엘, 세겜 그리고 도단까지 이른다.

 

수천 년을 사람들이 자유롭게 오가며 양들에게 풀을 뜯기던 길. 그러나 주전 1000년대에 이르면 이스라엘 민족의 두 왕국이 세워지고 향후 천여년에 걸쳐 이 두 지역 거민 사이 서서히 갈등의 골은 깊어진다. 예수님 시대가 되면서 이 두 지역 산지를 가로지르던 북부 족장 길은 유대인에게 피해서 돌아가고 싶은 길로 전락한다.

 

북이스라엘 왕국의 멸망, 갈등의 시작

예수님 시대에 유대 땅(Judea)과 사마리아 지역(Samaria)은 서로 남북으로 잇닿아 있다. 각각의 중심지는 예루살렘과 세겜·그리심산 지역인데 대략 50㎞ 내외의 거리를 두고 있다. 구약시대로 치면 예루살렘은 남유다 왕국의 두 주요 지파 유다와 베냐민의 경계이고, 세겜·그리심 산은 북이스라엘왕국의 두 주요 지파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경계이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관계는 서로 상종도 하지 않을 정도였다(요 4:9).

그 연원은 길게는 예수님 시대보다 1,000년을 더 거슬러 올라간다. 솔로몬 이후 이스라엘 왕국이 여로보암과 르호보암이 이끄는 두 왕국으로 분열되면서 분단의 비극이 시작되었다. 때로는 손을 잡고 때로는 경쟁하면서 200여 년을 함께 하던 두 왕국은 722년 아시리아 제국 사르곤이 북이스라엘 왕국의 수도 사마리아 성읍을 함락하면서 그 공존이 종말을 고하게 된다.

 

이후 아시리아의 사민 정책으로 메소포타미아와 시리아 각처로부터 일부 외래인구가 과거 북이스라엘 왕국 지역에 유입되면서 이곳 주민들은 토착 이스라엘 민족과 일부 외래인구가 혼합된 양상을 띠게 된다. 아직 건재했던 남유다왕국 주민들은 북쪽 주민의 혈통을 문제 삼으며 ‘사자에 의한 개종자들(왕하 17:24-28)’이라고 비하했다. 그러나 북이스라엘 왕국 토착민이 주축이 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북쪽 지역 주민들은 자신을 ‘이스라엘 민족의 후예’라고 보았다.

 

유대와 사마리아, 갈등의 심화 

587년 남유다왕국도 바벨론 제국에 의해 멸망하고 얼마 후, 팔레스타인 모든 지역은 페르시아 제국 통치하에 들어간다. 이때 과거 남유다왕국과 북이스라엘왕국 영토의 핵심 지역은 각각 제국의 속주로서 ‘예후드(Yehud)’와 ‘사마리아(Samaria)’라고 불리게 된다.

같은 듯 다른 두 주민 사이의 미묘함은 바벨론 포로의 귀환으로 더 깊은 갈등을 겪게 된다. 깊은 보수신앙을 지닌 유대 포로 귀환자들은 성전과 예루살렘을 재건하는데, 이들의 눈에 비친 조상의 땅은 타협과 혼합주의가 만연한 곳이었다. 사방으로 유대인의 회복을 방해하는 세력들이 포진하고 있었고 그 주도적 인물이 사마리아 지역의 호론 사람 산발랏(Sanballat the Horonite)이었다.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는 알렉산더 대왕 때(주전 4세기 말) 사마리아인의 성산 그리심산에 예루살렘에 필적할 만한 성전을 지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그리심 산 발굴을 통해 드러난 바에 의하면 이미 주전 5세기부터 사마리아 성전이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사마리아 성전 터에서 발견된 수많은 헌정 비문은 이들 사마리아인도 여호와 하나님을 섬겼음을 알려주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경전은 구약의 주요 사본인 유대인의 알레포 사본이나 레닌그라드 사본과는 범위와 일부 내용이 다른 ‘사마리아 오경’이다. ‘사마리아 오경’은 예루살렘이 아닌 그리심 산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위태하게 이어지던 두 이웃민의 관계에 단절을 초래한 결정적 계기는 주전 110년경 유대 하스모니안 왕조의 히르카누스(Hyrcanus)가 사마리아 성전을 파괴하면서부터다. 이후 로마가 주전 63년 팔레스타인을 정복할 때까지 사마리아인은 유대인 치하에서 억압받았고, 예수님 시대까지 사마리아 성전 터는 재건되지 못한 채 남게 된다. 그리하여 이 시대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서로 상종하지 않는 관계, 서로 길을 피해 다니는 관계로 상

대를 인식하고 있었다. 이런 이유로, 예수님 당대 예루살렘성전을 향하는 갈릴리의 많은 유대인 순례객도 사흘 남짓이면 질러갈 수 있는 족장 길 대신 거의 두 배의 시간이 걸리는 요단 건너편 땅 데가볼리와 베레아 지역으로 우회하여 오가게 된 것이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이 양을 치며 하나님과 동행했던 소중한 자취가 남아있는 길이지만 마냥 여유롭게 조상의 하나님을 묵상할 수는 없게 된 길. 예수님께서는 왜 굳이 이 길로 가시려는 것이었을까?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

(요 4:3-4)

 

유대 땅 족장 길 

헬라-로마 시대가 되면서 예루살렘과 그 주변 지역은 ‘유대(Judea)’라불리게 된다. 예수님 당시 ‘유대(Judea)’, ‘사마리아(Samaria)’ 및 ‘이두메아(Idumea)’는 가이사랴에 본부를 둔 로마 총독이 다스리고 있었다. 성경에는 예수님께서 유대와 갈릴리를 오가시며 두 차례 사마리아 지역을 통과하셨다는 기록이 있다. 한 번은 갈릴리에서 유대 쪽으로(눅 9:51-56), 다른 한 번은 유대에서 갈릴리 쪽으로 향하셨다(요4:3-42).

 

오늘날 아랍인과 유대인이 공존하는 팔레스타인의 풍경을 보면 대개 마을이 각각 따로 있다. 요단 서안지구 같은 전통 아랍 지역에는 대부분 아랍 마을이 있는 반면, 초기 해외이민자가 정착했던 서쪽 해안 지역은 유대인 마을이 많다. 한편 예루살렘같이 크고 중요한 도시에는 아랍 인구와 유대인 인구가 공존한다. 예수님 시대 팔레스타인에는 로마라는 변수가 있어 더 복잡한 양상이었으나 오늘날 풍경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유대인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유대 땅, 요단 건너 지역 그리고 갈릴리를 중심으로 유대인 마을 단위로 거주지를 이루었고, 사마리아인들은 사마리아 산지, 특히 세겜과 그 북쪽 중앙 산지 지역이 중심 거주지였다.

 

헬라나 로마식 도시들이 건립되어 한 도시 내에 유대인, 사마리아인 그리

고 다양한 지역 출신의 이방인이 공존하기도 했다. 오늘날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향하는 성문은 ‘세겜문’ 혹은 ‘다메섹문’이라 부른다. 그 방향으로 가게 되면 나오는 주요 목적지를 이름 붙인 것으로 고대로부터 성문 이름을 짓는 방식이다. 이 문을 지나 성 밖으로 나서면 예수 시대 예루살렘 북쪽의 제 3지역을 통과하면서 무덤과 채석장, 올리브 숲 등이 펼쳐진다.

 

북쪽으로 갈수록 조금씩 더 지대가 높아지는데 길은 대략 해발 800m를 웃도는 중앙산지의 비탈을 타고 이어져 있다. 길 양옆으로 크고 작은 성읍이나 마을이 펼쳐져 있다. 전통적으로 팔레스타인 마을이나 성읍은 산 위에 자리 잡고 있어 알아보기 쉽지만, 신약시대가 되면 언덕에서 내려와 더 낮은 평지에 거주지를 이루는 경우도 많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마 5:14)

‘고대 족장 길’이라 부르던 이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숱한 구약의 이야기가 떠오르고 묵상이 이어진다. 사울의 고향 ‘기브아’를 지나면 곧 ‘기브온’이 나오는데 서쪽으로 해안까지 이어진 ‘벳호론 길’은 유대 성지 순례객이나 로마인들이 사용하던 주요 도로 중 하나이다. 오른쪽으로 예레미야 선지자의 고향 ‘아나돗’이 아랍 마을 ‘아나타(Anata)’라는 이름으로 남아있다. 은전 삼십에 예수님의 피 값으로 산 토기장이의 밭을 예고하듯 예레미야도 하나님의 명을 좇아 이 부근에서 은전 삼십에 토기장이의 밭을 샀다. 더 북쪽으로 가면서 구약의 중요 성읍 ‘미스바(Tell en-Nasbeh)’를 왼쪽으로 바라보며 올라가면 고대 이스라엘의 주요 종교 중심지인 ‘벧엘’이 나온다. 오늘날 ‘베이틴(Beitin)’이라는 아랍 마을이 위치한 이곳은 야곱이 하란으로 도망하던 중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곳이다. 더 동쪽 요단강 방향으로 건조한 반 광야 지역이 펼쳐지는데 이곳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얼마 전 제자들과 잠시 피신하였던 ‘에브라임(Ephraim, Ophrah)’이 있다. 대략 이 지점까지 전통적 유대 땅 영역으로 볼 수 있는데 헬라 시대가 되면서 그 범위가 더 북쪽으로 확장된 듯하다.

 

사마리아 땅 족장 길

벧엘로부터 더 북쪽으로는 ‘에브라임’과 ‘므낫세 산지’가 차례로 펼쳐지는데 요셉의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 자손의 분할지이다. 이 두 산지는 구약시대 북이스라엘 왕국의 핵심 지역이자 북이스라엘인의 후예임을 자처하는 사마리아인의 핵심 지역이기도 하다. 그러나 오늘날 요단 서안지구 내 유대인 정착촌처럼 주전 2세기 말 유대 하스모니안 왕조의 히르카누스가 사마리아 지역을 점령하면서 이 지역 내 유대인 인구도 조금씩 생겨났다. 유대 지역과 사마리아 지역이 칼로 베듯 나뉜다기보다는 두 종류의 마을이 점진적으로, 때로는 서로 병행하는 풍경을 그리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이견을 보이는 바 진정한 성산이 어디인지에 대한 논쟁 외에 예수님 시대 사마리아인이 유대인과 달랐던 점은 무엇일까? 가장 두드러진 차이로 문자를 들 수 있다. 예수님 시대 유대인은 ‘아람문화에 영향을 받은 문자(Jewish script)’를 사용했지만, 사마리아인은 ‘구약시대로부터 전통을 이어받은 문자(Hebrew script)’로 경전을 기록했다.

 

언어적으로는 둘 다 ‘아람어’를 사용했을 것으로 보는데 약간의 지방적 차이 이외에는 의사소통에 지장이 없었을 것이다. 고대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에 옷차림 또한 서로 구분이 가능했을 것이다. 구약시대부터 오늘날까지 팔레스타인 내 각 아랍 지역은 고유의 구별되는 전통 의상과 복식이 있어 어느 지역 출신인지 가늠할 수 있다. 오늘날 극소수 남아있는 사마리아인들의 종교의례 복장 또한 그들만의 독특성을 보여준다.

 

유대인이 항상 회당을 중심으로 뭉쳤듯 사마리아인도 본토 지역에서든지 디아스포라에서든지 거주지마다 회당을 지었다. 주후 2세기 초 유대인 2차 반란(Bar Kokhba Revolt)이 실패로 끝나고 팔레스타인에서 유대인의 세력은 약화된다. 사마리아인들은 반대급부로 향후 수 세기에 걸쳐 번성을 누리게 되고 그에 따라 사마리아 회당도 더 많이 발견된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회당은 건축 양식이나 요소, 그리고 형태에 있어서 유사하다. 그러나 유대인의 회당은 그 중심축이 ‘예루살렘 뱡향’으로 지어졌지만, 사마리아인의 회당은 ‘그리심 산’을 향하고 있다. 또한 유대인의 회당이 마을 내 ‘중심부’에 위치한다면, 사마리아인의 회당은 ‘마을밖’에 세웠다. 내부 장식 면에서 사마리아인의 회당은 유대인에 비해 모자이크 장식 등에서 더 보수적이며 헬라-로마의 이방적 신화 요소를 전혀 허용하지 않는다. 오늘날에도 사마리아인들은 자신들을 ‘참 이스라엘인’이라고 여기며 정통파 유대인 못지않게 율법에 대한 열심을 갖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사마리아인들이 점점 많아지는 지역에 들어서시면서 어떻게 느끼셨을까? 위협과 증오, 갈등으로 인한 긴장은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외는 아니었을 것이다. 마치 오늘날 한 무리의 유대인들이 아랍 지역의 한 가운데를 여행하며 긴장과 압박, 그리고 심지어는 생명의 위협까지 느끼듯이 말이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와 사마리아 땅 ‘옛 족장 길’을 차례로 지나며 택하신 백성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대했던 마음이 어떠했는지 생각에 잠기셨을지도 모르겠다. 가나안 입성 이후 많은 선지자를 통해 숱하게 “하나님께 돌아오라!”라고 외치셨지만 결국 자신의 길에서 돌이키지 못하여 북이스라엘왕국이 멸망하고 남유다왕국도 멸망했다.

오늘날까지 1백여 년간의 팔레스타인 발굴을 통해 북이스라엘왕국과 남유다왕국 영역에서 풍요와 안녕, 보호를 기원하는 ‘여성상(Female figurine)’이 수없이 발견된다. 특히 남유다왕국의 경우 인근 이방 지역보다 월등히 많은 수가 발견되는데 이들은 페니키아, 이집트, 시리아 등지의 이방 모티브를 혼합하여 유다 왕국 내에서 대량 생산한 것으로 아시리아 제국 등에 의한 잦은 전쟁과 사회불안을 달래보려는 의도가 다분했다고 보인다.

 

“여호와께서 각 선지자와 각 선견자를 통하여 이스라엘과 유다에게 지정하여 이르시

기를 너희는 돌이켜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 나의 명령과 율례를 지키되 내가 너희 조상

들에게 명령하고 또 내 종 선지자들을 통하여 너희에게 전한 모든 율법대로 행하라 하

셨으나 그들이 듣지 아니하고 그들의 목을 곧게 하기를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믿지

아니하던 그들 조상들의 목 같이 하여 여호와의 율례와 여호와께서 그들의 조상들과

더불어 세우신 언약과 경계하신 말씀을 버리고 허무한 것을 뒤따라 허망하며 또 여호

와께서 명령하사 따르지 말라 하신 사방 이방 사람을 따라” (왕하 17:13-15)

 

세겜과 수가성 

에브라임과 므낫세 산지가 만나는 곳에 ‘수가성(Sychar)’이 있는데 일반적으로 그 이름이 ‘세겜(Shechem)’과 연관이 있다고 본다. 족장 시대 이래 세겜은 굵직한 구약시대 여러 사건의 주요 무대가 되어 왔고 아브라함, 야곱, 요셉, 여호수아, 아비멜렉, 여로보암 등 주요 인물들과 직접적 연관을 맺는 장소다(창 12:6-7, 33:20; 수 8:30-35, 24:32; 삿 9:1-6; 왕상 12:20, 25). ‘세겜’은 ‘그리심 산’과 ‘에발 산’ 사이에 위치한 ‘텔 엘 발라타(Tell el-Balata)’로 추정된다. 이곳을 발굴하는 과정에서 중기 청동기 시대부터 헬라 시대까지 2,000년에 가까운 거주 층위들이 발견된다.

오늘날 ‘텔 엘 발라타’에는 후기 청동기 시대 층에서 발견된 커다란 선돌(Massebah)이 세워져 있는데, 이는 여호수아가 백성과 더불어 언약을 맺은 후 상수리나무 아래 세운 큰 돌(수 24:26)을 연상케 한다.

 

남쪽 예루살렘부터 ‘족장 길’을 따라 이곳에 다다르면 동으로는 요단 계곡을 통해 시리아로 갈 수 있고 서로는 사마리아 성이, 북으로는 디르사를 거쳐 갈릴리로 갈 수 있는 탁 트인 교차로가 펼쳐지며 ‘세겜’은 그 교차로 중심에 있다. 세겜 앞 땅은 야곱이 하란에서 귀환 시 원주민으로부터 구입하였다고 전해지며(창 33:18-19) 이후 요셉 지파의 중심부로서 요셉의 뼈가 이장되어 그 무덤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오늘날까지 그 인근에는 야곱이 팠다고 전해지는 우물이 남아 있다( Jacob’s Well

Greek Orthodox Church). 뜨거운 햇살 아래 반나절을 걸어오신 예수님께서 이 교차로 어귀에 있는 야곱의 우물터에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하셨다. 고고학 발굴에 의하면 예수님 시대에는 ‘텔 엘 발라타’에 더 이상 사람이 살지 않게 된다. ‘수가성’의 위치는 야곱의 우물에서 더 동쪽으로 1.5㎞ 거리에 있는 오늘날의 ‘아스카(Askar)’라는 마을로 추정된다.

 

요한복음에는 ‘수가성’에 사마리아인들이 다수 거주했던 것으로 묘사되는데, 미쉬나 기록에 의하면 유대인 인구 또한 거주했을 가능성도 있다. 세겜 지역에는 주후 72-73년에 그리심 산 기슭을 따라 로마식 도시 ‘네아폴리스(Neapolis)’가 만들어진다. 예수님 당시 세겜 일대는 교통의 중심지로서 다양한 성격의 주민들이 어우러진 모자이크를 보여주는 듯하다.

 

그리심 산 

사마리아인들의 중심지는 구약시대에는 북이스라엘 왕국의 수도 ‘사마리아(오늘날의 Sebastia)’였는데, 지정학적 사건들에 맞물려 헬라 시대 이후에는 ‘세겜 지역 및 그리심 산’으로 옮겨간다. 요단 서안 지구에서 높은 봉우리 중 하나인 ‘그리심 산(해발 881m)’은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가나안에 들어왔을 때 축복을 낭독한 산이다. 이미 모세 때부터 하나님께서 가라고 지정하신 장소라고 하여 사마리아인들은 예루살렘보다 더 성스러운 산으로 여긴다(신 11:29, 27:12). 발굴(Y. Magen, 1983-2003)’은 모호했던 사마리아인 역사 규명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오늘날 그리심 산 정상에는 주전 5세기경부터 시작되어 약 350년간 사용되었던 ‘사마리아 성전’ 그리고 그 아래 헬라 시대 ‘사마리아 제사장들의 마을

터’가 드러나 있다.


성전 지대는 그리심 산에서 가장 높은 지점에 있으며, 주전 2세기 초에 한차례 확장된다(212×136m). 초기 성전은 예루살렘과 흡사한 면이 있으나 후기 성전은 헬라식 영향도 함께 보인다. 기본구조는 광대한 중앙 뜰로 이루어져 있으며, 동서남북 사방의 문들을 통해 들어올 수 있다. 이 뜰 주변으로 여러 기능의 부속 건물들이 발견된다. 오늘날 지성소는 파괴되어 자취가 모호하지만, 서쪽 벽 가까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40만 점 이상의 희생 제물의 뼈인데 대부분 1년 이하의 어린 동물들이다. 또한 500여 점의 헌정 비문에는 코헨, 레위 등 제사장 및 성전 봉사직 타이틀이 다수 등장한다. 오늘날 ‘그리심 산’에는 사마리아인(팔레스타인 내 약 800명 생존) 중 일부가 마을을 이루고 살고있는데, 매년 4-5월경 이 옛 성전 터 기슭에서 사마리아 력에 따라 ‘유월절’을 재현하는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요 4:20)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과 이야기하실 때 바로 지척 머리 위에 우뚝 솟은 ‘그리심 산’과 폐허가 된 ‘사마리아 성전 터 봉우리’를 보셨을 것이다. 하나님에 대해 각각 스스로 참이라고 생각했던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제국들의 억압 아래 오랜 라이벌의 세월을 겪으며 저들 사이에 형성된 회복 불가능한 갈등과 상처를 예수님은 깊이 아셨으리라. 마치 사마리아 여인의 인생 굴곡을 다 알고 계시듯이, 이 틀어진 관계를 예수님은 어떻게 보셨을까? 예수님께서는 누가 더 옳고 누가 더 그르다는 쪽에 초점을 맞추지 않으셨다. 오히려 집단의 굴레를 벗고 중보자이신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과 소통하는 새로운 백성의 시대가 올 것임을 예고하신다. 그리고 사마리아 여인은 그 새로운 백성의 첫 세대에 합류하는 듯하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

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요 4:23)


2023. 09. 01

출처: 교회성장연구소(portal.icg21.com/board/board.php?bbs_id=humanities&ptype=view&kbbs_doc_num=92)